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6번째 대재앙 (2)
김준혁의 방송.
그것을 들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세력이 있었다.
바로 청산이었다.
청산의 길드 마스터 구철호는, 수뇌부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다소 절망적인 표정을 보였다.
“기어코 걱정했던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선택의 갈림길에 섰고, 지금 도망치지 않는다면 난파선일지도 모르는 인천과 명운을 같이해야겠지.”
지난 3개월.
청산은 인천에 잔류했다.
정말 당혹스러울 정도로 청산을 제외한 모든 길드는 인천을 떠나 버렸고, 덕분에 인천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잠깐 단꿈을 꾸었다.
만약 인천이 이대로 살아남는다면, 인천과 같은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도시에서 청산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전제가 있었다.
적어도 인천 홀로 ‘대재앙’을 떠안는 형태만큼은 피해야 했다.
“인천 근방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다. 그 말인즉, 득달같이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인천이 모두 떠안아야 한다는 의미다. 중앙 정부도, 다른 지방 정부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인천을 도와주려고 하지는 않겠지. 그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 몬스터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본인들의 거처를 버리고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니까. 그래서 모두가 서울행을 바라는 것이고, 그렇기에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인천에서의 기반을 모두 포기한다면, 적어도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청산을 받아 달라 말한다면, 저희는 대재앙 때만 잠깐 이용당하고 버려질 것이 분명합니다.”
딜레마였다.
인천을 떠나면 당장에 안위는 보장할 수 있으나, 그 이후의 미래마저 보장받는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래서.
3개월 전의 선택이 중요했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청산의 선택은 값질 수밖에 없었다.
구철호는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인천은 변화했어. 분명히 과거와는 달라졌지만, 국가 단위로도 막을 수 없는 대재앙 앞에서는 의미 없는 변화에 불과하지. 만약 살아남는다 한들, 청산이 그 생존자에 포함될지는 장담할 수 없어.’
그때였다.
상황을 되풀이하듯, 박기태가 나섰다.
“마스터. 어차피 외통수예요. 인천을 떠나면 우리는 배신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어디를 가든 완전한 신뢰는 받지 못하겠죠. 그러니까 한번 믿어 보자고요. 3개월 전 그날처럼, 인천 시장 김준혁의 현명함을.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지켜보았던 로만 드미트리라는 미스터리한 존재의 자신감을.”
똑같았다.
박기태의 말에 심장이 요동쳤다.
외통수였다.
3개월 전이였다면 모르되, 상황이 심각하다고 해서 도망치면 목숨 외에는 얻어 갈 것이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구철호가 말했다.
“그래, 씨발.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 당장 청산의 길드원들에게 명하라. 우리는 제1 방어선으로 간다.”
“예.”
청산.
그들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 * *
성벽 위.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며, 로만 드미트리는 황폐화된 성벽 너머의 영역을 바라보았다.
“로만 드미트리 님. 중앙 정부의 동태를 확인한 결과, 그들은 예상대로 서울에서의 결사 항전을 결심한 것 같습니다. 수성을 견고하게 할 뿐 특별한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인천 근방의 다른 지방 정부들은 지원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알아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자는 것이 대한민국 전체의 뜻입니다.”
이태성이었다.
인천이 홀로 남았다는 참담한 결말에, 로만 드미트리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그들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나.”
“……너무하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들의 선택은, 사실상 인천의 멸망을 방관하는 것이니까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다. 만약 인천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나였다고 한들 인천의 안위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들을 도와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로서는 확실해진 사실이 있다. 인천에 남은 사람들. 그들은 나의 울타리에 들어왔으며, 나는 지금부터 그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것이다.”
고개를 돌렸다.
이태성이 보였고, 그 뒤로 직할대와 정부의 군인들, 마지막으로 뒤늦게 도착한 청산의 사람들이 보였다.
새로운 인연.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너희는 나의 사람이다. 대한민국 전체가 불바다가 될지라도, 이곳 인천만큼은 안전할 것이다.”
사실.
인천의 전력은 미약했다.
지난 3개월간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고는 하나, 인천의 병력만으로 대재앙을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선택은 값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도 로만 드미트리의 곁에 남았다는 것은, 그들은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만을 믿고 결단을 내렸다는 의미였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인천 사람들을 볼 때면, 전생의 인연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지금부터 플랜 A를 가동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태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플랜 A.
대재앙을 대비해서 만들어 낸 수많은 전략 중에, 플랜 A는 로만 드미트리가 대부분의 위험을 감당하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계획 단계에서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정말 다행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로만 드미트리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성벽 너머로 몬스터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시선을 다시 돌리며, 성벽 너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인천에 들이닥친 태풍이 모두 지나가고 나면, 더는 내게 괜찮냐고 묻진 않겠지.”
그 말을 끝으로.
훅.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눈을 부릅뜨는 사람들.
전략의 실체를 알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정말로 실행에 옮기는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인천의 안위는 이제 로만 드미트리에게 달렸다.
* * *
탁-
지상에 착지했다.
고개를 들자, 먼지구름이 일며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대재앙이라.’
익숙했다.
