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13화 (513/615)

513화 달라진 상황 (5)

조금 전.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부산에 다녀오겠다. 박민우만을 대동할 것이니,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인천의 방어 체계를 견고히 하라. 만약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즉시 인천으로 돌아오겠다.”

그 말에.

사람들은 감동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인천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사실 혼자만의 힘으로도 부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언제든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박민우를 대동했다.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였다.

박민우가 아무리 백의의 마법사로서 명성을 떨쳤다지만, 이번 대재앙을 통해 로만 드미트리는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증명했다.

그런데.

박민우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혼자만 대동한다는 것이, 마치 특별한 대우처럼 느껴졌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날 신뢰하는 게 분명해. 그게 아니고서는 나만 대동할 이유가 없잖아.’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상황이란 말인가.

천마의 신뢰를 받는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쿵 뛰었고, 지옥으로 변한 부산으로 향하면서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자랑할 곳이 없다는 게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만약 김판석의 삶이었다면? 주막에서 천마재림 만마앙복(天魔再臨 萬魔仰伏)을 외치며, 자신이 천마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길을 열어라.”

명령이 떨어졌다.

눈빛이 강력한 열망으로 물들었다.

천마의 신뢰를 받는 상황에서, 그 기대감을 절대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기회야.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마력을 끌어올렸다.

로만 드미트리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며,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향해 마력을 폭발시켰다.

“썬더 스톰(Thunder Storm).”

번쩍!

콰콰콰콰콰콰쾅!

하늘이 파랗게 물들었다.

번개 다발이 내리꽂히며 강력한 폭풍이 일어났고, 그것은 몬스터들을 그대로 휩쓸어 버리며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였다.

사람들은 박민우의 진실을 몰랐다. S등급의 마법사.

이 세상에서 마법적인 능력으로 선구자라고 불리지만, 사실 전생에 비하면 그렇게 대단한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약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박민우는 각성이라는 현생의 시스템을 거쳐, 전생과는 다르게 힘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알았다.

“증폭(增幅).”

콰콰콰콰콰콱!

스킬을 발현했다.

폭풍의 힘이 더욱 강력하게 변했고,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눈 몇 번 깜빡할 사이에 목숨을 잃어버렸다.

박민우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마법을 퍼부었다.

분명히 부산 전체가 공격을 퍼부을 때는 몬스터들을 막아 내지 못했건만, 박민우 단 한 명의 존재가 몬스터들을 압도했다.

백의가 팔락였다.

이미 마력에 완전히 동화된 상태로, 그가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기가 라이트닝(Giga Lightning).”

번뜩.

콰콰콰콰쾅!

길이 열렸다.

몬스터들이 밀려났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박민우는 사나운 얼굴로 마나를 미친 듯이 분출했다.

‘감히 천마의 앞길을 막는 녀석들은 내가 모조리 쓸어 버린다.’

이 순간.

박민우는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 * *

활짝 열린 공간.

로만 드미트리가 몸을 던졌다.

성벽 아래로 떨어진 그는, 고개를 들어 몬스터들이 밀려드는 시작점을 바라보았다.

‘몬스터 웨이브를 상대로 소모전은 의미가 없다. 결국에는 문제의 근원지를 해결해야 끝이 나겠지.’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문제가 명확하고.

자신에게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더는 지켜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팟.

파파파팟.

앞으로 달려들었다.

박민우의 마법에 길이 열렸지만, 성벽과 멀어지자 어느새 눈앞에 몬스터들로 득실거리는 공간이 보였다.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달려드는 속도를 살려, 몬스터들 사이를 그대로 파고들었다.

푸확.

키에에엑!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로만 드미트리와 맞닥트리자마자 몬스터들의 사지가 찢겨 나갔고, 그들은 시각적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오른쪽에서 비명이 들리면 왼쪽에서 나타났고, 왼쪽에서 비명이 들리면 코앞에서 머리를 날려 버렸다.

수십, 수백, 수천. 숫자는 무의미했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싸우는데도, 박민우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길을 열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당황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목적을 깨달았음에도, 그들은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설마 혼자서 몬스터 웨이브를 소멸시키려는 건가.”

비상식적이었다.

보통 몬스터 웨이브는 국가 단위의 전력으로 해결한다는 사실을 떠나, 부산에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바다 위에 생성된 몬스터 웨이브.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자연재해라고 불렀다.

몬스터 웨이브 자체만으로도 인간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인데, 지형적인 문제로 공략조차 쉽지 않기에 이와 같은 상황에는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 재앙을 혼자 감당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가 명백했기에, 안전을 확보한 부산 사람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듯.

로만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길이 열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순식간에 바닷물이 들어찬 공간에 도달하더니, 주저 없이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팟.

타타탁.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특별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로만 드미트리가 바다 위를 달려 나갔다.

등평도수(登萍渡水).

경공술의 일종이었다.

마나를 발바닥에 얇게 펴서 바다 위를 걸었고, 상식적으로 바다에 가라앉아야 하는데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바닷물에서 몬스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발바닥으로 머리를 밟아 부숴 버렸고, 그것을 발판 삼아 뛰어오른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집어삼키겠다고 같이 날아오르는 몬스터들의 존재를 일격에 소멸시켜 버렸다.

