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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72화 (472/615)

472화 한 번의 실수 (1)

걸음을 옮겼다.

앞장서 걸어가는 상황에, 강민호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람을 죽였어.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련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는 고상호가 살의를 드러내자마자,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를 날려 버렸다.

충격적이었다.

대혼란 이후 폭력이 사회를 지배한다지만,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물론 강민호도 살인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헌터들의 분쟁은 서로의 목숨으로 직결되기에, 자신을 죽일 듯이 공격하는 적의 심장에 칼을 쑤셔 박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정당방위였다. 대항할 능력을 잃어버린 상대의 머리를 날려 버린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렇다고 이걸 로만 드미트리 님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야. 파격적으로 대응했을 뿐, 고상호를 죽일 명분은 충분했어.’

상황을 돌아보았다.

고상호는 알려지지도 않은 정보를 확인해 무단으로 침입, 그 대가로 다리가 잘려 나가자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대며 살해 협박을 내뱉었다.

딜레마였다. 고상호의 발언은 협박에 불과하나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는 내뱉은 말처럼 분명히 레드문의 병력을 동원할 것이고,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에서 방금과 같은 상황은 정당방위의 영역이었다.

고로.

순서의 차이였다.

일반적으로 살인은 분쟁이 더 심화되었을 때 발생하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상식보다 한발 앞섰다.

‘방금의 살인으로 로만 드미트리 님을 악인(惡人)이라 말할 수는 없어. 선을 넘은 건 레드문이었고, 대혼란의 시대에 목숨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사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할 수 없는 이유는 뒷감당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며칠이지만 내가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 님은 충분히 합리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어. 거래의 대가로 병정개미들을 쓰러트렸고, 한 달간의 생활비를 생각해 값비싼 부산물을 그냥 넘겨주었지.’

숨을 골랐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를 그냥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면 한발 물러났겠으나,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위험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한번 믿어 보고 싶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쉘터로 이끌어 줄 존재라면, 하나뿐인 딸을 생각해서라도 악착같이 곁에 머물러야만 했다.

생각을 정리했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동행을 택했다면, 지금부터 직면한 문제는 인천의 거대 길드 레드문과의 분쟁이었다.

‘살의를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고상호의 머리를 날릴 정도라면, 로만 드미트리 님은 절대 레드문과 타협하지 않겠지. 그건 레드문도 마찬가지야. 레드문의 길드 마스터는 매우 호전적인 사람이고, 길드의 평판을 생각해서라도 고상호의 죽음을 방관할 리가 없어. 이대로 로만 드미트리 님을 레드문의 본거지로 안내한다면, 둘 중 하나가 죽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야.’

일개 개인과 집단.

결과는 뻔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앞서 걸어가던 강민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

* * *

묘한 기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외형적으로 자신보다 어려 보였지만, 그에게 진심을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단순히 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하대와 의도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심적으로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현실적인 문제들을 언급하려는 이 상황에, 강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상대는 레드문입니다. 소속된 헌터의 숫자가 백여 명이 넘으며, 그들의 길드 마스터는 수년 전에 B등급을 확보한 실력자입니다. 길드 마스터 한 명을 감당하기도 버거운 일일 텐데, 혼자서 그들의 본거지에 쳐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더 말하라는 듯이 담담하게 바라보는 모습에, 강민호는 힘을 얻었는지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 이해합니다. 고상호는 무단으로 침입해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협했고, 상대가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현실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드문의 위협을 막아 낼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천 정부에 몸을 의탁하십시오. 인천 정부에 소속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현재 인천 정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영입하길 바라기에, 일시적으로 협력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김준혁.

그는 능력이 상당한 인물이다.

레드문이 공격적으로 나올지라도,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시킬 능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가 별개의 존재라고 말하지만, 대재앙이 들이닥치지 않는 시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증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고상호를 죽인 일이 정당방위라는 것에 대한 증인. 인천 정부가 법적인 문제로 레드문의 발목을 걸고넘어진다면, 레드문으로서도 인천 정부의 보호를 받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당장의 안전을 확보한 뒤에, 이후에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천천히 레드문과의 전쟁을 준비하십시오. 우호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시기를 선점한다면, 그때는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강민호는 갈림길에 섰다.

증언.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레드문과의 분쟁에서 증언하겠다는 것은 레드문을 적으로 두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분명히 증인을 맡은 강민호를 적대할 것이다. 살해 위협을 받을지도 모르나, 강민호는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른침을 삼켰다.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내뱉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지금부터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강민호의 제안.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다.

목적이 다분한 호의.

열망으로 들끓는 강민호의 눈빛에, 로만 드미트리는 웃음을 머금었다.

‘재밌네.’

저 눈빛.

익숙했다.

새로운 삶에서 맺은 새로운 인연에,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전생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 * *

두 번의 전생(前生).

처음 로만 드미트리로서 살아갔을 때, 그에게 전생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삶의 밑바닥.

투쟁을 강요하는 아버지.

