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비상 회의 (5)
조달수가 자리로 돌아왔다.
멍한 얼굴의 그를 바라보며, 명성호를 비롯한 의원들이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백의의 마법사가 도와주겠답니까?”
그들의 물음.
사실대로 대답하고 싶었다.
백의의 마법사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아는 정의의 사도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백의의 마법사는 조달수에게 경고했다. 만약 본인의 정체가 발각된다면, 자신에게 반드시 대가를 받아 내겠다고.
‘그건 허언이 아니야. 내가 중앙 정부의 소속이라고 한들, 백의의 마법사를 감당하지는 못하겠지.’
대한민국 유일의 S등급.
헌터의 시대를 연 선구자(先驅者).
중앙 정부조차도 백의의 마법사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기에, 양자택일의 선택지에 중앙 정부는 백의의 마법사를 선택할 확률이 높았다.
생각해 보라. 대재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대한민국에 어떤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는데, 백일의 수장이며 S등급 헌터인 백의의 마법사를 처리할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한 일일지라도, 백의의 마법사와 금천구를 양쪽에 둔 저울은 백의의 마법사에게 기울 것이다.
참담했다.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백의의 마법사가 정의를 대변한다고 믿었건만, 그 모든 것이 거짓된 모습에 불과했다니.
‘지난 20년간 본인의 정체를 숨겼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속이 새카만 인물인지를 증명하지. 내가 살아가는 정치판에는 백의의 마법사와 같은 인물들이 많아. 그런 부류들이 넘지 말라고 경고한 선을 넘는 순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의를 마주하게 되겠지. 이건 손해 보는 장사야. 로만 드미트리 하나를 처리하겠다고, 백의의 마법사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어.’
판단이 빨랐다.
조달수는 정치인이다.
헌터도 아닌 일반인이 금천구 의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돌아가는 판세를 읽고 빠르게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백의의 마법사는 건드릴 수 없었다. 그걸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둘만 남은 상황에서 서슴없이 가면을 벗었다.
조달수가 말했다.
“……아무래도 백의의 마법사님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로만 드미트리와 인천 정부의 반란은 명백하나, 대재앙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 또한 대재앙에 맞설 병력임에는 분명합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오히려 인천의 힘을 이용해야 하며, 대재앙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어차피 인천은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한발 물러났다.
아니, 한발 밀려났다.
조달수로서는 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의원들을 불러들인 비상 회의는, 당분간 인천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 * *
그날 저녁.
박민우는 백일의 마법사들을 불러 모았다.
수뇌부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 자리한 상황에, 박민우가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앞으로 우리 백일은 인천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그들과의 협력 관계를 도모할 것이다.”
“……그게 무슨.”
“인천이라니요. 그들은 문제가 많지 않습니까.”
수뇌부들이 반발했다.
최근.
인천 정부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다.
중앙 정부와 대놓고 반대되는 노선을 걸었고, 공공연하게 대재앙에서 인천은 버림받을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다른 세력도 아니고 백일이 인천 정부와 협력 관계를 도모하겠다니.
이 선택으로 중앙 정부와 틀어진다면, 백일로서도 대재앙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 수뇌부가 말했다.
“길드장님. 어째서 인천 정부와 협력 관계를 맺으시려는 겁니까? 그들은 상식적이지 않은 집단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중앙 정부의 울타리를 벗어났고, 로만 드미트리라는 정체도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을 따르겠다고 밝혔습니다. 명백한 반란입니다. 레드문을 학살한 사건도 그렇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백일은 정의를 행하며 대한민국의 수호를 최우선으로 두는 집단인데, 인천과 같은 세력에 협력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백일.
그들은 박민우의 정의감에 이끌렸다.
박민우의 명령이라면 목숨도 바칠 그들이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를 추구하는 명분이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박민우는 본인이 대외적으로 어떤 이미지인지를 알기에, 그 이미지에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 필요했다.
박민우가 말했다.
“이해한다. 너희로서는 내 뜻이 갑작스럽겠지.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인천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오히려 중앙 정부의 독재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천 정부가 대체 뭘 잘못했지?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 레드문 사건은 명백한 정당방위였으나, 중앙 정부는 S등급 헌터인 로만 드미트리를 강제로 영입하는 과정에서 그들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었다. 명심하라. 세간의 평가가 진실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중앙 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인천을 국내에서 완전히 배척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한민국의 국민이 있다. 너희에게 묻겠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옳은가. 중앙 정부가 강자라고 해서, 그들의 의견을 따르고 인천을 배척하는 것이 옳은가. 나는 대세를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앞으로 찾아올 대재앙에서, 나는 약자의 편에 설 것이다.”
궤변이었다.
마치 정의를 위한 것처럼, 박민우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다.
그 말.
백일의 수뇌부들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르의 존재를 알면 달랐겠지만, 그들의 눈에 박민우는 ‘백의의 마법사’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간의 행보.
발언에 신뢰를 더했다.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말에, 방금까지 반발하던 수뇌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길드장님을 따르겠습니다. 백일은, 그리고 저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판이 깔렸다는 생각에, 박민우가 한 인물을 불렀다.
