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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07화 (507/615)

507화 6번째 대재앙 (8)

도봉구가 무너지던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제1 방어선으로 복귀했다.

사람들은 황급히 성문을 활짝 열었고, 누가 명령한 것이 아닌데도 양쪽으로 도열해서 로만 드미트리의 무사 귀환을 반겼다.

그들의 눈빛에는 경외심이 가득했다.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치열한 순간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뚝, 뚝.

몸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혈인(血人)이었다.

본인의 것인지, 몬스터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로 흠뻑 물들었고, 로만 드미트리가 걸어갈 때마다 검붉은 발자국이 남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구철호였다.

그가 한달음에 달려와 물을 건넸고, 로만 드미트리는 그를 힐끗 살피더니 물을 머리 위에 부었다.

콸콸콸.

핏물이 씻겨 나갔다.

수많은 생명체의 죽음이 담긴 핏물이 발밑으로 흘러내렸고, 축 늘어진 머리카락에 사람들은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육체에는 그 어디에도 상처 부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닥에 웅덩이를 형성하는 이 핏물이, 전부 몬스터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경악스러웠다.

수만 마리를 학살하고도, S등급 몬스터를 처리하고도.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경외심을 일으켰다.

로만 드미트리가 직할대원을 불렀다.

“다른 곳의 상황은?”

“현재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태성 직할대장은 도심 내부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고, 제2 방어선은 김준혁 시장을 필두로 큰 문제 없이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습니다. 특이 사항으로는 ‘백일’이 합류했습니다. 서울도 S등급 몬스터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라서 중앙 정부에서 분명히 복귀 명령을 내렸을 텐데도, 그들은 인천에 남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알겠다.”

검에 물을 부었다.

피와 뒤섞인 물을 한번 털어 내더니, 로만 드미트리가 군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곳을 지켜라.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해이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너희가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통과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인천의 상황을 모두 정리하고 돌아오겠다.”

“알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제1 방어선을 지키겠습니다!”

모두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문제를 해결하고 오겠다는 말.

믿었다.

그들의 맹목적인 신뢰는 명확한 결과로부터 비롯되었다.

자리를 떠나는 로만 드미트리.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머리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해지는 그림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 * *

상황은 금방 정리되었다.

블러드 레인이 잦아들며 이태성이 제2 방어선에 합류했고, 백일의 활약으로 몬스터들을 대부분 처리했다.

처음 계획과는 달랐다.

제2 방어선은 버티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었으나, 수성에 강력한 이점을 발휘하는 백일의 합류로 오히려 공격하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지막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등장은 상황을 종결시켰다.

지상에 있는 몬스터들을 전부 처리하자, 제2 방어선은 성문을 열고 로만 드미트리의 귀환을 반겼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무전을 통해 들었습니다.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을 처리하고, 몬스터 웨이브의 근원지마저 소멸시켰다는 것을요.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없었다면 인천은 생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김준혁이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로만 드미트리가 경험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님을 알았다.

인천 사람들.

그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다.

로만 드미트리가 단시간에 그들에게 힘을 부여했다지만, 실전에서 결과로 만들어 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김준혁은 진법을 정확하게 활용했고, 강민호는 수호문의 무공을 적극적으로 발휘해서 제2 방어선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텼다.

백일의 도움이 있었다 할지라도, 둘의 활약이 없었다면 제2 방어선은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태성.

그가 주요했다.

그는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았지만, 담담한 얼굴처럼 큰 피해 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만큼 재능이 있다는 의미겠지.’

혼란한 세상.

이태성은 아무런 배경 없이 B등급에 올랐다.

그런 그에게 크리스의 기술이 전해지면서, 그는 단시간에 급속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강민호와는 달랐다.

강민호는 특별한 힘을 부여받고도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반면, 이태성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직은 A등급에 불과하나, 지금의 성장 속도라면 충분히 S등급을 확보할 재능을 갖추었다.

먼 미래의 인천.

이태성은 핵심 인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 자리는, 앞으로 그의 존재가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런데.

우뚝.

로만 드미트리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인천의 소속이 아닌 사람이, 인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며 극진한 예를 보였다.

“너는 누구지?”

그 물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 존재에게 집중되었다.

* * *

그는 바로.

박민우였다.

박민우는 로만 드미트리를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숙였고, 백일의 마법사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길드장님!”

“어째서 고개를……!”

그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정의를 위해서 인천행을 택했다지만, 백일을 비롯한 백의의 마법사는 인천의 하수인이 아니다.

정확히는 인천을 도와주는 입장이지 않은가.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를 발견하자마자 90도 폴더 인사를 하는 박민우의 모습에, 백일의 마법사들은 뒤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같이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백일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박민우는 달랐다.

박민우는 로만 드미트리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정말 로만 드미트리라니.’

겁을 먹었다.

전생.

로만 드미트리는 압도적인 괴물이었다.

