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달라진 상황 (2)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
파격적이었다.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한 김준혁조차도, 눈앞의 상황에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20년 전.
대재앙이 처음 발발되었다.
인류에 들이닥친 위기에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그들은 대재앙과 절대자 같은 새로운 단어들을 정립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말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생각보다 순탄하지 않았다.
인류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강대국으로 분류되는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우리가 왜 그 많은 병력을 지원해야 합니까? 세계 평화? 좋습니다. 우리도 세계 평화를 위해서 당연히 노력할 생각이나, 일단 자국의 안전이 우선이지 않습니까. 순서의 문제입니다. 대재앙이 들이닥쳤을 때, 자국이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그때부터 병력을 움직여 다른 국가들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인들도 인간입니다. 본인들이 태어난 땅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겠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죽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파병은 가족의 안위가 보장된 이후에나 논할 문제입니다. 당장 내 나라, 내 가족이 죽어 가는데, 그 어떤 병사가 사기를 가지고 다른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강대국의 횡포라고요? 예, 맞습니다. 당장 내 나라가 멸망하게 생겼는데, 당신들이 비난하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회의실이 발칵 뒤집혔다.
이번 일.
세계 대전과 같은 서로의 욕망이 뒤얽힌 문제가 아니다.
인류 전체가 멸망의 위기를 맞이했고, 강대국이라 불리던 나라도 하루아침에 멸망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 강대국으로서 다른 나라를 보살핀다? 그건 미래가 있을 때나 통용되는 논리였다.
당장 자신들이 위험한데, 단 1명의 병사라도 다른 나라를 위해 병력을 보낼 수는 없었다.
상식이 무너졌다.
강대국들은 입장을 고수했고, 약소국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절망했다.
강대국의 횡포를 비난하며, 앞으로 찾아올 절망적인 미래에 벌벌 떨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진심일까.
강대국의 선택을 단순히 횡포라 치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진심은 이기적이었다.
만약 본인들이 강대국의 범주에 포함되었다면, 강대국의 선택을 ‘횡포’라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강대국의 국민들이 부러웠어. 타국을 배제하고 일단 자국의 안위를 먼저 확보하고, 남의 가족이 아니라 내 가족을 챙겨 주는 강대국의 결단이. 정의감이나 인류애 같은 것들을 말하기엔, 내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했어. 그게 사람들의 진심이었던 거지. 강대국의 횡포라서 비난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지킬 수 없기에 비난이라도 해야만 하는 상황. 나는 이기적이고 싶었어. 이기적으로라도 살아남고 싶었다고.’
이 세상을 구성하는 대부분은 영웅이 아니다.
타인보다는 본인이 우선이기에, 세상이 진짜 멸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정의를 말하지 않았다.
노벨 평화상?
세계 평화를 말하는 지도자?
혼란스러운 시대에서는 정말 가혹한 지도자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그 지도자가 행하는 정의를 위해서 본인이 희생되는 상황을 감수해야만 한다.
차라리 독재자를 원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쓰레기를 바랐다.
세상의 99%가 욕할지라도, 본인을 따르는 1%의 국민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지도자를 바랐다.
사람들의 진심이었다.
언젠가는 화합과 평화가 필요하나, 본인들이 그 희생을 감수하길 바라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
김준혁을 비롯한 사람들은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명심하라. 나 로만 드미트리는. 내가 다스리는 이 땅, 인천이라 불리는 이 도시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의 안위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말하지만, 내게 모두를 살피는 정의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대국과 같은 힘이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런 존재가 사람들이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진심을 알아주었다.
일단 본인들을 먼저 챙겨 주겠다는 말.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약소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며, 중앙 정부가 외면하는 지방에서 살아가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 모두가 비난할지라도 이렇듯 자신들을 위해 주는 강인한 지도자가 나타나길 바랐다.
그래서일까.
이 순간.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강인함에 매료되었다.
그가 앞으로의 역사에 악인(惡人)으로 기록된다고 한들, 인천 사람들은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 * *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인천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미래에 결심을 내린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
그가 말하는 미래가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로만 드미트리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이다.
그런데.
인천 사람들과는 생각이 다른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일이었다.
“……모두를 살피는 정의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니. 저희가 인천을 따르는 게 정녕 맞습니까?”
“길드장님. 백일은 정의를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인천을 따르지 않는 존재들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은, 백일이 그동안 행해 왔던 정의와는 다릅니다. 이건 아닙니다. 저는 제 안위를 챙기고자 백일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반발이 심했다.
백일의 구성원들.
그들은 진심으로 정의를 추구했다.
당장 지금 죽더라도, 눈앞에 공격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박민우가 말했다.
“멍청한 것들.”
“……그게 무슨.”
“너희는 정녕 로만 드미트리 님의 진심을 모르는 건가. 로만 드미트리 님은 분명히 ‘자신’을 따르는 백성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인천에 국한되었지만, 만약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가 그분을 따른다면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서 기꺼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분이다.”
업보의 펜던트에는 재밌는 사실이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펜던트의 색깔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변했다.
그 말인즉.
자신이 따르는 로만 드미트리는 악인이어서는 안 된다.
그의 모든 언행을 정의로 포장해야만, 백일을 유지하고 전생의 업보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박민우가 격렬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나라는 썩어빠졌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단호하게 중앙 정부와 선을 그은 이유는, 그래야만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명확한 명령 체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중앙 정부, 지방 정부 등으로 명령 체계가 쪼개져 있다.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한다면, 우리는 중앙 정부를 몰아내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 너희에게 묻겠다. 자신의 안위만을 살피는 중앙 정부가 정의인가? 아니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히면서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로만 드미트리 님이 정의인가? 정의가 무조건적인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로만 드미트리 님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렸을 뿐이다.”
