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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69화 (469/615)

469화 새로운 시작 (2)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마치 산책을 하듯,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 걸어가며 눈에 보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때와 같구나.’

직전의 삶.

로만 드미트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때, 블러드 팽을 만난 로만 드미트리는 나뭇가지 하나로 그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렸다.

삶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었다.

마주한 적의는 피하지 않는 것. 맨손으로도 병정개미들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나, 지금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고 싶었다.

까드드득.

병정개미들이 사납게 턱을 들썩였다.

눈에 보이는 건 다섯 마리.

땅굴을 통해 달려드는 건 세 마리.

덤덤했다.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강민호의 전투를 지켜보면서,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마계에서 수도 없이 상대했던 마물들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들.

포식자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미개한 생명체들을 상대로, 로만 드미트리는 서슴없이 걸음을 옮겼다.

강민호가 눈을 부릅떴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 한 인간과 괴물들의 격돌은 참혹한 결말을 예고했다.

그런데.

번뜩.

키에에에에엑.

한 번의 번뜩임.

선두에서 달려들던 병정개미들의 사지가 찢겨 나갔다.

강민호의 대검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단단한 외피가, 겨우 나뭇가지와 닿자마자 두부가 잘리듯 검붉은 피를 뿜어 댔다.

병정개미 세 마리가 죽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앞에서 병정개미들이 우르르 무너짐과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는 곧바로 나머지 두 마리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푸확.

피가 튀었다.

10초?

아니,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병정개미들을 모두 처리하자, 땅바닥이 들썩이며 이미 파악해 두었던 존재들이 갑작스럽게 땅을 뚫고 나왔다.

그들로서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땅굴을 활용해 인간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려던 그들은, 머리를 들자마자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했다.

콰직.

퍽.

머리를 짓밟아 버렸다.

마나를 실은 일격에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고, 나머지 두 마리는 공포에 질린 듯 공격하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병정개미는 지능이 매우 낮은 생명체다. 그들은 태생부터 부여받은 역할을 맹목적으로 이행하기에, 전장에서 그들이 물러나는 경우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런 병정개미들이.

전의를 잃어버렸다.

DNA에 각인된 역할을 잊을 만큼,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강력한 포식자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찰나의 망설임은 죽음을 의미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바닥에 흩뿌려진 사체를 짓밟으며 굳어 있는 병정개미의 머리를 그대로 베어 버렸다.

서걱.

투두둑.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들.

끝이었다.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며 뒤를 돌아보자, 경악으로 얼룩진 강민호의 얼굴이 보였다.

“……대, 대체 어떻게.”

일련의 상황.

그건 강민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 * *

로만 드미트리가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을 때.

강민호는 절망했다.

역시나 정신병자였다는 생각에,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막막한 상황에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뭘 고민하기도 전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병정개미들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와.”

경악했다.

믿기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무기.

한낱 나뭇가지에 불과했다.

땅바닥에 내리쳐도 무력하게 부서지고 말, 무기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나뭇가지가 병정개미의 단단한 외피를 가볍게 찢어발겼다.

사고 회로가 완전히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지켜보고 있는 동안 병정개미들이 모조리 도륙당했다.

“……대, 대체 어떻게.”

그제야 알았다.

마나 측정기의 결과.

상대는 측정되지 않을 만큼의 약자가 아니라,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강자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B등급 이상의 강자라는 뜻인데. 절정(絕頂) 등급의 헌터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헌터의 등급은 세계 공용이다.

최상위인 S등급을 제외하고는 A등급부터 F등급까지 단계별로 나뉘는데, 해당 등급을 대한민국에서는 또 다르게 표현했다.

가장 밑바닥인 F등급은 수습 헌터, 현재 강민호가 속해 있는 E등급은 일반 헌터, 숙련된 무력을 갖춘 D~C등급까지를 특급 헌터, 그리고 B등급부터 A등급까지는 세계 어디에서나 귀빈 대위를 받는다고 알려진 절정 헌터라고 불렀다.

