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달라진 상황 (1)
통신이 연결되었다.
화면 너머로 김정태의 모습이 보였고, 그는 로만 드미트리를 확인하자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정태입니다.]
“본론부터 말해.”
툭 내뱉은 말.
김정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는 의원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건방짐에 분개했지만, 김정태는 상대가 호전적이라는 사실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절대적으로 을(乙)의 위치인 상황.
순간적인 감정에 큰일을 그르칠 만큼, 김정태는 감정에 휘둘리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본론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최근 중앙 정부와 있었던 일을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조달수 의원의 증언을 믿고 인천 정부를 배척했으나, 미심쩍은 부분을 계속해서 조사한 결과 조달수 의원과 그를 따르는 문태준 조사관의 악의로부터 비롯된 사건임을 알아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행동했어야 했는데, 반란 행위는 워낙 중대한 사건이다 보니 저희로서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재앙이 끝나는 대로 대한민국 전체에 인천의 무고함을 밝힐 것이며, 악의적으로 일을 처리한 조달수 의원과 문태준 조사관은 합당한 처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화면을 살짝 돌렸다.
의도적으로 포박되어 있는 조달수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번 일에 특별히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인천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중앙 정부는 적극적으로 협조할 마음이 있습니다.]
교묘한 화법이었다.
중앙 정부의 잘못을 조달수 의원에게 전부 뒤집어씌우면서, 김정태는 악감정을 지니고 있을 것이 분명한 조달수를 처벌할 권한을 넘겼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혹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적대하던 사람을 확실히 보복할 수 있는 상황에, 김정태가 내민 당근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본론부터 말하라고 했을 텐데.”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김정태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적절한 당근으로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 했지만, 조달수 정도로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인천 정부와 다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을 쓰러트리며 스스로를 증명했습니다. 중앙 정부를 도와주십시오. 중앙 정부와 같이 서울의 위기를 해결해 준다면, 대재앙이 끝난 이후에 중앙 정부는 인천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부귀영화를 바란다면 그게 무엇이든 내줄 것이며, 앞으로 인천은 이 김정태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미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입니다.]
연합 관계.
대통령이나 되는 인물이, 먼저 자존심을 버리고 손을 내밀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개소리를 정성껏 지껄이는군. 그따위 제안은 거절한다.”
그 말에.
김정태의 표정에 균열이 생겨났다.
* * *
명백한 거절.
노골적인 적의.
김정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엔,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은 정도를 넘어섰다.
[로만 드미트리 님. 중앙 정부에 대한 악감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도자는 감정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배제하고 실익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선택이 본인에게 더 이득이 되는지를. 로만 드미트리 님의 힘은 충분히 강합니다. S등급의 몬스터를 일격에 쓰러트릴 정도라면, 단언컨대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적수가 존재하지 않겠지요. 문제는 이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서상 외국인인 로만 드미트리 님이 대한민국의 도시인 인천을 다스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 나라는 속인주의(屬人主義)를 따를 만큼 한민족의 피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위기를 외면하고, 중앙 정부를 대놓고 적대한다면 인천 정부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중앙 정부와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김정태가 사납게 몰아붙였다.
[제 손을 잡으십시오. 이곳 대한민국에서 뜻이 있다면, 중앙 정부가 로만 드미트리 님의 명분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일리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외국인이다.
지금은 김준혁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가 대한민국 전체를 다스리려 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명백하게 외국인처럼 생긴 존재가 이 나라를 다스리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것은 애초에 무의미한 전제다. 나는 나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네가 말하는 태생의 문제로 내게 반발심을 보인다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아니라 타인으로서 존재하겠지. 김정태. 너는 내가 현실을 알고도 외면하길 바라는 건가. 대한민국과 타협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해서, 그따위 같잖은 변명을 믿어 주길 바라는 건가. 사건의 전개는 명백하다. 조달수 의원과 문태준 조사관에게 죄를 떠넘긴다고 해서 우리가 알아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 자리.
의도적으로 받아들였다.
인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김정태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애초에 나는 너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니엘 카이로라는 사람이 있다. 약소국의 후계자로서, 이 대한민국만큼이나 참담한 상황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였지.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그는 참담한 상황에도 항상 백성들의 안위를 우선으로 여겼다.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다고 해서, 언제 어디에서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고 해서. 자신의 사람들을 버려 가면서까지 부귀영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지도자가 선택해야만 하는 희생을 감당했다. 그런데 너는 대체 뭐지? 대한민국을 다스린다고 말하면서, 너는 서울 하나만의 안위를 위해서 나라 전체를 희생하는 것을 어째서 정당하다고 말하는 거지? 그래서 같잖다는 거다. 나는 너희가, 스스로를 중앙 정부라 말하는 이 나라의 썩어 빠진 수뇌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적의를 드러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해 알아 가면서.
