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99화 (499/615)

499화 비상 회의 (6)

장윤태는 백일에 들어오고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영웅이라 불리는 리더.

완벽했다.

장윤태의 욕망을 완벽하게 해소해 주는 곳이었고, 백일에 소속된 이후로 헌터로서 상당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 장윤태에게는 꿈이 있었다.

백일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은 이후에, 백의의 마법사처럼 대한민국에서 모두가 알아주는 영웅 등급의 헌터가 되기를 바랐다.

한 단계씩 차분하게.

그렇게 발전해 왔다.

지금은 수뇌부 회의에 참석할 만큼 신뢰를 얻었고, 어쩌면 자신을 오른팔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지금.

“……끄으, 끄으으.”

장윤태가 앓는 소리를 냈다.

원산폭격 자세였다.

뒷짐을 진 채로 땅에 머리를 박았고, 벌써 십여 분이 흐르면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름대로 B등급 헌터인 그는 이런 취급을 받을 존재가 아니건만, 그의 위로 내리꽂히는 살벌한 목소리에 감히 반발할 수 없었다.

“야, 돌았냐?”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항상 온화하고 진중했던 박민우가, 백의의 마법사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양아치 같은 모습을 보였다.

“내가 뭐라고 말했어? 로만 드미트리와 최대한 우호적으로 협력 관계를 끌어내라고 했지, 누가 그따위로 협상을 결렬시키래? 하아, 미치겠네. 그래도 백일에서 제법 눈치가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넌 내가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머리가 안 돌아가냐? 그래,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겠지. 야 이 새끼야. 자세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잠시 비틀거렸던 장윤태가 황급히 자세를 다잡았다.

그 모습에.

박민우는 분노가 치밀었다.

처음 협상을 결렬시켰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그 순간의 감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직접 찾아갈걸.’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건 힘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했던 그로서는, 그와 마주하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장윤태에게 자신의 본질이 발각되는 것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조달수를 기점으로 어느 정도 드러내는 것은 각오한 상태였고,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일을 처리하려면 오히려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장윤태는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에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

자신이 표정을 싹 바꾸자마자 되묻지도 않고 고분고분하게 머리를 박는 것을 보면, 그는 백의의 마법사가 숨긴 충격적인 진실을 감당할 존재였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장윤태 때문에 망친 상황에, 박민우는 현기증이 일어났다.

“일어나.”

“…….”

“일어나라고, 이 새끼야.”

“예, 예!”

장윤태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고,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그로서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박민우의 진실조차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백의의 마법사나 되는 인물이 로만 드미트리로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알 수 없었다.

박민우가 말했다.

“지금부터 똑바로 들어. 너나 이 세상 사람들이나,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를 몰라. 중앙 정부와의 전쟁? 그 새끼들 다 병신이야. 만약 전쟁이 벌어졌으면 대한민국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었는데, 내가 그 목숨을 한 번 살려 준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 당장 가서 엎지른 물을 다시 수습해. 혓바닥으로 핥든, 무릎을 꿇든. 어떻게든 문제를 수습하라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명심해. 앞으로 이 혼란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 곁에 붙어야 한다는 것을.”

장윤태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문제를 수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 * *

우웅.

우웅, 우웅.

김준혁의 휴대폰이 자꾸만 울렸다.

슬쩍 화면을 바라보자, 익숙한 번호가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왔다.

[백일의 장윤태입니다. 다시 한번 만나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부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장님이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백일의 뜻을 제대로 전했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인천과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번 사건이 중앙 정부의 악의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태준 조사관이나 조달수 의원. 원래 쓰레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백일은 정의를 행하는 집단이니만큼, 그런 쓰레기들에게 인천 정부가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보태 드리고 싶습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한 번만 만나 주신다면, 백일이 이번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증명하겠습니다.]

황당했다.

백일이 어떤 곳인가.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대한민국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다닐 이유가 없는 곳인데, 장윤태는 과할 정도로 비굴하게 반응했다.

김준혁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강하다는 사실은 아나, 그가 박민우처럼 로만 드미트리의 전생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한 세계를 정벌하고 마계마저도 토벌한 존재.

겨우 드미트리와 같은 작은 땅덩어리에서 제국을 건국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장윤태의 간절함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백일과의 연합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건 자신이 결정할 몫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장윤태를 돌려보낸 것은 이유가 있으리라 믿기에, 연락받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

“……이렇게 연락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네 생각은 어떻지. 백일의 반응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나.”

로만 드미트리의 물음.

잠시 생각에 빠졌다.

충분히 생각한 끝에, 김준혁이 대답했다.

“저로서도 백일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백의의 마법사가 정의를 대변하는 인물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저희와 연합해야만 하는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 그래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강하다.”

“그럼 백일은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알겠다.”

세상 사람들이 알면 경악할 대화였다.

백일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도 탐내는 집단인데, 둘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백일을 배척했다.

밖으로 나온 김준혁.

그는 휴대폰을 꺼내 장윤태의 연락처를 스팸으로 등록했다.

[제발 한 번만…….]

그의 애처로운 마지막 문자는,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 * *

장윤태가 대역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인천 정부를 아무리 찾아가도 문전박대를 당할 뿐이고, 절 차단한 모양인지 아예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문제를 수습해 보려고 했으나 저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백일에서 내쫓지만 말아 주십시오.”

