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06화 (506/615)

506화 6번째 대재앙 (7)

제1 방어선.

청산을 비롯한 인천의 군인들은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성벽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절대 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제1 방어선을 통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너희의 역할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째.

구철호는 온몸의 긴장감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저게 사람이야, 괴물이야?”

저 멀리.

한 인간이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성벽 앞까지 몬스터들이 들이닥쳤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서 몬스터들을 저만큼 밀어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한두 마리쯤은 놓칠 법도 한데, 로만 드미트리가 지나간 자리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박기태가 말했다.

“괴물이라는 것에 전 재산을 걸게요. 저게 인간일 리가 없잖아요.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 수만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하면서도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가설이 사실이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인천의 안전을 생각해서 적당하게 템포를 조절하고 있어요. 그냥 막 돌진해 버린다면, 지나쳐 버린 몬스터들이 인천으로 향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둘의 대화처럼.

성벽 위의 사람들은 똑같이 생각했다.

그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성벽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악!]

“그, 그린 드래곤?!”

“몬스터 웨이브에 S등급 몬스터라니!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멀어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초록빛의 거대한 존재는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이 분명했다.

로만 드미트리도 저 많은 몬스터와 그린 드래곤을 동시에 감당하지는 못할 터.

부랴부랴 전투를 준비하던 구철호와 박기태는, 어정쩡한 자세로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어?”

“헉.”

그린 드래곤의 머리가 날아갔다.

제대로 공방을 주고받지도 못했는데, 일격에 그린 드래곤의 거대한 육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사고가 정지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S등급 헌터다.

그린 드래곤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임에는 분명하나, 그렇다고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현재 세계 최고의 실력자라고 불리는 이들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충격적인 진실을 증명했다.

수차례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다시 확인하는데도, 방금까지 강렬한 포스를 뿜어 대던 그린 드래곤은 머리를 잃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구철호와 박기태가 중얼거렸다.

“……기태야?”

“……예, 길드장님.”

“방금 그린 드래곤이 일격에 죽은 거 맞지?”

“아마도 맞는 것 같은데…… 이건 맞으면 안 되는 일 아니에요? 저게 사실이면, 로만 드미트리는 S등급이 아니라 SSSSS등급을 책정받아도 이상하지 않아요. 세상에 그 누가 그린 드래곤의 머리를 일격에 날려 버려요?”

“그렇지?”

“그렇죠.”

“나만 안 믿기는 거 아니지?”

“저도 안 믿겨요.”

구철호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사이에 로만 드미트리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전장에 나가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절대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생각보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분명 대재앙이 발발한 상황에 치열한 전투를 예상했건만, 청산의 결단과는 다르게 그들은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통신기로부터 충격적인 말이 들렸다.

[여기는 제1 방어선. 몬스터 웨이브를 소멸시켰다. 다시 한번 말한다. 인천 근방에서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는 이제 소멸되었다.]

“?”

“?”

구철호와 박기태.

둘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드러난 물음표가 어떤 생각인지를 증명했다.

머릿속에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그렸다.

수만 마리의 몬스터를 홀로 학살하고.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의 머리를 일격에 날려 버리고.

혼자서 몬스터 웨이브를 해결했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하게 변했다.

“기태야. 아무래도 우리 해낸 것 같다.”

“길드장님. 우리 대박 난 것 같아요.”

그들은 확신했다.

청산의 인천 잔류.

모두가 비난했던 그 선택이 신의 한 수였음을.

그들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핑크빛 미래에, 그들은 더는 대재앙이 암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 *

로만 드미트리의 무전.

충격받은 것은 청산만이 아니었다.

한참 전투를 치르던 김준혁도,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말에 눈을 부릅떴다.

“……몬스터 웨이브를 해결했다고?”

그건.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몬스터 웨이브를 왜 끝나지 않는 지옥이라고 표현하겠는가.

미국의 마론교는 몬스터 웨이브를 해결할 방법을 분명히 제시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하게 ‘레드 타임’의 위험성을 배제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근원지를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며, 근원지를 찾는다고 할지라도 특별한 장치를 통해 내부를 파괴하는 작업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몬스터들은 구경만 하고 있을까? 아니다. 파괴 작업 도중에도, 차원 너머에서는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최악의 재앙.

엄청난 희생이 필요로 하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레드 타임이 끝나지도 않은 이 시점에, 혼자만의 힘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더는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상식의 잣대는 중요하지 않아.’

수만 마리의 몬스터.

그린 드래곤.

몬스터 웨이브.

모두 의미 없는 전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감만큼이나 명확한 결과로 스스로를 증명해 냈고, 그렇다면 그는 이 세상의 기준을 훨씬 상회하는 강자임이 확실했다.

그제야 백의의 마법사가 왜 이렇게 인천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로만 드미트리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과 같은 편을 먹고 싶었을 것이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성벽 너머.

아직도 몬스터들이 많았다.

수년 전에는 그것들이 지옥의 악마처럼 보였다면, 지금의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왜 인천을 택했을까.’

사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인천은 보잘것없는 도시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인천을 향한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이 진심이고, 앞으로도 인천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면.

자신은 그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그가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말하면 뛰어들 것이고,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을 것이다.

단 하나.

인천의 안전이면 충분했다.

김준혁은 그것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김준혁이 소리쳤다.

“모두 힘을 내라! 몬스터 웨이브가 소멸되었다. 조금만 버틴다면, 로만 드미트리 님이 우리 모두를 구원해 줄 것이다!”

