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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97화 (497/615)

497화 비상 회의 (4)

알렉산드르.

김판석.

두 번의 삶을 살았던 그가 어떻게 백의의 마법사로 존재하고 있는 걸까.

그는 분명히 죽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패배하고 마왕에게 버림받았던 그는, 무저갱(無底坑)에 떨어져 소멸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의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육신은 이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혼란에 빠졌다.

스스로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하얗게 물들더니 백색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알렉산드르. 너는 윤회(輪廻)의 저주에 걸렸다.]

“……그게 무슨.”

[알렉산드르로 살아가며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 모든 것은 너의 영혼에 업보로 남았다. 그것은 죽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죄. 앞으로 너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네가 가장 참담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너는 희망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간을 되풀이하겠지. 알렉산드르. 차원을 넘나드는 일은 축복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기에, 너는 죽음조차도 인간다울 수 없다.]

형벌이었다.

차원의 규율을 어기고 세상을 혼란에 빠트린 알렉산드르에게, 신은 그에 합당한 벌을 내렸다.

다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윤회의 저주에 걸린 존재는, 딱 한 번 속죄의 기회를 얻었다.

[네 죄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서 죽고자 한다면. 속죄(贖罪)의 기회를 살려라. 너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것이며, 그 삶이 끝나기 전에 업보를 모두 청산하지 못한다면 윤회의 저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라. 단 한 번의 기회다. 마지막 기회마저도 개인의 욕망을 위해 허비하는 순간, 네 미래는 한 치의 희망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세상이 엄청난 폭발에 휩싸였다.

알렉산드르의 의식이 폭발에 휩쓸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새로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 * *

박민우.

새로운 이름이었다.

9살의 나이에 자동차에 치여 죽어 가던 생명이었고, 알렉산드르는 그의 몸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평범한 삶이었다. 부모는커녕 친척조차 존재하지 않는 고아의 삶이었지만, 김판석과 알렉산드르라는 두 삶을 경험했던 박민우는 금방 새로운 삶에 적응했다.

새로운 삶.

목표는 명확했다.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서, 어느새 20살이 된 박민우는 선행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닥치는 대로 행했다.

지나가는 길에 리어카를 끄는 어르신들이 보이면 같이 밀어 드렸고, 골목길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들을 위해 불의를 참지 않았으며, 매일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겹게 벌어들인 돈은 최소한의 생활비를 남겨 두고 전부 기부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날개 없는 천사라고 불렀다.

본인 배는 굶을지언정 주변에 베푸는 모습에, 그의 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박민우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물었다.

“……염병. 이렇게 해서 언제 업보를 다 청산하냐.”

손에는 펜던트가 하나 있었다.

신의 선물이었는데, 자신의 업보를 색깔로 나타냈다.

아주 짙은 검은색.

아직도 악(惡)의 성질이 강하다는 의미였고, 20살을 먹도록 수많은 선행을 했는데도 펜던트의 색깔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자세히 보면 조금 옅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펜던트가 완전히 하얗게 변해야 윤회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지금과 같은 성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알렉산드르 황제.

세상을 호령하던 자신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그때였다.

골목길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뒤흔들리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들은 들어라.]

절대자.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예고했고, 어제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삶이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캬악!

크르르르릉.

최초의 대재앙이었다.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대한민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나타난 몬스터들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의 육신을 찢어발겼다.

최초의 대재앙은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몬스터들에 대항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현대의 화기로는 몬스터들의 단단한 외피를 뚫지 못했다.

다들 무기를 들었다. 외피를 뚫지 못하면 눈알에 쇠창살을 박아 넣으며, 아득바득 살아남겠다고 발악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각성했다.

몬스터들의 죽음으로 새로운 힘을 얻은 사람들은, 훗날 헌터라고 불릴 능력자가 되어 힘을 발현했다.

그때의 대한민국.

그 어느 나라보다 참담했다.

박민우 또한, 사람들이 죽어 가는 현장에 있었다.

“아악!”

“살려 줘!”

“으, 으아아아악!”

일방적인 학살.

사람들이 일상적인 생활을 보내던 광장이 피와 죽음으로 물들었고, 박민우는 몬스터들이 날뛰는 모습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최근에 그는 신을 원망했다. 자신이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주는 것이 맞지 않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청산되지 않는 업보에, 그는 이렇게 살 바에 삐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윤회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면.

이렇게 아득바득 노력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몬스터들의 모습에, 박민우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거였구나.’

업보의 청산.

대재앙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박민우는 도망치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걸어가더니,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막아섰다.

“너희 모두 내 업보를 청산할 제물이 되어라.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빠지지지직.

마력이 일어났다.

지난 십수 년.

박민우는 마법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이질적인 힘이기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는 전생의 힘을 차곡차곡 쌓아 가고 있었다.

그 힘을 발현할 때였다.

마법 능력을 증폭시켜 주는 화이트 로브를 입은 채로, 득달같이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그날.

사람들은 그를 백의의 마법사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의 희망.

헌터의 시대를 여는 최초의 각성자.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박민우는 펜던트를 확인했다.

구석이 아주 조금 하얀 색깔로 물들었다.

확신이 들었다.

이게 맞았다.

박민우는 결심했다.

업보를 모두 청산하기 위해서, 앞으로 정의를 행하는 백의의 마법사로 살겠노라고.

그것이 박민우가 선택한 새로운 삶이었다.

* * *

그리고 현재.

조달수가 다시 한번 말했다.

“백의의 마법사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힘을 보태 주십시오. 잘 아시지 않습니까. S등급에서도 상위의 실력자인 백의의 마법사님이 나서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트리는 로만 드미트리를 피해 없이 단죄할 방법이 없습니다. 백의의 마법사님이, 백일이 나서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의 말.