본인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머릿속에서 조합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내가 백의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세월 동안 대체 무엇을 해냈지? 기껏해야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구해 낸 정도라면, 로만 드미트리 님의 정의는 악인들을 처단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정의에 매료되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나는 언제까지고 깨끗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더러워지는 대가로 세상이 평화를 되찾는다면, 나는 기꺼이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백일의 마법사들이 말을 잃었다.
“……길드장님.”
“역시.”
감동 어린 그들의 눈빛.
그간의 세월.
켜켜이 쌓아 온 믿음 덕분에, 어떤 개소리를 지껄여도 백일의 마법사들은 박민우가 정의로 보였다.
그날.
백일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 * *
레드 타임 이틀 차.
첫날만 하더라도 평화로웠던 한 도시가, 새벽부터 시작된 갑작스러운 공격에 초토화가 되었다.
콰콰콰콱!
“크악!”
“악!”
바다 너머.
쓰나미가 밀려들었다.
수십 미터나 되는 쓰나미가 단번에 도시를 쓸어 버렸고, 몬스터들의 공격을 대비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바다에 쓸려 가 버렸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애써 쓰나미를 피해 몸을 피신한 사람들은, 바닷물을 뚫고 튀어나온 거대한 문어발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크악!”
“크라켄이다!”
크라켄(Kraken).
A등급의 해양 몬스터였다.
사방에서 크라켄들이 출몰하며 사람들을 공격했고, 그와 비슷한 해양 몬스터들도 속속들이 나타났다.
바다 위.
몬스터 웨이브가 생성되었다.
마나의 파동으로 쓰나미가 생겨났고, 차원의 뒤틀림을 통해서 바닷물을 타고 몬스터들이 밀려들었다.
바닷가에 위치한 부산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부산은 지방에서 나름대로 군사력을 갖춘 도시였는데, 자연재해(自然災害)와 같이 들이닥치는 공격은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부산의 지휘관.
차영민은 절망한 표정으로 바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부산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모두 퇴각하라! 해양 방어선을 포기하고, 최종 방어선에서 결사 항전을 할 것이다. 모두 퇴각하라!”
“퇴각하라!”
고래고래 소리쳤다.
사람들이 도망쳤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쓰나미에 쓸려 버리거나,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아 비명을 질렀다.
차영민은 빠르게 도망치면서도 자꾸만 뒤를 확인했다.
참담하게 부서져 나가는 도시의 모습에,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는 심장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끝인 건가.’
아무래도.
어떻게든 유지하던 부산의 명운도 이제는 끝이 보였다.
* * *
회의실.
수뇌부들의 몰골은 참담했다.
차영민과 같이 전장에서 병력을 진두지휘하던 그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병력의 30%를 잃었다.
상대는 끝이 보이지 않는 몬스터 웨이브이기에, 사실상 부산이 살아남을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한 수뇌부가 말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현재 부산의 전력으로는 몬스터 웨이브를 버틸 수 없고, 중앙 정부는 언제나 그랬듯 서울의 안위가 확보될 때까지는 도와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우리가 며칠을 더 버틴다고 달라질 현실이 아닙니다. 레드 타임이 끝난다고 할지라도 중앙 정부는 서울 근방부터 차근히 정리할 테고, 그때는 이미 부산이 몬스터 웨이브에 쓸려 나간 뒤일 것입니다.”
“부산을 버려야 합니다. 이곳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차영민 또한.
진실을 알았다.
부산은 버틸 힘이 없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부산을 떠난다고 우리에게 다른 희망이 생기기라도 하는 건가. 우리는 특별한 사명감으로 부산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지만, 서울에서 우리의 존재를 받아들여 주지 않아 이곳 부산에서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다.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부산을 떠날 수 없는 우리에게, 부산의 명운은 우리의 목숨과 직결된다.”
참담한 현실이었다.
차영민의 말에 다들 고개를 숙였다.
버림받은 사람들.
정확한 표현이다.
서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기에, 부산과 같은 지방 정부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부산시장 차영민.
사실 그는 원래 시장이 아니었다.
본래 시장이었던 사람은 진즉에 죽었고, 그나마 전투 능력을 인정받은 그가 자리를 물려받았을 뿐이다.
그때였다.
“……혹시 인천에 대한 소문 들으셨습니까?”
“인천?”
한 수뇌부였다.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가, 차영민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 저도 이게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친구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천에 몬스터 웨이브와 블러드 레인, 그리고 S등급 몬스터가 동시에 나타났는데,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물이 인천을 이끌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제 겨우 레드 타임 이틀 차다. 그런데 몬스터 웨이브를 해결했다고?”
“그래서 저도 의심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 분명한데, 그 친구가 평소에 허풍이 심하기는 해도 빈말을 하는 친구는 아닙니다. 그 친구가 말하길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몬스터든 일격을 버티는 법이 없고, 앞으로 이 대한민국은 인천 정부로 인해 판도가 완전히 뒤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장님. 인천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라면, 저희를 외면한 중앙 정부가 아니라 인천을 따라서라도 부산을 지켜야만 합니다. 이대로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수뇌부의 말.
믿기지 않았다.
인천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니.
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 차영민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했다.
차영민이 물었다.
“정보의 출처는 어디지?”
친구라는 존재.
그를 믿을 만한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수뇌부가 자신 있게 말했다.
“백일 출신의 장윤태라고, 어릴 적부터 저와 죽마고우였던 사이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백일이 어떤 집단인지.”
허무맹랑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백일.
그 단어 하나면 설명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