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66화 (466/615)

466화 프롤로그 (1)

한 사내가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행색은 매우 초라했다.

거대하고 화려한 복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거칠게 헝클어진 머리와 지저분한 복장은 이질적인 느낌을 풍겼다.

하지만 이곳을 지키는 그 누구도 사내를 제지하지 않았다. 강인한 인상의 경비병들은, 사내를 발견할 때면 황급히 길을 비키며 그를 향한 예의를 표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길을 가로막는 거대한 문에, 사내는 경비병을 사납게 보았다.

“열어.”

“알겠습니다.”

끼익.

사전에 얘기된 부분이었다.

본래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철옹성.

거대한 문이 활짝 열리자, 그 안에 먼저 자리하고 있는 일련의 사람들이 보였다.

“케빈 님이 입장하십니다.”

사내.

케빈이 내부를 훑었다.

그중 한 여인에게 시선이 멈추자, 케빈은 거칠 게 없다는 듯이 사나운 이빨을 보였다.

“이사벨 님. 우리를 이렇게 불러모은 이유는 반드시 주군과 관련한 것이어야 할 겁니다.”

* * *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드미트리 제국에 비상이 걸렸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실종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최측근인 한스가 불안한 마음에 힘을 실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발생한 것이 분명합니다. 실종되기 직전, 황제 폐하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치 작별 인사라도 하듯 제게 고마운 점을 말씀하셨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그것이 작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문제는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 떠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계셨다면, 그분으로서는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참담한 얼굴이었다.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실종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런 안일한 태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전면에 나섰다. 항상 한발 물러나 하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했으나,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기꺼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례로 나서는 사람들.

그들에게도 한스와 같은 경험이 있었다.

점점 문제가 생겼다는 결론으로 집중되는 상황에, 케빈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저는 주군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가 어떤 분입니까?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건재하던 시절에 대륙의 양대 산맥을 무너트렸으며, 인간으로서는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재앙이라고 여겼던 마계의 악마들을 무찌른 분입니다. 대체 누가 그분에게 강제로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케빈 님의 말처럼, 이번 사건은 실종으로만 여길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외출일지도 모릅니다. 황제 폐하는 항상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현실을 외면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에게 신이었다.

마계의 마왕조차 감당하지 못한 존재에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같은 경험.

다른 의견.

일단 회의는 일단락되었다.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나, 케빈이 주장한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게 사실이어야만 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문제가 발생했다면, 사람들은 일개 인간의 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실 부정이었다.

감정을 억눌렀다.

걱정을 배제했다.

로만 드미트리이기에, 언제나 그랬듯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그러길 며칠.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의 믿음이 흔들렸다.

매일 로만 드미트리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반복되는 하루는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조용했다.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이건 아니었다.

정말.

정말 아니었다.

* * *

그리고 현재.

이사벨은 차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케빈을 비롯한 사람들.

다들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로메로 드미트리, 크리스, 발렌티노, 파비우스, 펠릭스, 에드윈 헥토르 등등 현재 대륙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 말할 것이 있다는 말에 한달음에 몰려들었다.

이들 모두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그런 의미였다.

이사벨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대륙이 들썩이는 동안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분과 약속했어. 내가 아는 진실을 세상에 말하지 않겠다고. 대륙을 통일하고 마계를 평정한 존재가 어째서 사라져야만 했는지를, 그 이유를 절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지난 한 달.

정말 불편한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진실을 함구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에서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귓속으로 들려왔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라졌다는 소문. 그리고 그를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한번 귀를 기울이니 도저히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로메로 드미트리.’

시선에 닿은 사내.

한때는 드미트리의 거인이라고 불리던 사내가, 반쪽이 되어 버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종 이후.

로메로 드미트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했다.

사람을 풀어 로만 드미트리의 행적을 찾았고, 도무지 실마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 본인도 수색 작업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야위어 가는 모습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호탕하던 얼굴은 슬픔으로 물들었고, 아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로메로 드미트리는 시름시름 앓았다.

특히 로만 드미트리와의 마지막 만남. 아비로서의 감정을 더 표현했어야 했는데, 언제든 기회가 있다는 생각에 아들을 보내 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일이 후회로 남았다.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절대 후회를 남길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금발의 미남자가 보였다.

‘크리스.’

드미트리의 미래.

그는 최근에 휴직계(休職屆)를 냈다.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 수색 작업을 진두지휘하기 위함이었고, 그동안 얼마나 고된 시간을 보냈는지 찬란했던 금발 머리가 푸석푸석하게 변했다.

