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6번째 대재앙 (6)
서울 도봉구.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던 그곳에, 일단의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두 위치로!”
“몬스터들이 몰려들고 있다. 빨리 위치로 이동해!”
조금 전.
급보가 들어왔다.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더니, 지하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이 도봉구로 일제히 밀려들었다.
도봉구는 서울의 주요 방어 거점 중 하나.
곧바로 비상령이 선포되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기하고 있던 예비 병력마저 빠르게 전장에 투입되었다.
착착착.
장관이었다.
20년간의 세월을 증명하듯, 성벽 위에 병력이 빼곡하게 배치되었다.
그들은 전원 각성자였다.
중앙 정부는 대한민국의 헌터들을 모두 서울에 집중시켰고, 그 덕분에 중요 방어 거점마다 천여 명의 헌터들로 구성된 방어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을 비난하는 이유였다.
하나의 방어 거점에도 이만한 방어 병력이 있는데, 지방 정부 대부분은 그 하나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B등급 이상의 실력자들은 90% 이상이 중앙 정부에 소속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은 ‘서울’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성벽 위.
도봉구 의원 이호철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대재앙 이전에 군 간부였던 그는,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도봉구 의원의 자리를 차지했다.
과거와는 다르게 의원은 해당 지역의 사령관 역할을 맡기에, 일시적으로 그는 중앙 정부의 지원 병력을 통제하는 권한을 확보했다.
“……하필이면 백일이 이탈한 지금 S등급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백일의 부재.
치명적이었다.
보통 S등급 몬스터는 항상 백의의 마법사가 상대해 왔는데, 지금은 그런 기대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등급의 구분은 강함을 나누는 단계일 뿐, 해당 등급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쓰러트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인해전술(人海戰術)로라도 쓰러트리면 그만이다.
B등급, A등급과 같은 실력자들의 목숨을 불태워, S등급의 몬스터를 처리한다면 그것 또한 대한민국의 승리였다.
의지를 다졌다.
도봉구를 지키리라.
긴장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는 그때, 먼발치에서 적들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쿠구구구구.
땅이 뒤흔들렸다.
전조 현상으로 지하에 숨어 있던 몬스터 대군.
그들이 밀려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 위로 거대한 생명체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악!”
“내 귀!”
군인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어(fear)였다.
강력한 몬스터의 울부짖음은 소리만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등급이 낮은 헌터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귀에서 피가 흘러내릴 정도였다.
B등급 헌터이기도 한 이호철은 예상하고 귀를 보호했지만, 거대한 생명체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피어 따위는 겨우 시작일 뿐임을 알았다.
‘레드 드래곤(Red Dragon)!’
S등급의 괴물.
3번째 대재앙 때 프랑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존재.
바로 레드 드래곤이었다.
타오를 듯한 붉은 외피를 자랑하는 괴물이, 인간들이 몰려 있는 모습에 거대한 아가리를 쫙 벌렸다.
[파이어 브레스(fire breath)!]
콰콰콰콰콱!
강렬한 열기를 뿜어 댔다.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불길에, 이호철이 황급히 소리쳤다.
“마법사들은 방어 마법을 사용하라!”
“방어 마법을 사용하라!”
“실드(shield).”
팟.
파파파파팟.
사방에서 실드 마법이 사용되었다.
중앙 정부의 마법사들.
그들의 차례였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실드를 사용했고, 성벽을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한 방패막에 그대로 불길이 작렬했다.
콰앙!
화륵, 화르르르르륵!
엄청난 열기였다.
실드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피부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는 파괴적인 열기를 뿜어 댔다.
이호철은 때를 기다렸다. 그간 파악한 정보대로라면 브레스에는 쿨타임이 존재했다.
일단 한번 위기를 넘긴 뒤에, 숨을 돌리는 레드 드래곤을 공격해서 단번에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콰직!
콰콰콰콰콰콰콱!
“크악!”
“으아아아아악!”
실드가 부서졌다.
파이어 브레스를 버텨 내지 못해 산산조각이 났고, 부서진 방패막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군인들을 휩쓸어 버렸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었다.
아직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했는데, 성벽 위의 방어 체계가 불길에 휩싸여 죽음과 비명으로 얼룩졌다.
일련의 상황.
