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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17화 (517/615)

517화 서울 정벌 (4)

뚝, 뚝.

검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졌다.

저 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하남시장 정문호로서는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네가 하남시장인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피로 물든 머리를 젖히며 물었고, 심장을 서늘하게 만드는 차가운 음성이 죽음을 예고했다.

그때부터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차영민이 반란을 언급할 때만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한 로만 드미트리는 엄청난 존재감으로 자신을 압도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남은 끝났다.

중앙 정부가 도움의 손길을 거절한 지금,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은 인간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것밖에 없었다.

털썩.

“하, 항복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리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제가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사실은 저도 반란 세력에 가담하고 싶었습니다. 매번 지방의 안위 따위는 관심에도 없는 중앙 정부에 그 누가 진심으로 충성하겠습니까?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남과 서울은 거리가 너무나도 가깝습니다. 법보다 주먹이 무섭다고, 턱 바로 밑에 중앙 정부의 칼날이 있는데 제가 어찌 그들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후회했다.

중앙 정부가 하남을 이렇게 쉽게 버릴 줄 알았다면, 그는 차영민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힘이 없는 약자의 선택을 헤아려 주십시오. 만약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마치 전쟁에서 살아남은 척 중앙 정부에 연락해서,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삶을 갈망했다.

로만 드미트리 너머.

시체들이 보였다.

분명히 집무실에 도달할 때까지 수백의 병력이 있었을 텐데, 언뜻 보이는 공간에는 생명체들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비를 베푸는 것밖에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정문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고, 무릎을 꿇은 채로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았다.

익숙했다.

패자들의 간절함에, 로만 드미트리의 입술이 비틀렸다.

“우리는 모두 진실을 알고 있지 않았나. 중앙 정부는 대한민국 전체의 고혈(膏血)을 빨아 생존하는 집단임을. 그래서 너희를 굳이 설득하지 않았다. 내가 인천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들, S등급 몬스터와 몬스터 웨이브를 처리했던 명확한 결과들. 중앙 정부가 베푸는 같잖은 혜택에 현혹되지 않았다면, 너를 비롯한 사람들은 내가 대한민국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하남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성남, 과천과 같은 도시들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내 뜻에 동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네 선택인 것이다. 너는 이 나라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나마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 상황이라는 생각에 현실을 외면했다.”

슥.

검을 들었다.

정문호가 벌벌 떨었다.

들썩이는 입은 살려 달라고 반복해서 말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중앙 정부는 나를 영입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인천을 적대하는 악의를 보였고, 부산은 반란 세력으로 낙인찍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따랐다.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나는 나를 믿어 준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약속한 미래를 부여할 것이다. 그뿐이다. 적으로서 존재하는 네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다.”

단호하게 내뱉는 말.

정문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래를 예견했다.

그렇게.

번뜩.

정문호의 머리가 날아갔다.

* * *

하남의 멸망.

그 소식은 곧바로 중앙 정부에 알려졌다.

대재앙이 발발한 이후 벌써 비상 회의만 수십 번이었다.

굳은 얼굴의 의원들을 뒤로하고, 정보부장이 참담한 소식을 전달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하남을 겨우 한 시간 만에 무너트렸습니다. 하남시장 정문호는 머리가 잘려 효수(梟首)되었으며, 로만 드미트리는 하남의 병사들을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았습니다. 대통령님. 이건 잘못되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방식은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습니다.”

충격적이었다.

국제법을 어긴 것으로도 모자라, 로만 드미트리는 효수라는 너무나도 잔인한 복수를 택했다.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달랐다.

아무리 전쟁이 벌어진다고 한들, 보통 지도자급의 인물들은 즉결 처형하지 않았다.

그들을 회유하여 새로운 미래를 도모하거나, 전쟁에서 패배했으니 그만한 대가를 받아내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효수라니.

끔찍한 결과였다.

명백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건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 예로 하남의 시민들은 단 한 명도 건드리지 않은 반면, 무기를 들고 전투 의사를 보였던 병사들은 예외 없이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미친놈입니다. 그는 하남을 무너트리자마자 구리로 향한 상태이며, 이대로라면 구리도 하남과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대통령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아직.

대재앙은 해결되지 않았다.

서울 곳곳이 공격받고 있으며, 지금 다른 곳에 신경을 썼다간 내부에서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가 더욱 미쳤다고 느껴졌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병력을 움직였다간 몬스터들을 조우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들은 마치 행동에 제약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김정태가 말했다.