“장윤태.”
“예.”
“지금부터 너는 백일의 대표로서 인천을 찾아가라.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에게, 비밀리에 내 뜻을 전하라.”
수많은 인물 중.
장윤태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백일의 90% 이상이 정의를 부르짖는 무식한 인간들이라면, 장윤태는 정말 실리적으로 박민우의 힘을 보고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었다.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이기적인 인간.
그래서 눈치가 빠르고 실익을 생각해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알기에, 일부러 그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물론.
본인이 나서는 게 가장 좋았다.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지만, 사실 박민우는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건 조금 무섭잖아.’
사람들은 모르는 진실.
장윤태가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제가 길드장님의 뜻을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그는 생각했다.
무려 백의의 마법사가 먼저 손을 내미는 제안.
이건 특별히 어렵지 않은, 정말 손쉬운 임무일 것이라고 말이다.
* * *
“……예?”
장윤태가 얼이 빠진 표정을 보였다.
다음 날 인천을 찾아간 그는, 미리 준비한 대로 백일이 협력 관계를 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거절은 생각지도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인천이, 백일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백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렇다.”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했다.
백일의 이름을 들먹였는데도, 그는 적의나 호의 등 특별한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장윤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아니,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무려 백일입니다. 중앙 정부를 제외하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집단으로 평가받는 백일. 그런 백일이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거절하다니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인천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네 말처럼 상식적이라면 그렇겠지. 문제는 백일의 제안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백일의 제안.
매력적이었다.
인천의 안위를 위해 그들을 받아들이는 게 옳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울타리의 경계가 명확했다.
“인천의 대외적인 평가는 부정적이다. 중앙 정부가 그렇게 보이도록 주도했으니, 그 누구도 인천과 관련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백일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이유가 뭐지?”
“그야 정의를 위해…….”
“그게 문제라는 거다. 정의를 말할 생각이라면, 인천은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중앙 정부가 주장하는 여러 문제. 나는 레드문을 학살했으며, 인천 정부 소속의 직할대장은 승급 심사 도중에 잔인한 손속으로 상대를 죽여 버렸다. 그것들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충분한 명분이 있으나,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살인에 이유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네 제안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백일이, 백의의 마법사가 보여 준 행보대로라면, 우리는 너희가 말하는 정의에 어울리는 집단이 아니다.”
무림.
정파인들 중에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렇기에 알았다.
백일이 진심으로 정의를 추구한다면, 비밀리에 인천과 협력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백일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백일의 생각과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는 외부의 힘이 간절하지 않았다.
장윤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상대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겨우 그런 의도로 지금 백일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겁니까? 하, 참. 혹시 그거 아십니까? 중앙 정부에서 인천을 처벌하기 위해 비상 회의를 열었는데, 길드장님이 인천 또한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표를 던지고 나왔습니다. 인천은, 그리고 당신은. 길드장님 덕분에 무사하다는 의미입니다. 아직 대한민국에서 백의의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나 본데, 그분은 인천에 관련한 부정적인 부분들을 알면서도 끌어안을 만큼 대단한 분입니다. 소수이기에 외면하지 못할 만큼 정의로운 분이란 말입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화가 난 이유?
정의감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따르는 권력이 부정당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후회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다시 연락해도, 두 번의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걸음을 돌렸다.
솔직한 마음으로 자신을 붙잡을 줄 알았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그의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 *
밖으로 나왔다.
짜증이 치밀었다.
백일.
백의의 마법사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거의 종교다.
무조건적으로 박민우의 정의를 찬양하지만, 장윤태는 그런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는 힘을 탐했다.
권력을 탐했다.
그래서 백의의 마법사를 따랐던 것이기에, 힘이 없는 인천의 태도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길드장님의 대리인이야. 그렇기에 무조건 로만 드미트리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 줄 필요가 있어. 백의의 마법사나 되는 사람이 인천에 빌빌 길 이유가 없잖아. 어차피 대재앙이 들이닥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인천은 그때가 돼서야 본인들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연락하겠지.’
눈치껏 판단했다.
무조건 명령을 이행하는 것은 멍청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서 유연하게 행동해야, 백일이라는 집단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았다.
눈치는 장윤태의 무기다.
그렇기에, 본인이 대리인으로 선택받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대체 로만 드미트리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배짱을 부리는 거야? 쯧쯧, 멍청한 지도자 때문에 인천 사람들만 죽게 생겼네.’
길드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문자로 간략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돌아가는 대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겠다고.
그런데.
우우우웅.
휴대폰이 울렸다.
박민우였다.
칭찬을 받을 생각에 신이 난 장윤태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탈칵.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고?]
휴대폰 너머.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는 달랐다.
본능적으로 이상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목소리에 담긴 진실마저 읽을 수는 없었다.
“문자로 말씀드린 것처럼 일단 협상을 결렬시키고…….”
[10분 준다. 바로 튀어 와.]
툭.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순간 당황한 장윤태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응?”
뭔가 이상했다.
싸늘해도 너무 싸늘한 반응.
그의 본능이 문제가 생겼음을 경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