마지막 S등급은.

영웅의 단계였다.

한국에서는 백의(白衣)의 마법사만이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영웅 헌터의 칭호를 인정받았다.

‘소문으로 들었어. 절정 헌터부터는 일반적인 헌터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보통 대한민국에 소속된 B등급 이상의 헌터들은 모두 쉘터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 사람은 대체 왜 여기에서 방황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아무리 절정 헌터라지만, 나뭇가지 하나로 병정개미의 단단한 외피를 베어 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텐데. 혹시 전승자(傳承者)거나, 아니면 선택받은 자인 건가.’

심장이 뛰었다.

헌터.

일반인들이 각성이라는 단계를 거치면 특별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데, 이 헌터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들이 바로 전승자와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게임 시스템 방식으로 강해지는 평범한 헌터들과는 다르게, 각자의 특별한 방식으로 압도적인 힘을 보였다.

세상의 0.01%.

극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축복.

강민호의 상식으로는, 그런 부류가 아니고서는 로만 드미트리의 압도적인 힘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건 기회야.’

강민호는 전형적인 일반 헌터였다.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그리고 각성 시기마저 늦어서 성장 가능성도 매우 떨어지는 흔하디흔한 헌터.

그런 강민호에게 절정 등급 이상의 헌터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였다.

처음에는 일반인처럼 보이는 존재가 왜 이곳에서 방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상대는 자신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본인을 도와달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 기회로 강해질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기회주의자라 말할지 몰라도, 딸과 같이 쉘터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그때였다.

“왜 그러고 넋을 놓고 있지?”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강민호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약속했던 대로, 제가 책임지고 한 달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 * *

더는 사냥터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둘은 걸음을 옮겼다.

보호 지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민호는 통역 마법을 재차 사용하며 여러 가지를 설명했다.

“기초적인 것부터 설명해 달라 하셨으니 첫 시작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표현한 존재가 나타나면서부터 대재앙은 시작되었습니다. 절대자는 앞으로 10번의 대재앙을 예고했고, 그 모든 대재앙을 막아 낸다면 이 세상을 보존시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절대자의 존재는 미스터리이나, 대재앙이라고 명명한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되면서부터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헌터들이 등장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헌터들은 ‘게임 시스템’과 같이 미지의 존재가 부여하는 보상을 통해 강해지며, 헌터들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대재앙에 대항할 힘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5번이나 진행된 대재앙으로 인해 세상은 황폐화가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 냈으나, 도시를 온전히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죠.”

5번의 대재앙.

문자 그대로의 참담한 현실이었다.

세상 곳곳에서 몬스터가 범람하는 대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이 피땀을 흘려 일군 도시가 무너져 내리며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대재앙의 주기는 변칙적이었다. 5번째 대재앙이 끝나고 수년이 지났기에, 최근 사람들은 6번째 대재앙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재앙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쉘터를 형성했습니다.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은 각 도시를 쉘터화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대한민국은 각성자의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다 보니 수도인 서울을 제외하고는 쉘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쉘터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을 수용할 수 없었고, 저희는 쉘터 입성에 거부당해 무늬만 안전 지역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지금 안내하는 곳이 바로 그 안전 지역입니다.”

강민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안전 지역.

방금 설명한 것처럼, 안전 지역은 무늬만 안전 지역이었다.

비보호 지역처럼 완전히 몬스터들에게 노출된 것은 아니나, 이 나라의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절정 헌터 이상부터는 대재앙이 찾아왔을 때 쉘터를 중심으로 뭉쳤다.

일단 쉘터 사람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확보한 뒤에, 수도를 기준으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몬스터를 정리했다.

고로.

쉘터 입성은 모두의 꿈이었다.

강민호가 아득바득 사냥에 나서는 것도, 하나뿐인 딸과 쉘터에 입성하기 위함이었다.

설명은 계속되었다.

