464화 에필로그, 새로운 나날들 (8)
상황은 곧바로 정리되었다.
크리스가 드미트리를 등에 업고 나서는 순간, 헥토르와 발할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발 물러났다.
“발할라를 대표하여 카즈리 백작의 만행을 사죄하겠다. 발할라로 돌아가는 대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할 것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저도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그렇게 처리해 주신다면 이번 일은 더는 문제 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국가 간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발할라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겠습니다.”
극적인 타결이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드미트리가 협상을 받아들일 명분을 주면서, 발할라는 굳이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카즈리 백작의 문제를 사과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 드미트리가 개입했기에, 전쟁을 각오했던 발할라로서는 이 정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나마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헥토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헥토르가 어떤 나라인지를 증명하는 선례를 남겼기에, 이대로 끝내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크리스의 능력이었다.
그는 드미트리의 위치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두 국가가 전쟁을 벌이려거든 드미트리의 법도 안에서 행동하라고 경고했다.
발 빠른 대처였다. 헥토르와 발할라의 관계를 미리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크리스가 조치하기 전에 문제는 심각해졌을지도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경쟁 사회를 방관하나,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세상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문제였다.
자리를 파했다.
발할라 황제가 먼저 자리를 떠나자, 크리스가 에드윈 헥토르에게 말했다.
“헥토르 국왕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번 일을 벌였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명심하십시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모든 일에 관여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율성을 가지길 바라기에, 이번 문제가 전쟁으로 번졌어도 그것은 두 국가의 문제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제 폐하의 통치는 강력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전쟁과 같은 문제들이 극단적으로 치달아도, 드미트리가 모든 문제를 수습할 수 있기에 법도를 어기지 않는 선에서는 방관자로 남습니다. 그 의지를 절대 활용하려 하지 마십시오. 헥토르의 미래가 밝다고 한들, 그것은 드미트리의 통치 아래에서 존재할 수 있을 때나 기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경고였다.
에드윈 헥토르는 줄타기를 했다.
적당하게 상황을 이용하는 그의 태도가, 크리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에드윈 헥토르가 웃음을 보였다.
“헥토르는 절대 드미트리의 뜻을 반할 생각이 없습니다. 드미트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자이며, 저 또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이번에 벌어진 문제는 그저 드미트리 ‘다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일 뿐입니다. 모두가 황제 폐하의 곁에 머무르길 바라는 마음에 신경전을 하는 것이니, 저희의 의도를 나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세상이 변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인간들의 삶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제국의 위상을 지키려는 두 나라.
그리고 그들의 자리를 넘보는 헥토르.
새로운 흐름이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자신의 포부를 밝히면서, 드미트리를 향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음을 강조했다.
“저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진심을 다할 것입니다.”
확실했다.
에드윈 헥토르.
언제고 헥토르는, 저 인물을 중심으로 엄청난 부흥기를 맞이할 것이다.
* * *
헥토르와 발할라의 사건처럼.
세상에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세상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가 사라졌다고 한들, 인간들의 삶이 무조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르카디아의 한 마을.
한 사내가 떠들어 댔다.
“어휴, 말도 마. 요새 샐러맨더 대륙의 분위기가 살벌하다니까. 헥토르와 발할라가 사사건건 부딪치더니, 이번에는 헥토르 왕국이 발할라의 국경을 넘어가기까지 했다고. 다행히도 드미트리가 개입하면서 상황이 잘 마무리되었지만, 샐러맨더 상인들에 의하면 헥토르와 발할라는 언젠가는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말하더라고.”
“설마 옛날처럼 대륙 전쟁이 벌어지는 거 아니야? 그럼 아르카디아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지난 3년.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전쟁이라는 단어가 다시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평화에 물든 사람들은 불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였다.
옆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한 여인이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이사벨 님!”
여인의 정체.
바로 이사벨이었다.
여왕과 성녀의 직책을 내려놓은 그녀는, 이름 모를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애초에 이번 사건은 대륙 전쟁과는 결이 달라요. 크로노스와 드미트리는 서로를 파멸시킬 작정으로 끝을 본 것이라면, 헥토르 왕국을 이끄는 에드윈 헥토르 국왕은 자국의 저력을 증명하려고 의도적으로 판을 키운 거예요. 이렇게 끝없는 산맥 너머에 있는 우리에게도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라면, 헥토르 왕국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 거겠죠.”
“……그럼 애초에 전쟁을 벌일 의도가 없었다는 의미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만약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고 발할라도 극단적으로 나왔다면, 헥토르는 정말 전쟁을 벌여서라도 헥토르의 저력을 증명했겠죠. 하지만 대륙 전쟁에 비할 바는 아니에요. 두 국가의 싸움은 단순한 이권 다툼으로 끝났을 것이고, 패자는 앞으로의 판도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겠죠. 그러니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상, 우리가 우려하는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설령 상황이 극한으로 치닫는다고 할지라도, 마왕을 쓰러트렸던 것처럼 드미트리가 개입하는 순간 모든 문제는 해결될 거예요.”
