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80화 (480/615)

480화 개미굴 (1)

선두는 박기태가 맡았다.

그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황폐화한 도시를 가로지르며, 자신을 따라오는 두 사내에게 말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천 바닥에서 길잡이로 저 박기태를 고른 건 신의 한 수입니다. 만약 다른 길잡이였다면? 벌써 몬스터와 맞닥트려서 시작도 전에 힘을 빼고 있었을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

박기태가 이번 임무를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헌터들은 해당 등급의 몬스터를 쓰러트리면서 승급 자격을 확보하는데, 박기태와 같은 비전투 인원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오로지 실전으로 평가했다.

F등급 임무를 10번 수행하면 E등급을, E등급 임무를 백 번 수행하면 D등급을.

그렇게 차곡차곡 실적을 쌓아서 승급하기에, D등급에 불과한 박기태라 할지라도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 헌터였다.

게다가.

그는 C등급 승급을 눈앞에 두었다.

청산의 소속은 아니지만, 정말 중요할 때마다 구철호가 박기태를 찾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우리는 지름길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이 길을 아는 사람은 인천에서 저밖에 없을 겁니다. 이대로 쭉 이동하면 몬스터를 단 한 마리도 만나지 않고 개미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돌아오는 반응은 심심했다.

순간적으로 속에서 한숨이 나왔다.

보통 이 정도 멘트를 치면,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은 대단하다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검은 머리의 외국인이나 E등급 헌터는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마치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에, 박기태로서는 심기가 거슬렸다.

‘원래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면, 저런 리액션이 나올 수밖에.’

품 안을 살폈다.

텔레포트 스크롤.

아무래도 그걸 사용할 시기가 빠르게 찾아올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상황이 틀어진다 싶으면, 박기태는 망설이지 않고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발길 것이다.

그때부터 대화가 단절되었다.

박기태는 묵묵하게 길을 열었고, 실력이 있는 길잡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오랜 시간을 이동하면서도 몬스터를 맞닥트리지 않았다.

길잡이를 고용하는 이유였다. 특정 사냥터에 해박한 길잡이를 고용할 경우 이동이 편리하며, 무엇보다 사냥터에서 길을 잃을 확률이 낮아진다.

개미굴.

길잡이가 반드시 필요한 사냥터였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강민호는 길잡이를 고용해야 한다고 조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마침내.

“개미굴 초입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 * *

개미굴은 땅속으로 들어가는 사냥터다.

겉으로 보기에는 개미굴임을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흙더미 안에 지하로 통하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박기태가 말했다.

“개미굴은 상당히 위험한 사냥터입니다. 단단하게 만들어져서 개미굴이 무너지는 일은 없지만, 한번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는 도망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일반적인 개미굴과는 다르게 무려 두 마리의 여왕개미가 서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려 한 달이 넘도록 두 마리의 여왕개미가 끊임없이 개미를 생산해 냈다면, 이 안에 얼마나 많은 개미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승산을 높여야 했다.

자신은 퇴로를 열어 두었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그냥 사지로 몰아넣을 생각은 없었다.

길잡이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용병 바닥에서 박기태가 중용 받는 이유였다.

“앞으로의 전략을 알고 싶습니다. 인천 정부에서도 포기한 이 개미굴을, 대체 어떻게 두 명으로 공략하겠다는 겁니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겨우 두 명.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나오지 않았다.

이들이 자살행위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나름대로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우리의 전략은 간단합니다. 선두는 강민호가 나서고, 강민호가 버거울 경우 제가 나설 계획입니다.”

의외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특별히 통역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제법 능숙한 한국어로 계획을 말했다.

문제는 계획의 방향성이었다.

어떻게 기발한 아이디어로 불리한 상황을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밀고 나가겠다는 식의 내용에 박기태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미친놈들이었네.’

확실했다.

개미굴.

B등급의 여왕개미가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 사냥터 자체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 그런 사냥터를 이딴 식으로 공략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불안한 마음에 다시 한번 텔레포트 스크롤을 확인하려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위험하다고 판단된다면 언제든 도망치셔도 좋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예?”

뜨끔했다.

속내를 읽혔다는 생각에, 박기태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박기태의 반응.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그를 고용한 이유는, 이 개미굴까지 길을 잃지 않고 이동할 길잡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민호의 바람처럼 끝까지 안내를 해 주면 좋겠지만, 박기태의 반응대로라면 그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우리도 이번 임무가 당신에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예정대로 선수금은 보내 드릴 것이며, 이후의 일은 전적으로 우리가 감당할 몫입니다.”

박기태가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길잡이로서 생활하며, 이렇게 부끄러운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의리를 지키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기에, 본심이 밝혀진 지금 박기태는 대놓고 속내를 드러냈다.

“알겠습니다. 저는 제 안전이 확보되는 선까지만 임무에 충실하겠습니다. 그러니 명심하십시오. 개미굴은 만만한 사냥터가 아니며,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저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 * *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성인 여러 명이 동시에 이동해도 넉넉할 정도였고, 박기태는 라이트(light) 마법으로 길을 밝혔다.

박기태가 말했다.

“개미굴 내부는 마치 미로와도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 이동했다가는 길을 잃게 되니, 최대한 조용히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탐색 마법.

그의 능력이었다.

헌터로서 처음 얻은 스킬이었고, 박기태는 탐색 마법을 사용해서 천천히 올바른 길을 찾아갔다.

언젠가는 개미들을 맞닥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정말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순간까지는 임무에 충실할 생각이었고, 덕분에 파티는 빠르게 내부로 진입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어둠으로 물든 공간에, 박기태가 손을 들었다.

“준비하세요.”

어둠 너머.

생명체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개미들이었다.