이호철은 이를 악물었다.
‘백의의 마법사. 그의 부재는 생각보다 더 치명적이다.’
레드 드래곤의 공격.
대한민국이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생각한 것보다 더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았다.
* * *
S등급 몬스터의 출현.
인천도 다르지 않았다.
서울이 레드 드래곤을 상대하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 또한 거대한 생명체를 마주했다.
[혼자서 이 많은 몬스터를 상대하다니. 나약한 인간 주제에 제법이구나.]
펄럭.
하늘 위.
거대한 생명체가 나타났다.
건물만 한 날개를 펄럭이는 존재는, 레드 드래곤과 같은 종족인 그린 드래곤(Green Dragon)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검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뚝, 뚝.
벌써 3시간.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죽였는지는 세 보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끊임없이 이어진 전투에 피로 흠뻑 물들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지금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적과 아군의 구분이었다.
상대가 일반 몬스터든, S등급이라고 불리는 괴물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상대를 향해 다가갔다.
서슴없는 적의를 마주한 그린 드래곤은, 분노한 듯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건방진 인간 녀석. 단숨에 쓸어 버려 주마. 포이즌 브레스(poison breath)!]
콰콰콰콰콱!
엄청난 독기였다.
레드 드래곤의 파이어 브레스가 사람들의 몸을 불태웠듯이, 그린 드래곤의 포이즌 브레스는 피부에 조금이라도 닿는 순간 맹독에 중독되게 만들었다.
피부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콱 막히는 기도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맹독.
사람들이 말하길, 단순한 파괴력은 레드 드래곤이 강력하나 그린 그래곤은 ‘드래곤’ 종류의 몬스터 중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알려졌다.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대로 맹독에 휩쓸렸다.
그린 드래곤은 당연히 연약한 인간이 죽었다고 생각했건만, 그로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확.
맹독을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그린 드래곤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
그 어떠한 독도 통하지 않는 강인한 육체는, 그린 드래곤으로서는 피해야 하는 천적이었다.
이미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려는 순간.
‘천마검범 중반부 일초식.’
번뜩.
푸확!
그린 드래곤의 머리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 * *
제2 방어선.
그곳에서도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
진법으로 많은 몬스터를 걸러 냈으나, 대재앙은 그렇게 쉽게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위험한 상황이라는 의미도 아니었다.
“라이트닝 레인(Lightning Rain)!”
번뜩.
콰콰콰콰쾅!
백의의 마법사.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본인이 어째서 S등급 헌터인지를 증명하듯, 몬스터들을 미친 듯이 쓸어 버리는 마법에 제2 방어선은 위기를 경험하지 않았다.
백일의 마법사들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들도 박민우를 따라서 공격 마법을 퍼부었고, 쉘터를 지켜야 하는 김준혁으로서는 마법사의 존재가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한결 수월했다.
인천의 힘으로도 버틸 수는 있었겠지만, 박민우의 존재는 대재앙의 난이도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지금처럼만 버틴다면 인천은 무너지지 않아.’
방심하진 않았다.
전장을 예리하게 살폈다.
문제가 생기는 부분을 포착해, 김준혁이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방심하지 마라. 한 마리라도 성벽을 넘어오는 순간 제2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교대로 성벽을 맡아라. 대재앙은 장기전이니, 충분히 체력을 조절하며 적을 막아라!”
지휘관이 필요한 이유였다.
그는 전체를 파악해 적절한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넘도록 전투를 반복하고 있을 그때, 통신기에서 긴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장님! 인천 근방에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빌어먹을.”
S등급.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몬스터 웨이브 전체를 감당하는 상황에, S등급 몬스터마저 들이닥친다면 버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방금까지는 제2 방어서만 지키면 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으나, 패배의 가능성이 제기되자 그때부터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일부 병력을 제1 방어선에 보내야 하나. 아니면 백의의 마법사라도?’
그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을 믿으라고 했다.
절대 병력의 분산으로 혼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때마침, 박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준혁 시장님. S등급 몬스터든 뭐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곳에 로만 드미트리 님이 있지 않습니까.”
“……로만 드미트리 님을 개인적으로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박민우가 피식 웃었다.
김준혁과 인천 사람들.
그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다.