강민호로서는 절정 헌터가 왜 이런 설명을 듣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설명해 달라고 하기에 군말 없이 따랐다.

상대는 인생의 동아줄이 될지도 모르는 존재. 비상식과 상식의 영역을 떠나서, 이번 인연을 계기로 어떻게든 절정 헌터와 인맥을 형성하고 싶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중세 시대처럼 성벽을 쌓은 건물을 바라보며, 강민호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입니다. 대한민국의 안전 지역 중 하나인 인천입니다.”

* * *

각 도시.

대한민국은 안전 지역을 형성했다.

정식으로 쉘터라 명명한 곳은 서울이 유일하나, 인천 또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체계를 갖추었다.

대재앙 이후.

인천의 80%는 비보호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나머지 땅에 안전 지역을 형성했고, 성벽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가 펼쳐졌다.

대재앙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사회의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현장에 투입되었고, 사람들은 산책과 인터넷을 하는 등의 일상생활을 즐겼으며, 정부가 관리하는 마트는 사람들이 혼란스럽지 않도록 합리적인 가격에 물품을 판매했다.

적어도 안전 지역 안에서는 최대한 20년 전과 똑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었다.

혼란 속의 평화로움.

새로운 세상의 현실이었다.

강민호의 보증을 통해 도시에 입성한 로만 드미트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현재 거주지인 작은 빌라에 도착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빠!”

소녀였다.

올해 12살인 딸 강민아가 아빠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모습에, 강민호는 황급히 딸을 낚아채 방으로 데려갔다.

“민아야. 미안한데 이따가 얘기하자.”

“너무해!”

재회는 짧았다.

간신히 딸을 데려다 놓은 강민호가, 땀을 닦으며 로만 드미트리에게 말했다.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병정개미들의 부산물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일단 제가 챙기기는 했지만, 값이 제법 나가는지라 어떻게 할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통역 마법 스크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의 가치지?”

“수십 개를 사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D등급의 몬스터부터는 부산물의 가격이 상당한데, 병정개미를 무려 여덟 마리나 처리했으니 적지 않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네가 관리하거라. 네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소모되는 지출에 보탬이 되겠지.”

“알겠습니다.”

묘한 관계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하대를.

강민호는 존대를.

서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서로는 서로의 관계를 정립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리고 미리 말할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너는 나를 절정 등급의 헌터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 흔치 않은 존재라면, 너는 이곳의 보고 체계에 따라 내 존재를 상부에 보고하겠지. 그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제지하지 않겠다. 도시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네가 나의 존재를 보증했으니, 이미 행적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강민호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로만 드미트리는 말을 덧붙였다.

“그들에게 말하라. 한 달. 그 안에는 내게 접근하지 말라고. 섣불리 내게 무언가를 하려 한다면, 그 이후의 일은 장담할 수 없다.”

* * *

강민호가 딸을 데리고 밖을 나섰다.

딸은 당분간 사촌에게 맡길 생각이었는데,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아직도 소름이 돋았다.

‘언어에 제약이 있을 뿐, 이곳의 체계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

그의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

신원 미상자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안전 지역에 출입했으니, 그의 신원을 보장한 자신은 정부에 보고해야만 했다.

‘인천 정부가 절정 헌터의 존재를 알면 어떻게 될까.’

장담컨대.

난리가 날 것이다.

서울에 모든 실력자가 집중된 상황에, 무소속으로 보이는 절정 헌터의 존재는 인천 정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터 길드가 모두 군침을 흘릴 만한 사안이었다.

아마 앞으로 한 달간은 자신도 정신없는 나날을 보낼 것이다. 절정 헌터를 영입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그와 관련한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감수할 만한 가치는 있었다.

강민호는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와의 인연을 이어 나가길 바랐다.

30분 뒤.

딸을 맡긴 강민호가 인천 정부에 연락했다.

“지금 찾아뵙겠습니다. 제가 보증한 신원 미상자에 대해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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