확.

콰콰콰콰콱!

쓰나미가 일어났다.

거센 파도는 인간의 존재를 집어삼키려 했지만, 검을 한번 휘두르는 순간 바닷물이 단번에 증발되었다.

‘천마검법 중반부 일초식.’

펑.

퍼퍼퍼퍼퍼펑.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자연을 거슬렀다.

결국.

근원지에 도달했다.

몬스터들은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를 막으려 했으나, 그들의 발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단 일격.

근원지가 그대로 찢겨 나갔다.

* * *

일련의 상황.

차영민은 넋을 잃었다.

이틀 전, 수뇌부와 진행한 회의에서 정말 인천을 믿고 가는 게 맞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백일의 존재가 진실을 보증하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부산의 상황을 솔직하게 알렸고, 진실을 알고도 도와주겠다고 말한 로만 드미트리의 자신감을 믿을 뿐이다. 그것이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면. 우리에게는 일말의 희망조차 허락되지 않겠지.”

현실을 외면했다.

바다 위에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

세간에 알려진 인천의 힘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차영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기 최면을 걸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엄청난 실력자다.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을 단번에 처리한 만큼,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부산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비상식이 현실이 되었다.

박민우의 강력한 마법에 이어,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주는 압도적인 무력에 차영민은 사고가 정지되었다.

“……대체 정체가 뭐야?”

수차례 눈을 깜빡였다.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달라지지 않았다.

시야를 가득 메울 만큼의 몬스터들이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을 감당하지 못했고, 바다 위를 뛰어다니며 몬스터를 도륙하는 모습은 이게 현실인지를 의심하게 했다.

차영민은 김준혁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이성적인 사람이 왜 중앙 정부와 대립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인천에 존재한다면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S등급?

아니다.

수치로 가늠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존재.

로만 드미트리의 힘을 알고 있었다면, 중앙 정부보다는 그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중앙 정부를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방 정부의 힘만으로 대재앙을 감당하는 최악을 선택할 수 없기에,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차악(次惡).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달라. 단 한 번의 대화였지만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인천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보였고, 혼란한 세상에서 그것은 대세를 거스르기 충분한 이유였겠지.’

수뇌부가 말했던 로만 드미트리의 업적.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었다.

인천이 어떻게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로만 드미트리가 충분한 근거를 증명했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박민우의 활약으로 남은 몬스터들도 금방 정리했고, 최종 방어선으로 복귀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차영민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마지막까지 싸우면서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보였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하자 그는 열망에 찬 얼굴로 넙죽 엎드렸다.

“부산시장 차영민! 은인을 뵙습니다!”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것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사지가 멀쩡하지 않은 부산의 군인들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몰려들어 로만 드미트리에게 예를 표했다.

“은인을 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부산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합류한 지 겨우 한 시간.

부산은 벼랑 끝에서 살아남았다.

* * *

전장을 수습했다.

부상자들을 옮기고 숨을 돌릴 여유를 확보하자, 로만 드미트리는 부산의 수뇌부들을 불러모았다.

차영민과 부산 사람들.

그들은 강렬한 열망을 보였다.

굳이 약속을 이행하라 말하지 않아도, 차영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산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부산은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산은 약속대로 인천 정부,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전적으로 협력할 것이며,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 님의 명령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을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다들 한뜻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의 마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박민우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박민우가 나섰다.

“여러분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앞으로의 미래를 논하기 위함입니다. 레드 타임이 끝난 지금, 대한민국에 들이닥친 재앙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중앙 정부는 S등급 몬스터인 레드 드래곤을 소탕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마지막 날에 서울 근방에 세 개의 몬스터 웨이브와 또 다른 S등급 몬스터가 나타나면서 위험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로 인해 병력이 건재한 지방 정부를 상대로 소집령(召集令)까지 선포한 상태입니다. 문제는 다른 지방 정부들의 사정도 여의치 않다는 겁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지방 정부 대부분이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았고, 그들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도움 없이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6번째 대재앙.

세상이 대혼란에 빠졌다.

현재 레드 포인트로 확정 난 미국의 경우에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도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레드 타임이 끝났다고 대재앙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설명으로 들었듯, 대재앙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다. 나는 이번 기회로 너희 부산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지방 정부들을 모두 포섭할 생각이다. 내게 협력할 의사가 있는 지방 정부들은 직접 도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나, 그렇지 않은 곳들은 철저하게 배제할 것이다. 기간은 3일. 3일 안에 내 사람들의 안위를 확보한 뒤, 나는 단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부산의 존재.

그들을 받아들이면서 명확한 목표를 세웠다.

움직이지 않았으면 모르되, 본격적으로 움직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어중간한 것은 없었다.

“나는 서울을 공격해 중앙 정부를 무너트릴 것이다.”

“……!”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차영민도 경악했다.

서울을 공격하겠다니.

아직 대재앙이 끝나지도 않은 이 시점에,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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