평소라면 덥석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느새 3분의 1이 하얀색으로 물든 펜던트를 생각해서라도, 대한민국에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를 허락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이지 않은가.

자신의 최전성기일 때도 상대하지 못한 괴물.

‘이런 미친 새끼가 지금 나보고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라니. 그건 자살행위야.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하는 순간, 업보를 모두 청산하지 못하고 내 목이 단번에 날아가고 말겠지.’

절대.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백의의 마법사, 박민우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 부탁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재식 의원님의 말씀처럼 대재앙을 앞둔 상황에서 우리는 전력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인천 정부와 로만 드미트리 또한 대재앙에 맞서 싸울 귀중한 인재인데, 아직 사실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일을 처벌하겠다고 무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침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의원들이 뭐라고 떠들든, 자신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에 이 자리에 남을 이유도 없었다.

의원들이 당황했다.

백의의 마법사가 한 발 빼다니.

이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박민우가 그렇게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조달수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백의의 마법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복수를 위한 퍼즐.

조달수로서는 백의의 마법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 * *

우뚝.

박민우가 걸음을 멈추었다.

간신히 그를 멈춰 세운 조달수가 말했다.

“아니, 이렇게 떠나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자리로 돌아가시면, 로만 드미트리를 왜 처벌해야 하는지 상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백의의 마법사님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동안 항상 대한민국을 위해 악의 무리를 처단하셨던 분이,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선행의 아이콘.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며, 자신의 계획에 협조할 것을 강조했다.

“일단 저와 같이…….”

“에이, 씨발.”

“?!”

조달수가 눈을 부릅떴다.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박민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상스러운 욕에, 조달수의 머릿속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박민우가 조달수에게 다가갔다.

그를 내려다보더니, 그동안 애써 감추었던 가면을 벗었다.

“야 이 씨발새끼야. 뒈지고 싶어?”

“……예?”

“적당히 나대라고. 내가 말했잖아. 이번 일은 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박민우가 누구인가.

백의의 마법사!

정의의 아이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웅이건만, 그간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살벌한 표정을 보였다.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김판석으로 태어나 알렉산드르로 살았던 박민우의 본모습은, 사실 영웅보다는 악인에 더 어울렸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인류 전체를 팔아먹은 쓰레기.

그런 박민우가 그동안 업보의 청산을 위해서 애써 본모습을 억눌렀건만, 자살행위를 부추기는 조달수의 발언에 폭발하고 말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상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전생의 경험으로 충분했다.

“내가 그동안은 일부러 네 장단에 맞추어 주었는데, 대한민국을 위한 일이랍시고 날 이런 일로 오라 가라 하면 다음부터는 네 머리를 날려 버릴 줄 알아. 내가 못할 것 같지? 겨우 금천구 따위를 맡고 있는 네 녀석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그러니까 적당히 해. 심기 건드리지 말고.”

조달수가 얼어붙었다.

하얗게 질린 표정에 박민우가 피식 웃었다.

“병신 같은 새끼.”

걸음을 돌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

그렇게 걸어가던 박민우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조달수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 보고 들은 일은 모두 비밀이야. 경고하는데, 만약 내 본모습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새어 나간다면 나는 무조건 네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 대가는 상상에 맡길게. 20년간 백의의 마법사라는 가면을 쓴 내가, 그 비밀을 폭로한 너를 가볍게 처벌하진 않겠지.”

경고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박민우는 조달수를 버리고, 그렇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 * *

박민우는 머리가 아팠다.

건물을 나서고 한참이나 고민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히 잡히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하는 것?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생에도 그렇게 강했던 로만 드미트리인데, 지금은 얼마나 강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직 전생의 최고 경지도 회복하지 못한 자신으로서는 일격도 받아 내지 못할 터.

그렇다면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와 편을 먹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에게 정체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생의 알렉산드르.

쓰레기였다.

인류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이고, 자신으로 인해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여럿 죽었다.

자신을 로만 드미트리가 용서할까?

그럴 리가 없었다.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머리가 단번에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로구나.’

머리가 아팠다.

사실.

절대자의 존재가 처음 나타났을 때, 박민우는 자신이 절대자를 처리하기 위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건 20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였으나,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면서부터 얘기가 달라졌다.

그일 것이다.

자신은 조연에 불과하고, 로만 드미트리가 절대자를 처리할 주인공이 분명했다.

“잠깐,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를 어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내가 죽었다고 알고 있어. 지금의 나는 백의의 마법사로서 상당한 평판을 쌓았고, 절대 알렉산드르와 동일 인물이라는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겠지. 그렇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눈에는 내가 어떤 인물로 보일까? 쓸모가 있는 실력자이면서도 아군으로 두기에 평판마저도 훌륭한 존재. 사실, 내가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하면 모두가 탐을 낼 만한 실력자인 건 맞잖아.”

미국과 같은 여러 강대국.

그들은 매년 박민우에게 러브콜을 보내왔다.

자국의 소속이 아니더라도, 자국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을 주겠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그것이 바로.

박민우의 가치였다.

백의의 마법사의 평판이었다.

“내가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 된다면. 그를 따라 절대자를 물리친다면 업보가 해소되지 않을까?”

한때 부러웠었다.

로만 드미트리 곁에 선 사람들.

지금은 자신도 가능하다는 생각에, 박민우는 흥분된 감정이 들었다.

“그래, 알렉산드르가 아닌 백의의 마법사로서 접근하는 거야.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 되기 위해!”

진실을 아는 사람들로서는 비상식적인.

정말 극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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