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6번째 대재앙 (4)
대재앙 발발 직후.
백일은 소집 명령을 받았다.
원칙대로라면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하나, 박민우는 소집을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백일은 대한민국 최고의 무력 단체이기에, 대통령 김정태가 곧바로 연락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소집 명령을 거절하겠다니요. 서울에 자리 잡은 모든 무력 단체는 비상 상황에 중앙 정부의 통제를 따라야 하거늘, 정의를 수호하는 백일이 어째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려는 겁니까. 이건 백일답지 않은 선택입니다.]
“아니, 백일다운 선택이 맞습니다.”
화면 너머.
김정태의 얼굴이 보였다.
백일의 수뇌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민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앙 정부는 정의(正義)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그동안은 김정태 대통령님이 대한민국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한다고 생각했지만, 인천 사태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인천의 시민들 또한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 개월간 중앙 정부의 행태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인천이 중앙 정부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대놓고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다른 지방 정부들을 부추겨서 인천을 배척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놓고 정의라니요. 이미 중앙 정부는 정의를 잃었습니다.”
[백의의 마법사님. 현명하게 생각하십시오. 방금 발언은 선을 넘었습니다.]
“예, 앞으로는 그 선을 지키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도 이러한 결단을 내릴 때까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중앙 정부를 따라 대한민국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맞느냐, 아니면 중앙 정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게 맞느냐. 저는 백일이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후자가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진정한 정의를 위해 저희는 중앙 정부가 말하는 ‘서울’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날 생각입니다.”
열변을 토해 냈다.
정의감?
그딴 것이 아니다.
백일은 정의를 대변하는 백의의 마법사를 따르는 단체.
박민우가 앞으로 계속 백일의 지지를 받으려면, 그들에게 그만한 명분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목소리를 높였다.
강력하게 주장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겠다는 변절이 정의로운 선택임을.
진실은 궤변에 불가하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박민우는 그럴듯하게 꾸며 내는 방법을 알았다.
[그 말. 대재앙이 끝나고 감당해야 할 겁니다.]
“예, 마음대로 하십시오. 정의를 위해서라면 저는 무엇이든 할 생각입니다.”
툭.
일방적으로 끊은 연락.
박민우가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정의를 행하는 이 순간, 백일의 마법사들에게 박민우의 존재는 그야말로 정의의 신처럼 보였다.
그들은 생각했다.
백일이어서, 백일의 마법사여서 진심으로 자부심을 느낀다고.
* * *
백일의 행보가 결정되었다.
인천을 도와주기로 한 상황에, 한 마법사가 물었다.
“지금 당장 인천으로 향하실 겁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
고개를 저었다.
현재 인천 주변에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다.
만약 인천을 도와줄 생각이라면, 한시라도 빠르게 인천을 도와주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박민우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인천을 도와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사람들은 몬스터 웨이브에 인천이 무너진다고 확신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버티고 있는 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백일의 등장은 반드시 극적이어야만 해.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인천을 도와준 백일의 선택에 감사함을 느끼도록, 만약 나의 정체를 알게 될지라도 내 공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그런 상황이 필요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진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마법사의 모습에, 박민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인천을 도와주겠다는 가능성을 열었을 뿐, 곧바로 그들을 위해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 김정태의 선택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레드 타임 때는 언제 어디에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기에, 당장 1시간 뒤에는 서울이 인천보다도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인천을 도와주는 사이에 서울이 쑥대밭이 되어 버리겠지.”
청산유수(靑山流水)였다.
혓바닥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 내뱉는 말에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관망할 것이다. 인천과 서울, 혹은 그 외의 지역.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을 도와줄 것이다. 물론 무조건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사람을 보내 인천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니, 만약 인천이 정말 위험하다고 판단된다면 텔레포트(teleport) 마법을 사용해 그곳으로 갈 생각이다.”
“역시.”
“다 생각이 있으시군요.”
백일의 마법사들이 감탄했다.
눈앞에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판단에, 그들은 박민우의 현명함을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인천이 위험하다고 해서 무조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백의의 마법사님처럼 전체를 보고 그에 걸맞게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백일의 정의를 행하기 위해, 저희는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백일이 하나가 되었다.
뿌듯했다.
지난 20년.
박민우는 백일을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전생에 알렉산드르는 악을 대변했다면, 현생의 백일은 정의를 대변하는 단체.
자신의 힘이었다.
이것을 잘만 이용한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곁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를 기다리자. 완벽한 때를!’
참았다.
몬스터들이 인천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럴듯한 궤변을 펼쳐 놓으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백일의 마법사들을 강제로 앉혀 놓았다.
다행히도 결단을 내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몬스터 웨이브만 하더라도 엄청난 재앙인데, 인천에 블러드 레인까지 발생했다.
인천의 동태를 살피던 마법사가 말했다.
“방금 정보가 들어왔는데, 인천 도심에 블러드 레인이 발생했답니다. 이렇게 되면 민간인의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블러드 레인은 방어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박민우가 강력한 의지를 분출했다.
“때가 되었다! 더 지체했다간 인천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 우리는 중앙 정부가 핍박할지라도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 우리는 지금부터 인천으로 간다!”