처음부터 중앙 정부는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언젠가 그들과 마찰이 생기는 날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너희가 말했었지. 인천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겠다고.”
지금의 발언.
파란을 일으킬 것이다.
인천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너희가 내뱉은 말을 더는 정정할 필요 없다. 인천은 지금부터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 * *
툭.
통신이 끊겼다.
김정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떻게든 상황을 좋게 풀어 가려고 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마지막 발언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감히 내 앞에서 반란을 들먹여?!”
콰앙!
탁자를 내리쳤다.
반란.
예민한 단어였다.
아니, 내뱉어서는 안 될 단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로 명백한 적대 관계를 형성했고, 이로써 중앙 정부와 로만 드미트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을 쓰러트릴 만큼의 강자다.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반드시 회유해야 할 인물이건만, 그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행동할 줄은 몰랐다.
중앙 정부 창설 이후.
김정태의 자리가 위협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 의원이 소리쳤다.
“대통령님!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해야 합니다. 대놓고 반란을 말하는 인물이라면,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엄청난 위협이 될 겁니다.”
“동의합니다. 그는 위험한 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존재를 내버려 두었다간 국가 붕괴 단계가 찾아올 것이 분명합니다.”
“대통령님!”
난리가 났다.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기에, 그의 적의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의원들의 말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이대로 두었다간 내 자리를 위협할 인물이다. 공존이 불가능하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없애 버리는 수밖에. 그가 세력을 형성하기 이전에 반드시 그를 처리해야만 한다.’
악의가 번뜩였다.
김정태가 말했다.
“조달수 의원.”
“예.”
“지금 당장 중국으로 가라. 중국은 우리와 같이 북한의 몬스터들을 섬멸하고, 서로의 국경을 마주하는 협력 관계를 맺길 바랐지. 그동안은 중국의 제안을 거절해 왔으나 지금부터는 얘기가 다르다. 이번 대재앙에서 우리를 도와준다면, 중국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전하라.”
“알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조달수가 넙죽 엎드렸다.
기회였다.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에게 바쳐질 제물이었던 조달수는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의도적으로 조달수를 택했다.
조달수는 살아남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것이다.
김정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의원들을 바라보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는 그의 도움을 받아 일을 손쉽게 처리하려고 했을 뿐, S등급 몬스터 하나에 무너질 나라가 아니다. 직할대를 보내겠다. 레드 드래곤을 쓰러트리고, 대한민국이 건재함을 세상에 증명하겠다. 그리고 6번째 대재앙이 완전히 지나가고 나면…….”
살의를 드러냈다.
김정태는 반기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와 그를 따르는 반역도들을 처단할 것이다.”
* * *
통신이 끝나고.
인천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반란이라는 충격적인 단어에, 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김준혁. 너는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시선이 집중되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김준혁이, 본인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김정태 대통령의 발언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간의 관계를 잊고 중앙 정부와 협력한다면, 인천은 편안하게 대한민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또한 그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천을 대놓고 배척해 놓고, 막상 인천의 저력이 강하다는 사실에 태세를 전환하고 손을 내민 존재들입니다.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그들과 같이 미래를 도모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번 선택이 인천에 무조건 좋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현실을 직시했다.
반란은 단순하게 끝날 문제가 아니다.
“만약 중앙 정부가 수성에 성공한다면, 인천 정부는 대한민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대재앙을 버텨 내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벌이듯, 인천은 살아남기 위해서 같은 대한민국 국민을 향해 무기를 들어야겠지요. 반대로 중앙 정부가 수성에 실패한다면, 대한민국의 체계가 붕괴됩니다. 인천만의 힘으로 대한민국 전체를 감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딜레마였다.
어떤 결과든.
인천에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해했다.
현생의 사람들은 타협하는 것에 익숙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온 방식은 그들과 달랐다.
“너희가 앞으로 나를 따르려거든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인천을 중심으로 전혀 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앙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대재앙을 버텨 내지 못하든, 내 손에 모두 죽어 나가든.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은 말뿐인 위협이 아니다.”
점점.
존재감이 부풀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사람들은 완전히 압도되었다.
“대재앙을 버텨 내지 못해 수십, 수백 만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그들이 나의 백성이 아니라면 나는 방관할 것이다. 대재앙이 모두 마무리되고 반대편에서 인천을 향해 적의를 보이는 사람들은 모조리 도륙해 버릴 것이다. 명심하라. 나 로만 드미트리는. 내가 다스리는 이 땅, 인천이라 불리는 이 도시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의 안위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말하지만, 내게 모두를 살피는 정의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람들.
그들이 자신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체계를 따라야만 했다.
자신만 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도 자신의 방식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군림하는 방식이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천마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