간절한 목소리였다.

며칠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던 장윤태는,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박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알아보고 원대한 계획을 꿈꾸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이것 또한 신의 형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산드르로 살아갈 때도, 김판석으로 살아갈 때도. 나는 천마의 사람이 되고 싶었지. 그 넓은 등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항상 내 현실은 가혹하구나.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그와 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번 생에 업보를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서는, 박민우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천마코인(?)에 반드시 탑승해야 한다.’

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세상의 강자들?

장담컨대, 로만 드미트리가 제대로 움직이는 순간 그들은 머리가 날아가며 서열이 정리될 것이다.

천마의 곁에 서는 것.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자신이 이 세상의 희망이라고 생각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면 얘기가 달랐다.

박민우가 말했다.

“너에게 임무를 주겠다.”

“말씀만 하십시오. 목숨을 걸고 이행하겠습니다.”

“지랄 염병 떨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 지금부터 차명(借名)으로 인천 정부를 지원해. 중앙 정부와 대립 관계를 형성한 그들에겐 생활할 자원이 부족할 테니까, 적당히 거래를 제안하는 손길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단순무식한 방법이었다.

정성을 보이는 것.

천천히 공을 들일 것이다.

백일이 인천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안다면, 언젠가 로만 드미트리도 마음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백일의 마법사들에게 전해.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 아니 인천 정부와 관련한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트러블이 생기는 새끼들은 머리를 날려 버리겠다고. 그렇다고 내가 말한 그대로 전달하지 말고 적당히 각색하라고. 오케이? 만약 내가 명령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거나, 내가 이딴 쓰레기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너는 그날부로 뒈지는 줄 알아.”

박민우는 생각했다.

이번 삶.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의 곁에 서겠다고.

“대답.”

“알겠습니다!”

장윤태도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X 된 것 같다고.

* * *

백일과 장윤태.

그것은 해프닝에 불과했다.

금방 잊힐 사건이었고, 박민우가 난리를 피우는 동안 로만 드미트리는 훈련장에 있었다.

훅.

훅훅.

검을 휘둘렀다.

이미 수도 없이 반복했던 동작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기본적인 개인기를 단련하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왕을 쓰러트린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적인 존재를 쓰러트리고도, 자신이 곧 차원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루의 상당 부분을 훈련에 매진했다.

그것은.

천마의 본질이었다.

아무리 평화로운 순간에도, 강함에 대한 끝없는 욕망은 항상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마왕을 죽이고 목적 자체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내가 도달한 경지가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 일말의 의심은 발전을 더디게 만들지.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절대자.

새로운 적.

강할 것이다.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으나, 미지의 강함은 피를 끓게 했다.

한순간도 숨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다시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에, 로만 드미트리는 해가 저물고 해가 떠오르는 광경에도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앞으로 어떤 위험이 들이닥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전생보다도 더 압도적인 강함으로, 눈앞의 문제들을 모두 찍어 누를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전생의 삶을 되찾을 것이다.

신이든 무엇이든 간에, 또다시 자신의 삶을 강탈하려 한다면 그 존재의 머리를 날려 버릴 것이다.

훅.

훅훅.

무아지경(無我之境)

스스로에 빠져들었다.

한 자루의 검으로서 존재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아주 일부만 경험하고도 경악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 이상을 갈고닦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당장 대재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와는 다르게, 팽팽한 긴장감 속에 3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 * *

지난 3개월.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대한민국의 비상 통신망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미국의 경고 이후로 야간 업무를 밥 먹듯이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지루한 대기 시간.

한 직원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대재앙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어차피 찾아올 대재앙이라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야 이 사람아. 어디서 그런 재수 없는 소리야. 그러다 대재앙으로 세상이 멸망하면 어쩌려고 그래?”

“답답해서 그렇죠. 아무리 발악해도 대재앙이 찾아오는 건 기정사실인데, 분명히 사이클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까 저희만 이렇게 고생하잖아요. 대재앙은 인류가 감당해야만 하는 시련이에요. 그 시기가 늦어질수록, 우리의 피만 말라가겠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대재앙.

처음에는 2~3년 주기로 발생하던 것이, 점점 주기가 길어지더니 지금은 5번째 대재앙 이후로 6년이 지났는데도 발발하지 않았다.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세상이 뒤집힐지 모르기에, 사이클이 충족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흔한 외출조차 조심했다.

만약 밖에 나갔다가.

대재앙이 시작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런 긴장감 속에 살아가는 상황에, 비상 연락망의 직원들은 피로감을 호소했다.

그때였다.

삐빅.

“어? 미국 LA에서 전조 현상이 발생했다는데요?”

특별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최근 들어 전조 현상이 잦았고, 그렇기에 전 세계의 국가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미국의 상황을 상부에 보고하려는데, 갑작스럽게 전면에 위치한 거대한 화면에 빨간 점들이 떠올랐다.

“뉴욕에서도 전조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시카고에서도 전조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도 전조 현상이 발생했답니다!”

빗발치는 신호.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재수 없는 말을 내뱉었던 직원조차도, 이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런 미친.”

소름이 돋았다.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전조 현상.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6번째 대재앙.

지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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