“정의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열광하는 사람들.
그렇게.
“텔레포트.”
백일의 마법사들은 공간 이동 마법에 몸을 실었다.
* * *
그리고 지금.
뭔가 이상했다.
상상했던 장면과는 달랐다.
‘인천 정부의 전력은 나약해.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 전장은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을 테고, 블러드 레인에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겠지.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번뜩.
퍽.
강민호가 몬스터의 머리를 베었다.
이제 몇 마리 없었다.
성벽 위에 널브러진 사체와 성벽 밑에 수북이 쌓인 사체.
제2 방어선의 병력만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에, 박민우로서는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아닌데.’
언뜻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강민호는 실력자였다.
그리고 강민호를 따라서 몬스터를 상대한 직할대원들조차도,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계획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인천이 위기를 경험해야만 백일의 도움은 빛을 발할 텐데,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백일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김준혁이 다가와 물었다.
“인천을 도와주기 위해 오신 겁니까?”
“……맞습니다. 몬스터 웨이브와 블러드 레인이 발생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말하고도 멋쩍었다.
그런데.
김준혁의 생각은 달랐다.
“감사합니다.”
“예?”
“사실 그동안 백일의 의도를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중앙 정부를 등지면서까지 인천을 도우려 한다면, 백일이 인천에 무엇을 바라든 간에 그 마음을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인천을 위해 힘을 보태 주십시오. 인천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백일의 의도는 선의(善意)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백일의 도움은 필요했다.
아직 대재앙 첫날에 불과했기에, 절망을 경험했던 김준혁은 전투에 한 번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않았다.
고로.
“모든 위협이 지나갔을 때, 반드시 백일의 공을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전하겠습니다.”
상황을 파악했다.
백일이 인천에 목적이 있다면.
적당한 당근으로 백일을 부릴 수 있는, 김준혁은 박민우가 혹할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졌다.
* * *
백일의 공.
로만 드미트리.
김준혁은 두 말을 언급했다.
영악한 인간이었다.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해서 상대를 치켜세우는 발언에, 박민우는 김준혁의 의도를 파악했다.
‘인천을 위해 백일을 이용하려는 거겠지.’
사실을 알고도.
박민우는 당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의도처럼 자신은 인천에 명확한 목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성벽 주변의 상황을 확인하면서, 박민우는 하나의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파악한 인천의 전력은 이 정도가 아니었어. 이들이 단시간에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지. 그들의 곁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다는 것. 겨우 변방 영지에 불과했던 드미트리가 대륙 제일의 강대국으로 거듭난 것처럼, 지금 인천 사람들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
소름이 돋았다.
강민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겨우 E등급 헌터였다.
D등급 승급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그가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 B등급 승급에 성공했고, 지금은 이미 충분히 대단한 성과라고 말했던 그때보다도 강해진 모습을 보였다.
이걸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멍청한 것이다.
전생에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 수도 없이 패배했던 박민우였기에, 인천의 발전이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인천.
이곳에 드미트리의 씨앗을 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아(發芽)가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인천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도 백일의 가치가 로만 드미트리에게 어필이 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아닐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백일이 아무것도 아닐 만큼 인천을 급격하게 성장시킬 것이고, 지금처럼 애매하게 발을 걸치려다간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다. 드미트리와 함께 성공한 사람들은 아직 터지기 전에 그를 따랐다.
한마디로 상장하기 전 비상장 주식, 떡상하지 않은 코인에 투자한 사람들처럼, 대박이 터져서 드미트리의 주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들이 부러웠다.
자신도 드미트리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진실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박 주식이고, 엄청나게 터질 코인이다.
그걸 알고도 지금과 같은 애매한 관계로 시간을 보냈다가, 천마 코인에 탑승할 시기를 놓칠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돼. 절대 안 된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
어쭙잖은 계략이 아니라, 확고한 신뢰만이 그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몬스터다!”
“전투를 준비하라!”
진법 너머.
다시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한 번에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쏟아지는 상황에, 박민우는 사람들을 지나쳐 가장 앞으로 나섰다.
“인천 시장님. 그 약속 지키십시오. 제가 전장에서 한 활약을, 백일의 공을 반드시 전해 주십시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마력을 끌어올렸다.
전생의 경지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각성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한 덕분에, 이 세상의 기준을 충분히 압도하는 힘을 갖추었다.
“파이어 스톰(Fire Storm).”
화륵.
화르르르륵.
콰콰콰콰콰콰콱!
화염이 몰아쳤다.
엄청난 마력의 폭풍이 일어나더니, 수백의 몬스터들을 그대로 휩쓸어 버렸다.
사람들이 감탄했다.
박민우.
그를 왜 백의의 마법사라 부르는지.
어째서 최초의 선구자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A등급의 몬스터조차 숯덩이로 만드는 마법은, 그에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S등급이 허락된 이유였다.
마력이 넘실거렸다.
박민우가 소리쳤다.
“백일의 마법사들이여! 인천의 수호를 위해,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어라!”
‘그래야 내가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이번 삶.
박민우는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김판석으로서 우러러보았던 모습을.
알렉산드르로서도 추억했던 모습을.
박민우는 강렬하게 열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