드미트리 제국을 건국할 때도, 마계를 정벌할 때도.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렇기에 그간의 경험상, 대재앙을 막아 내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방법은 단순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
자신이 대재앙을 정면으로 떠안는다면, 나머지는 인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오라를 끌어올렸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고, 땅이 뒤흔들리며 몬스터들이 지척에 도달하자 그때부터는 속도를 높였다.
파앗.
파파파파팟.
땅을 박찼다.
폭발적인 오라가 로만 드미트리의 몸을 휘감더니, 몬스터들과 맞닥트리기도 전에 오라를 검 끝에 담았다.
‘천마검법 전반부 일초식.’
번뜩.
검을 뻗었다.
단 한 번의 일격.
오라가 전방을 휩쓸더니, 맞닥트리는 족족 몬스터들을 찢어발겼다.
콰콰콰콰콱!
캬악!
캬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A등급부터 F등급까지 다양한 등급의 몬스터들이, 단 일격에 등급을 가릴 것 없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던졌다.
사방이 순식간에 까맣게 물들었고, 인간을 향한 강한 적의를 보이며 A등급 몬스터 웨어 울프(Werewolf)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말했다.
웨어 울프의 이빨은 무엇이든 찢어발기며, 그들의 외피는 그 어떤 공격도 쉽게 통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번뜩.
웨어 울프의 머리가 단숨에 날아갔다.
그들은 무리를 형성했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검에 차례로 찢겨 나갔다.
‘천마검법 전반부 일초식.’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할 때마다 사방에 피가 흩뿌려졌다.
일 대 다수의 싸움.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었다.
몬스터 웨이브는 끝이 없는 공격을 의미하며, 레드 타임이라는 단어가 있듯 최소 3일간은 계속해서 몬스터가 생성될 것이다.
그렇다면 체력 관리는 반드시 필요했다. 아무리 대단한 헌터라고 한들 며칠 내내 싸울 수는 없기에, 사람들은 최대한 강대국에 소속되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했다. S등급 헌터일지라도 소속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힘을 조절하지 않았다.
폭발하는 오라를 그대로 분출하며, 일격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을 쓸어 버렸다.
하루든.
이틀이든.
일주일이든.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간에, 자신의 힘은 고갈되지 않을 것이다.
천외의 경지.
높디높은 위치에 올라선 로만 드미트리는, 마왕을 쓰러트렸던 그 순간보다도 강력한 힘을 갖추었다.
콰직.
퍽.
몬스터의 머리를 짓밟았다.
산산이 조각나는 머리를 뒤로하고, 로만 드미트리는 어둠으로 물든 공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조리 도륙한다.’
확신했다.
자신이 버티고 있는 한.
이 뒤로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 * *
구철호는 플랜 A를 알지 못했다.
인천에서 청산은 언제 도망칠지 모르는 전력이기에, 그들에게 굳이 전략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고로.
구철호는 경악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에, 황급히 이태성에게 물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너무 무모합니다. S등급 헌터라면 잠깐은 버틸 수 있어도, 장기전으로 가는 순간 위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장기전이고 단기전이고 간에 저건 머릿수가 너무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상식적인 발언이었다.
이태성도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태도로 로만 드미트리를 말렸을 것이다.
“지켜보십시오. 저희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믿습니다.”
“이런 미친.”
구철호만 똥줄이 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도망치기에는 늦은 상황.
손톱을 물어뜯으며 상황을 지켜보던 구철호는, 이윽고 벌어진 상황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콰콰콰콰콱!
캬악!
캬아아악!
학살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몬스터들이 맞닥트리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는 적들 사이를 종횡무진(縱橫無盡),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였다.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구철호는 나름대로 S등급의 수준을 생각했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은 상식의 선을 뛰어넘었다.
압도적이었다.
상대를 찍어 눌렀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말든, 단 한 번의 공격이면 머리가 날아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 댔다.
“……아아.”
넋을 잃었다.
말을 잃었다.
구철호뿐만 아니라, 청산의 길드원 모두가 멍한 얼굴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알았다.
인천의 자신감이 무엇인지.
중앙 정부와 등을 지고도 그들이 도시를 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를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대한민국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변수였다.
구철호와 박기태 같은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활약으로 인천이 대재앙을 버텨 낸다면 어떤 미래가 찾아올지를 알았다.
이 상황.
감탄한 것은 청산만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힘을 알고 있는 이태성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외심이 들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지난 3개월.
로만 드미트리는 확신을 주었다.
대재앙 정도 되는 위협조차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은, 그만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
감히 밑바닥을 예상할 수 없는 존재였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아직도 이태성에게 그는 미스터리한 존재였다.
하지만.
아직 방심하기에는 일렀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전에 경고한 것이 있었다.
“대재앙은 밀려드는 파도와도 같다. 방파제로 파도를 막아 낸다고 한들, 사방에서 파도가 밀려든다면 한 면의 방파제로는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없겠지. 그러니 명심하라. 내가 가장 큰 위험을 떠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피해 인천으로 들이닥치는 파도는 너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성벽 위.
인천의 병력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였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만일의 변수를 생각해 자리를 지켰다.
참 대단한 분이었다.
홀로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직할대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군인.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만일의 변수를 대비했고, 변수가 발생할 확률이 아무리 미약하다고 한들 현실이 되는 순간 확률적인 수치는 무의미했다.
병사가 소리쳤다.
“도시 내부에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만일의 변수.
지금부터는 인천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