“그렇군요.”
“역시 성…… 아니, 이사벨 님이시군요!”
사람들이 감탄했다.
확실히 이사벨은 달랐다.
샐러맨더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이사벨은 특별한 정보 없이 판도를 읽었다.
이사벨이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아이의 손을 잡고 떠나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역시 이곳에 있을 인물이 아니라며 신나게 떠들어 댔다.
* * *
3년 전.
이사벨은 모든 것을 버리고 아르카디아로 떠났다.
마계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데리고 마을을 형성했고, 그곳이 바로 현재 자신이 머무는 마을이었다.
그녀의 하루는 평온했다.
아침 일찍 눈을 뜬 그녀는 침구류를 정리했고, 밖으로 나가서 농작물을 관리했다.
아르카디아에 따스한 햇볕이 허락되는 현실을 확인할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나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삶을 돌보았다.
“저번에 다친 다리는 괜찮으세요? 그대로 내버려 두면 탈이 나니까, 제가 상처를 봐드릴게요.”
“마을에 필요한 물자는 이미 부탁한 상태예요. 내일 오후 안으로 상단이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그때 물자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을 거예요. 필요하다면 제 것을 드릴게요.”
“그거 이리 주세요. 같이 옮겨 드릴게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마을 사람들 모두.
이사벨을 만날 때면 환히 웃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도와주는 그녀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직 아빠의 손길이 필요한 사내아이가, 엄마를 붙잡고 아빠는 어떤 분이었냐고 물었다.
곤란한 물음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이사벨을 따르던 병사 중 한 명.
이사벨은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엄마를 대신해 사내아이를 품에 안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아빠는 정말 용감하신 분이었단다. 세상을 위협하는 나쁜 존재들이 있었는데, 네 아빠가 그들을 모두 무찔러서 지금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갈 자격이 있어. 나중에 네가 커서 세상으로 나갔을 때, 네 아빠가 해낸 일들을 말한다면 모두가 네가 얼마나 대단한 아빠를 두었는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그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단다. 네 아빠와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이 마을과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정말요?”
“그래. 이 누나가 거짓말한 적 있어?”
환히 웃었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이사벨은 이들을 위해 살았다.
레오와 병사들이 자신을 믿고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들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이들은 물었다. 모두가 떠받들었던 자신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만족스럽냐고.
누군가는 거짓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사벨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누나라면 믿을게요! 저는 커서 아빠처럼 되고 싶어요!”
같이 웃는 아이.
행복했다.
드미트리가 다스리는 세상.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사벨은 정말 이 삶이 행복했다.
* * *
세월이 빠르게 흘렀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샐러맨더 대륙을 통해 여러 일이 들려왔다.
세상은 여전히 떠들썩했지만, 드미트리가 중심을 버티고 있기에 크게 문제가 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레오. 네가 이 세상을 경험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문득문득.
레오의 존재가 떠올랐다.
자신을 따라 마계로 넘어갔던 그는, 항상 인간다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았었다.
그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로만 드미트리.
모두 그의 능력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타고난 존재는 당연히 개인을 위해서 사람들을 핍박할 법도 한데, 악의 무리가 사라지자마자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은 점차 잊혀 갔다.
당혹스러운 현상이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는 어디에서도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이 들렸건만, 지금은 일반 백성들로서는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3년이 넘도록.
로만 드미트리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황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사벨은 로만 드미트리가 그렇게 사는 이유를 알았다.
‘균열을 최대한 늦추기 위함이겠지.’
마왕을 쓰러트리며.
로만 드미트리는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다.
그가 이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칠수록 균열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 속도를 늦추었다.
사실 이사벨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오르고도, 진실을 숨기고 어째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걸까.
확실한 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선택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했고, 지금도 자신의 삶을 후회할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자의 자리.
목표를 이루었다.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절대적인 존재일 것이다.
‘당신도 나와 같은 행복을 느끼길 바라요.’
언젠가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이사벨이 신전으로 향했다.
성녀의 자리를 내려놓았지만, 그렇다고 신을 모시는 행위를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신께 드리는 기도.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오늘만큼은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행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던 이사벨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을 감싸는 성스러운 기운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너무나도 익숙한 현상이었다. 이와 같은 힘에 이끌려 신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신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이사벨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아아.”
그날이 찾아왔다.
신이 말했던.
제발 찾아오지 않길 바랐던 그때가.
* * *
그 시각.
로만 드미트리는 황궁을 나섰다.
그것은 따로 보고되지 않은 비공식적인 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