진실을 모르기에 그들의 신뢰는 가치가 있으나, 진실을 아는 박민우는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린 드래곤?
겨우 그런 거로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었다.
“그냥 믿으십시오. 인천은 로만 드미트리 님을 믿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김준혁도 동의하는 바였다.
애초에 그로 인해 인천은 기반을 갖추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믿지 않는 것은 그간의 성과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통신을 받은 지 겨우 몇 분이 지났다고, 방금 상황을 보고했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방금과는 조금 다른.
충격과 공포로 얼룩진 목소리였다.
[……이곳에 지원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로만 드미트리 님이 그린 드래곤을 처리했습니다.]
순간.
박민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눈빛의 김준혁을 바라보며, 박민우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S등급 몬스터의 출현.
인천을 위협하는 존재는 겨우 몇 분 만에 손쉽게 제거되었다.
* * *
로만 드미트리는 그동안 대재앙에 대해 알아보았다.
몬스터 웨이브, 전조 현상, 블러드 레인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대재앙은 현세에 들이닥치는데, 그중에서 유일하게 끝나지 않는 지옥을 선사하는 것은 몬스터 웨이브가 유일했다.
전조 현상과 블러드 레인.
둘은 끝을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전조 현상은 대재앙 이전에 나타난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하면 끝나는 것이고, 블러드 레인은 소나기가 내린다는 표현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몬스터들이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몬스터 웨이브는 달랐다.
끝나지 않는 지옥.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밀려들었다.
몬스터 웨이브는 끝을 가늠할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몬스터 웨이브는 각기 다른 천차만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떤 곳은 1시간 만에 몬스터 웨이브가 끝난 경우가 있는 반면, 어떤 곳은 레드 타임이 끝나고도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또 어떤 곳은 하위 등급의 몬스터들이 나타난 반면, 또 다른 곳은 상위 등급의 몬스터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몬스터 웨이브만 피해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서울이 인천의 멸망을 확신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해결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마론교.
대재앙을 연구하는 그들이 ‘몬스터 웨이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몬스터 웨이브는 차원의 뒤틀림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다른 차원이 연결되면서 몬스터들이 공격해 오는 것이기에, 차원의 연결 고리를 끊으면 몬스터 웨이브도 끝날 것이다.”
단순한 방법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해결책을 알았다.
그런데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생각해 보라.
몬스터 웨이브의 근원지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뚫고 근원지에 도달해야만 한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며, 레드 타임은 3일간 언제 어디에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른다.
몬스터 웨이브를 처리하겠다고 움직이는 사이에, 인간들의 본거지가 쓸려 나가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사람들은 실패의 사례를 참고해 레드 타임 이후부터 몬스터 웨이브를 정리해 나갔다.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기다리지 않았다.
맞닥트리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도륙했고, 그린 드래곤의 머리마저 날려 버리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단 한 마리도.
뒤로 흘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적을 완벽하게 섬멸하며, 근원지로 추정되는 위치를 찾았다.
수십 마리.
수백 마리, 수천 마리, 수만 마리.
나아가는 걸음에 따라 몬스터의 사체가 산처럼 쌓였고, 어느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시야에 무언가가 발견되었다.
‘저것인가.’
차원의 뒤틀림.
근원지가 분명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을 수 없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예민한 감각은 이질적인 부분을 정확히 포착했다.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근원지를 중심으로 몬스터들이 새카맣게 밀려들었다.
그들을 전부 도륙하더니, 마침내 도달한 근원지를 향해 마나를 폭발시켰다.
‘천마검범 중반부 일초식.’
번뜩.
단 한 번의 일격.
강렬한 폭발이 그대로 근원지를 휩쓸었다.
콰앙!
콰콰콰콰콰콰쾅!
차원의 균열이 요동쳤다.
공간이 뒤틀리며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균열을 통해 밖으로 나오려던 몬스터들의 육체가 짓이겨지며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마론교의 사람들은 말했다. 차원의 균열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치를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내부에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그런데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인해, 차원의 균열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겨우 하루.
정확히는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몬스터 웨이브를 처리한 경악스러운 성과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는 제1 방어선. 몬스터 웨이브를 소멸시켰다. 다시 한번 말한다. 인천 근방에서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는 이제 소멸되었다.”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 소식.
그것이 인천을 발칵 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