피로 점철되는 삶에, 어린 소년은 살아남기 위해서 악귀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새로운 삶을 맞이한 로만 드미트리에게, 전생은 고통스럽기만 한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전생에도 이와 같았지.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 인해 나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크리스, 케빈.

발렌티노, 파비우스.

에드윈 헥토르, 다니엘 카이로 등등.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하며 열망을 표출했다.

크리스는 제일의 검이 되겠다는 열망, 케빈은 빈민가를 탈출하겠다는 열망, 발렌티노는 소유욕에 대한 열망 등, 그들의 열망을 마주하며 로만 드미트리는 열망을 들어주는 대가로 사람을 얻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거래였다.

열망을 대가로 한 거래는 확고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기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존재들을 하나둘씩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전생을 가득 채웠다.

로만 드미트리는 인간으로서 살았고, 그렇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마지막 3년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나는 삶에 목마른 사람들을 원한다. 삶의 밑바닥에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악착같이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부류의 사람들. 무력하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나아갈 수 없다.’

열망은 삶의 원동력이다.

그렇기에.

강민호와 같은 사람들이 싫지 않았다.

전생을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열망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방향성을 제시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내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나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의 영역을 형성할 것이다. 이번 일은 그 시작일 뿐이다. 네 말은 일리가 있으나, 나는 내게 적의를 드러낸 존재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선택하라.”

존재감이 부풀었다.

강민호를 바라보며, 지금 마주하는 존재가 어떤 사람인지를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로 네 안위가 걱정된다면 물러나라. 처음부터 네게 그럴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나를 레드문의 본거지로 안내하고 그 위험을 감내하겠다고 말한다면, 앞으로 나를 위해 살아가겠다고 말한다면. 네가 바라는 열망을 이루어 주겠다. 내 곁에서, 너는 네가 바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강민호가 눈을 부릅떴다.

예상 밖의 발언.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딸을 제외한 누군가를 위해 살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건만, 그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본능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이 사람과 함께라면.

꿈처럼 생각했던 일들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딸과 쉘터에 입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많은 일을.

“……같이하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열망을 이루어 주신다면, 저는 목숨도 바칠 수 있습니다.”

말뿐인 대답.

충분했다.

언제나 그랬듯, 사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많은 조건은 필요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레드문의 본거지로 안내하라. 지금부터 너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 * *

레드문의 길드 마스터.

차동철은 창밖으로 인천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울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지도 5년이 지났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5년 전.

B등급으로 승격한 차동철은 절정 헌터라는 자부심에 하늘 높은 줄을 몰랐고,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니다가 한 사내를 만났다.

그때는 몰랐다. 같은 절정 헌터일지라도 A등급과 B등급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그날의 싸움으로 차동철은 한쪽 눈을 잃어버렸고, 서울에서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인천으로 떠났다.

그때의 선택.

사람들이 비웃었다.

상위 등급의 헌터들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취급해 주지 않기에, 사람들은 차동철을 보며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런 굴욕을 참아 내며 지난 5년을 보냈다. 절정 헌터라는 타이틀에 인천의 헌터들이 몰려들었고, 지금은 백여 명의 헌터를 보유한 거대 길드가 되었다.

오른쪽 눈이 욱신거렸다.

곧이었다.

A등급으로 승격하면, 차동철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존재를 찾아가서 처참하게 복수할 것이다.

‘살귀(殺鬼). 너는 나를 잊어버렸겠지만,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기다려라. 내가 곧 찾아갈 테니.’

살귀.

한국에 얼마 존재하지 않는 A등급 헌터 중에서, 가장 호전적이라고 알려진 존재.

차동철은 그를 만난 날에 벽을 느꼈다.

살귀는 무려 전승자의 능력을 타고난 존재였고, 0.01%의 특별한 존재들이 재능마저 타고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검술. 육체를 난도질하는 공격에 차동철은 무릎을 꿇었고, 상대는 대가랍시고 검으로 그의 눈을 도려내 버렸다.

5년의 세월.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차동철은 A등급으로 올라서기 위해 노력했고, 1년 전에 그에게 엄청난 기연이 생겼다.

‘기억의 돌. 전승(傳承)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도 차원의 경계를 넘을 수 있게 만드는 물건. 나는 기억의 돌을 통해 전승 능력을 얻었다. A등급으로 승격한 뒤에 레드문을 이끌고 살귀를 공격한다면, 살귀가 제아무리 강할지라도 혼자서 나를 필두로 한 집단을 감당하진 못하겠지.’

웃음이 나왔다.

천운이었다.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억의 돌을 얻게 된 것은, 살귀에게 복수하라는 하늘의 뜻이 분명했다.

꽈악.

쿠르르르르릉.

주먹을 움켜쥐자 마나가 들끓었다.

강렬한 힘.

얼른 승격 시험을 보고 싶었다.

새로운 A등급 헌터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 레드문은 인천이 아니라 서울에까지 명성을 떨칠 것이다.

그렇게 희망에 차오른 그때.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길드 마스터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하였다.

다급한 얼굴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차동철이 표정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이번에 영입하려던 신원 미상자가 길드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가 고상호 님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뭐?!”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상호의 죽음.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차동철을 분노하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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