알렉산드르로서 엄청난 힘을 갖추고도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의 정체가 천마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천마가 누구인가! 김판석으로 살아갔을 때, 사람들은 대적할 수 없는 무적의 존재를 천마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그를 우러러보았고, 천마의 사람이 되길 바랐건만, 가혹한 운명은 천마의 반대편에서 용서할 수 없는 낙인을 찍어 버렸다.

지금은 달랐다.

박민우는 전혀 다른 존재였지만, 영혼에 각인된 공포에 차마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볼 수 없었다.

덜덜 떨었다.

그때였다.

“너는 누구지?”

화들짝 놀랐다.

벼락같은 음성이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는데도, 박민우에게는 그 어떤 벼락보다도 강렬하게 머릿속에 내리쳤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활용해서 존재감을 어필하려 했건만,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저는 백일을 이끄는 박민우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백의의 마법사라고도 부르지만, 저는 과분한 명성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중앙 정부가 만행을 저지르는 상황에도 지금껏 외면해 왔던 나약한 인간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 저와 백일을 받아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 님의 정의를 행하는 일에 저희를 요긴하게 사용해 주십시오. 이 뜻을 전하고자, 제 절절한 마음을 전하고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헉.”

“기, 길드장님?!”

백일의 길드원들이 당황했다.

의논되었던 부분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발언이었고, 백일뿐만 아니라 인천의 사람들도 충격적인 상황에 말을 잃었다.

그 순간.

박민우가 장윤태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빛을 주었다.

너희도 고개를 숙이라고.

나를 따라 천마에게 예를 표하라고.

장윤태가 무언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길드원들에게 속삭였다.

“모두 한발 물러나십시오. 백의의 마법사님은, 우리가 존경하는 길드장님은 지금 로만 드미트리를 시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권력에 미친 사람이라면 길드장님의 요청을 덥석 받아들이겠지만, 진정한 의도를 파악한다면 길드장님을 일으켜 앞으로 같이 정의를 행하자고 말할 것입니다.”

뿌듯한 표정의 장윤태.

‘이런 미친 새끼가.’

분노가 치밀었다.

박민우는 자신의 삶에 참 인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로서는 진실을 알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상황만으로는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

박민우의 힘을 생각한다면, 백일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박민우의 요청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는 누구지?”

* * *

순간.

박민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은 분명히 신분을 밝혔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눈빛은 과할 정도로 차가웠다.

‘설마 내 정체를 꿰뚫어 본 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생과 지금.

차원이 다르다.

절대 알렉산드르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박민우라는 새로운 신분을 내세워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 되고자 했다.

오늘의 만남을 위해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 훈련을 반복했다.

물론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이 급발진이었긴 해도, 전생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입이 메말랐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과연 자신을 용서할까.

‘로만 드미트리 님은 적으로 규정한 존재에게 자비가 없는 분이야. 나를 죽일 거야.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궁지에 몰았던 나를, 로만 드미트리 님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자신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정체를 숨기다가 발각되면 처참하게 죽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살아남을 확률은 단 0.01%도 허락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마왕을 등에 업고 알렉산드르로 살아가던 시절에도 로만 드미트리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를 적대하는 것은 박민우의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천마 백중혁.

그를 우러러보았다.

실익을 따지는 계산을 떠나서, 자신이 하늘처럼 생각하는 존재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천마가 다스리던 세상. 그때 백성들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경험했지. 천마는 잔인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지만, 신분을 막론하고 명확한 기준에 일반 백성들이 피해를 볼 일은 없었어.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대가를 치렀고, 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만한 보상을 받았지. 천마 백중혁이라는 존재는 내 하늘이야. 내가 진정으로 따르고자 하는 하늘. 그리고 그가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갔을 때, 내가 우러러보았던 하늘은 드미트리를 비추는 빛줄기가 되었지.’

부러웠다.

무저갱에서 천마의 모습을 갈구했었다.

그런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이번만큼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이판사판이야.’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박민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에서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선택해야 할 때임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 님. 잠시 자리를 옮겨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 *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박민우는 넙죽 엎드리더니 소리쳤다.

“로만 드미트리 님!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진실을 절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소인의 마음을 이해하여 부디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어중간한 계략.

그따위 것이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박민우는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했다.

“제 정체는 알렉산드르, 아니 천마 백중혁 님의 백성이었던 김판석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패배한 이후, 저는 마왕에게 버림받아 영혼이 소멸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렇게 죽는 줄 알았는데 신이 저를 불러들였고, 신은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대신에 전생의 업보를 해소하지 않는다면 윤회의 저주에 걸린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박민우의 삶은 그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죽음으로 전생의 잘못을 감당해야 하건만, 저는 새로운 삶을 허락받았습니다. 이번 삶은 참회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저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겠으나,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신다면 이 김판석이 천마의 백성으로서 뜻깊은 삶을 살겠습니다.”

고래고래 소리쳤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떤 처분이든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목숨은 이제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

박민우는 반항할 생각은 배제한 채, 자신의 목숨을 로만 드미트리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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