차례로 눈에 밟히는 사람들.

다들 똑같았다.

모두가 동참했다.

발렌티노 후작은 로만 드미트리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를 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컬렉션을 걸었고, 하렘을 건설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파비우스 후작 또한 수색 작업에 동참했다.

그는 어여쁜 여인보다 황제 폐하의 안위가 더욱 중요하다면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그것은 드미트리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에드윈 헥토르 국왕은 국가적으로 로만 드미트리 수색 작업에 동참했고, 얼마 전에 진행되었던 국제회의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실종은 재앙이라는 표현을 내뱉었다.

실제로 대륙의 미래를 말하는 현자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혼란스러웠던 세상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기에, 그의 실종은 혼란으로 직결된다고 단언했다.

카이로도 난리가 났다.

로만 드미트리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나라는, 국왕인 다니엘 카이로부터가 수색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국제회의는 모든 국가가 수색에 동참하겠다는 성명문을 발표했다.

세상이 난리였다.

사람들이 모일 때면 로만 드미트리에 관해 얘기했고,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들 로만 드미트리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다.

대륙을 통일한 절대자이면서도 상식적으로 세상을 다스렸던 존재. 로만 드미트리는 모두에게 필요했다.

그를 아는 사람도, 알지 않는 사람도.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케빈.

그는 광적으로 흔적을 찾아다녔다.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로 사람들에게 로만 드미트리에 관해 묻는다는 소식에, 이사벨은 안타까운 마음을 삼켜 버릴 수 없었다.

어느 날. 케빈이 자신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고개를 저어 진실을 모른다고 했으나, 다 해진 그의 신발은 며칠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았다.

착잡했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옳을까.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옳을까.

매일 밤 생각에 잠겼다.

견고했던 그녀의 마음은, 케빈과 같은 이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진실을 말하기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진실을 갈망하는 그들의 눈빛에, 이사벨은 애써 삼켜 왔던 진실을 토해 냈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진실을 말씀드릴게요.”

* * *

복잡한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실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말해야 했다.

이사벨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차원의 규율이 존재해요. 지상계, 마계 등등 무수히 많은 차원이 서로를 간섭할 수 없도록 정해진 신의 법칙이며, 이것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미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다들 의문이 생기겠죠. 차원의 규율이 절대적이라면, 그동안 마계는 대체 어떻게 지상계를 공격할 수 있었는지를. 그것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 필요가 있어요.”

알렉산드르.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사실 그만 아니었다면, 모든 문제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알렉산드르 황제는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였어요. 그로 인해서 차원의 경계에 틈이 생겨났고, 마계의 악마들이 지상계를 공격할 수 있었죠. 그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어요. 알렉산드르 황제가 오랜 세월 존재하면서 차원의 경계가 무너져 내렸고, 우리가 마계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어요.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결단을 내렸어요. 마계의 공격이 예정된 미래라면, 먼저 그들을 공격해서 위험 요소를 박멸하겠다고.”

마계와의 전쟁.

그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이었다.

사람들은 마계의 존재만 경계했을 뿐, 알렉산드르와 관련한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사실 저도 마왕을 쓰러트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마계로 넘어간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어요. 알렉산드르가 차원의 균열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그가 차원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였기 때문이었고,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제가 되었죠. 그리고…… 그러한 전제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였어요. 어떤 이유에서 그분이 알렉산드르와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께서 말씀하시길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마계로 넘어간 그 순간부터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고 하셨어요.”

이사벨은 진실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알렉산드르와 같은 이세계의 존재라는 사실을.

신의 설명을 떠나서, 알렉산드르의 정체를 알아보는 모습에 숨겨진 진실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에 이번 자리를 마련했으나, 이사벨은 처음부터 진실을 전부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충격적이되.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이사벨은 드미트리로 이동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할지 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일은 실종이라고 볼 수 없어요. 마계로 넘어간 그 순간부터 스스로 받아들인 현실이며…….”

“잠깐.”

순간.

누군가가 말을 툭 끊었다.

케빈이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순간부터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어쩌면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던 지난날들보다 절망적인 진실이었다.

이사벨의 말이 사실이라면, 로만 드미트리의 행적은 명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꾹꾹 억눌렀다.

붉게 충혈된 눈이 이사벨을 향했다.

“……설마 지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인류를 위해 희생했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까?”

희생.

그건 정말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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