탐색 마법이 아니었다면, 칠흑 같은 어둠에 개미들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캬악!

캬아악!

예상대로였다.

어둠을 뚫고 나타난 개미들의 모습에, 박기태는 순간 창백한 안색을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았다.

일개미 수십 마리에 병정개미 세 마리. 그들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모습에, 박기태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파팟.

강민호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개미들을 정면으로 맞닥트리는 그의 모습에, 박기태는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등급인 주제에 대체 뭘 하려고!’

상대는 병정개미.

D등급이다.

한 마리라면 그래도 해볼 만하겠지만, 일 대 다수를 E등급 헌터인 강민호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헌터 데이터베이스는 현실을 증명하는 명확한 지표다.

수년이 지나도록 E등급을 전전했다는 기록은, 강민호의 실력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을 나타냈다.

그런데.

번뜩.

캬악!

가장 선두.

먼저 달려들던 병정개미의 앞발이 잘려 나갔다.

강민호는 피가 쏟아지는 공간을 그대로 파고들더니, 병정개미의 복부에 검을 쑤셔 박고는 그대로 그어 버렸다.

병정개미가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다.

사방에서 강민호를 죽여 버리겠다고 득달같이 사나운 이빨을 들이밀었으나, 강민호는 차분하게 개미들의 공격을 차례대로 막아 냈다.

카앙!

카카카캉!

안정적인 검술이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E등급에 불과한 힘으로 병정개미의 힘에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박기태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사실 텔레포트 스크롤을 빠르게 준비한 상태였는데, 강민호가 예상과는 다른 무력을 보여 주자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 들었다.

복잡하게 뒤얽히는 광경 속에 강민호는 흔들림이 없었다.

뒤에서 지켜보는 로만 드미트리 또한, 그런 강민호를 도와주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캬악!

병정개미가 달려들었다.

굳어 있는 박기태의 모습에, 병정개미는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대로 물어뜯으려 했다.

찰나의 순간.

번뜩.

콰직!

병정개미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수십 마리에 둘러싸여 싸우고 있던 강민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박기태의 시야에 나타나더니 병정개미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단번에 박살이 나는 머리. D등급 헌터들도 병정개미의 외피는 단단해서 한 번에 처리하지 못하는데, 강민호의 검에는 그런 기준이 통용되지 않았다.

후두둑.

피가 튀었다.

사체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경악스러운 광경 속에, 강민호가 박기태에게 말했다.

“뒤로 물러나 계세요. 지금부터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 * *

일련의 상황.

강민호는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듯이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에, 오히려 먼저 득실거리는 개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번뜩.

푸확.

개미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일개미 정도는 일격에 처리해 내며, 강민호는 맞닥트리는 족족 개미들의 육체를 베어 버렸다.

‘확실해. 난 한 달 전과는 달라졌어.’

한 달 전.

로만 드미트리를 만났다.

그때만 하더라도 병정개미 한 마리를 상대로 목숨을 걸어야 했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섰다.

수라 검법과 수라 심법. 그것은 단순히 상위 스킬을 배우는 영역이 아니었다.

마나를 다루는 힘의 원리를 말해 주는 것이었고, 덕분에 강민호의 스킬은 전체적으로 발전했다.

‘대시.’

파파파팟.

공간을 파고들었다.

더욱 빠르고 파괴적인 움직임에, 개미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상대의 팔과 다리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강격.’

콰앙!

콰르르르르릉.

머리를 내리찍었다.

수라 심법을 운용해 마나를 폭발시켰고, 하급 스킬에 불과한 강격이 상식을 뛰어넘는 파괴력을 보였다.

강민호는 신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지난 한 달간 그는 끊임없이 수라 검법과 수라 심법을 훈련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첫날 이외에는 특별히 무언가를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홀로 진행하는 이미지 트레이닝만으로도 강민호는 스스로가 강해진다는 확신이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눈앞의 상황을 보라.

D등급 헌터도 궁지에 몰릴 상황에서, E등급에 불과한 자신이 압도적인 무력을 보이지 않는가.

콰득.

콰콰콰콰콰콱!

개미들을 몰아붙였다.

한 마리를 베어 버리면 다른 한쪽에서 한 마리가 달려들었고, 그 한 마리를 처리하고 나면 머리 위에서 두 마리가 사나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눈이 팽팽 돌았다. 박기태가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장면이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강민호가 싸우는 장면을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강민호.

그는 재능이 있는 부류는 아니었다.

전생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던 크리스와 케빈처럼.

강민호는 그들의 수준에 오를 만큼의 재능은 아니었으나, 그는 케빈과 다른 형태의 독기가 있었다.

반드시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

늦은 나이에 각성했기에 헌터로서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득바득 사냥에 나서며 혼자서 E등급의 자격을 확보한 사내.

열망이 있었다.

밑바닥에서 경험했던 처절함이 온몸에 녹아들었고, 그것이 힘을 얻자 탄력이 붙듯 분출되었다.

아직은 멀었다.

그래도 제법이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 세상의 기준으로 강민호는 무시 받지 않는 위치에 오를 것이다.

콰득.

개미의 머리를 부서트렸다.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며 그는 무기를 바꾸었고, 검을 왼손 오른손 자유자재로 다루며 개미들을 차례로 처리했다.

이미 전신이 피로 흠뻑 물든 상태였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그는 기어코 마지막 한 마리까지 모두 처리해 버렸다.

“후욱, 후욱.”

끝났다.

얼굴엔 희열이 차올랐다.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강함을 목격하는 순간,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성취감이 들었다.

그때, 박기태가 눈에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몰랐다.

경악으로 얼룩진 박기태의 얼굴.

그건 마치, 로만 드미트리를 처음 만난 날의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