그에게 있어.

로만 드미트리는 이제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 * *

서울과 인천.

사람들은 전자가 천당이고, 후자가 지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천이 희망에 부풀어 오르는 지금, 서울은 예상치 못한 절망적인 순간에 놓여 있었다.

정보부장이 말했다.

“……조금 전, 도봉구가 무너졌습니다. 도봉구 의원 이호철은 끝까지 결사 항전을 벌이다가 사망했으며, 현재 레드 드래곤과 몬스터들은 남쪽에 위치한 강북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강북구는 이미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습니다만, 문제는 S등급 몬스터인 레드 드래곤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크흠.”

“정말 방법이 없는 겁니까?”

회의실에 절망 어린 분위기가 퍼져 나갔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도봉구가 무너졌다는 사실에, 이 자리에 참석한 의원들은 겁에 질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지난 대재앙과는 달랐다.

서울이 이렇게 빨리 무너진 적은 없었다.

“현재로서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대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S등급 헌터 중에서도 특별하다고 평가받던 백의의 마법사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서울을 이탈했습니다. 레드 드래곤은 공중에서 강력한 화염을 뿜어내는 몬스터기에, 수성의 이점을 살릴 수 없는 저희로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은 레드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 서울에 기반을 둔 길드들을 모두 소집했습니다. 그들은 종로에 집결했으며, 만약 강북구마저 무너진다면 종로에서 결사의 항전을 벌일 예정입니다.”

“다른 국가들의 회신은 어떻게 됐습니까?”

“도움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6번째 대재앙은 지난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대단합니다. 대한민국에 몬스터 웨이브와 2마리의 S등급 몬스터가 나타났는데도, 전 세계를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상황은 심각하지 않은 편에 속합니다. 레드 포인트로 추측되는 미국은 자국의 방어에 전 병력을 쏟아붓는 상황이며, 다른 나라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레드 타임이 지나고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다면 타국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대한민국의 힘으로 어떻게든 버텨야 합니다.”

궁지에 몰렸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였다.

대통령의 친위대(親衛隊)를 동원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백의의 마법사들을 불러들이는 것.

의원들은 현실을 알았다.

영등포에 터를 잡은 대통령은 절대 친위대를 밖으로 내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정태가 말했다.

“서울의 안위를 위해서는 백의의 마법사가 필요하다. 정보부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를 어떻게든 서울로 불러들여라. 약점이 있다면 파헤치고, 부귀영화를 바란다면 그것을 제공하라. 우리로서는 백일의 부재를 예상하지 못했기에, 일단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장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필요가 있다.”

백의의 마법사.

그가 필요했다.

김정태의 말에, 정보부장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사람들에게 상식적인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정보를 총괄하는 정보부장으로서는, 아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선택지가 있었다.

“……사실 그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정보부장이 말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전부 사실입니다. 저도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정보부에서 파악한 내용입니다.”

숨을 골랐다.

조금 전.

정보원들의 보고를 받았을 때, 정보부장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중앙 정부에 상당히 곤란한 소식이면서, 오히려 생로(生路)를 제공하는 소식이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인천에도 서울과 똑같이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충격적이게도, 그린 드래곤은 나타남과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에게 머리가 날아갔습니다. 그 과정에 걸린 시간은 겨우 몇 초. S등급의 몬스터가 단 일격을 버텨 내지 못했습니다.”

“그, 그게 무슨?!”

“그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말이 안 되는 일이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로 사람들을 보냈는데, 조금 전에 보고받은 바로는 그린 드래곤의 죽음은 사실이며, 심지어 로만 드미트리가 몬스터 웨이브의 근원지마저 소멸시켰다고 합니다. 다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S등급 몬스터를 처리하고 몬스터 웨이브를 해결했다면, 그는 현재 이 세상이 말하는 기준을 완전히 파괴하는 괴물입니다.”

근원지의 소멸.

다들 충격을 받았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지 않았다.

정보부장이 덧붙였다.

“그리고 백일의 이탈은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백일을 정의의 사도라고 말하지만, 백일은 정말 중요할 때는 철저하게 이득을 따라가는 집단입니다. 그들이 인천으로 향한 것은 아무래도 로만 드미트리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파악했기 때문으로 추정되며, 그렇다면 백의의 마법사를 회유하는 일은 힘들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 정보부가 파악한 정보대로라면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방법은 ‘로만 드미트리’를 회유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관계로 감정적인 문제가 있겠지만, 그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은 레드 드래곤을 처리할 뿐만 아니라 단번에 강대국으로 도약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명백한 약소국이다.

그런 땅에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난 것은 기회로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판이 뒤집혔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가치가 급등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만한 실력자라면, 대한민국으로서는 그간의 관계를 어떻게든 돌려놓아야만 했다.

김정태가 한참을 고민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친위대를 바라보았다.

“조달수 의원을 포박하라.”

“저를 왜…… 악!”

콱.

친위대가 조달수를 붙잡았다.

땅바닥에 처박혀 포박당하는 조달수의 모습에, 김정태가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조달수 의원. 내가 말하지 않았나. 지난 실수를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로만 드미트리가 서울의 안전을 보장해 줄 강자라면, 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너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의 마음을 달랠 것이다. 그러니 겸허하게 받아들여라. 불응할 시에 그 대가는 매우 처참할 테니까.”

담담했다.

죽음을 선고한 그가 정보부장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인천에 연락하라. 내가 직접 로만 드미트리와 대화를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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