“대한민국의 원칙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는 일단 서울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할 것이다.”

“하지만…….”

“정보부장!”

김정태가 사납게 소리쳤다.

사실 이 자리에서 그보다 분노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를 따르는 세력들이 죽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살리려고 무의미한 희생을 감수할 수는 없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야만 한다. 로만 드미트리는 국제법을 어겼다. 전 세계는 대재앙 이후 한 달간 인간들의 싸움을 엄격하게 금했건만, 그는 어떠한 명분도 없이 같은 인간을 공격했다. 그 말은 명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국제법의 위반으로 우리는 타국의 도움을 받을 명분이 생겼으며, 중국은 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금 당장 중국이 참전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지.”

중국.

애초에 그들과는 협력 관계를 맺었다.

이미 그들의 지원군이 도착한 상태였으나, 명분을 확보한 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국제법을 어기지 않았다면, 중국은 비공식적으로 도와주는 것 말고는 내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스스로의 무덤을 팠다. 중국은 세계를 이끄는 강대국으로서, 국제법을 어긴 로만 드미트리를 단죄할 권한이 있다. 그러니 동요하지 마라. 이미 중국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주변 지방 정부들을 정리하는 사이에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그들이 서울에 도달했을 때는 한중 연합군이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김정태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알았다.

단 한 번의 협력.

돌이킬 수 없는 강이었다.

앞으로 중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나, 그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김정태가 매섭게 말했다.

“서울은 언제나 그랬듯 안전할 것이다.”

* * *

하남의 소식.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중앙 정부만이 아니었다.

곧바로 다음 목표로 거론되는 구리의 경우, 수뇌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매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우리가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하남이 우리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갖추었는데, 겨우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쓸리지 않았습니까. 절대, 절대로 버티지 못합니다. 게다가 중앙 정부는 서울의 안위를 먼저 확보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빌어먹을 새끼들. 지금껏 간과 쓸개를 전부 바쳤는데, 정말 필요할 때는 우리를 외면해 버리다니.”

불만이 팽배해졌다.

그들 또한.

처음에는 중앙 정부를 믿었다.

그래서 차영민의 연락을 대차게 거절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한 사내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시죠. 듣기로는 중국의 지원군이 도착했다고는 하나, 그들이 몬스터들을 해결하는 사이에 구리는 멸망하고 말 겁니다. 중국의 지원군이 얼마나 강하든, 그건 저희의 안위를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척 연기를 하고,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다시 중앙 정부에 협력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맞습니다. 하남시장이 효수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로만 드미트리는 자비가 없는 인물이니, 지금은 살아남기 위한 연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결국.

구리시장이 결단을 내렸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으니, 인천시장인 김준혁에게 연락해서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데.

김준혁이 화면 너머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차영민 시장이 분명히 전달하지 않았습니까. 다시는 번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결과가 정해진 상황에서의 변심은 진심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신뢰는 불확실성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여러분들을 도울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김준혁 시장님! 저희의 상황을 헤아려 주십시오.”

[결정권자는 제가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전장으로 떠나며 제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선례도 남기지 않겠다. 적으로 규정한 이들을 절대 살려 두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정 살아남고 싶다면, 전장에서 로만 드미트리 님을 마주했을 때 백기를 내걸고 자비를 구하십시오. 물론 그것이 올바른 선택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일 뿐, 그분이 정말 자비를 베풀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가혹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절망할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집무실 문이 발칵 열렸다.

당황하는 수뇌부들의 모습에, 병사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반란 세력이 구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 * *

구리도 하남과 다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에 의해 방어가 뚫렸고, 공격을 예상하고 단단히 준비한 병사들조차도 어떻게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성벽이 피로 물들었다. 순식간에 성벽 위를 종횡무진하며 학살을 벌이는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구리의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를.

직할대가 따랐다.

이태성은 병사들을 베며 소리쳤다.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라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우리가 패배한다면, 중앙 정부는 인천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직할대는 망설임이 없었다.

인천.

그들은 그동안 중앙 정부의 핍박을 받았다.

중앙 정부가 인천을 무너트리려고 어떤 수작질을 부렸는지를 알기에, 중앙 정부에 가담한 사람들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이지 못하면 죽는 싸움이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공감하기에, 서울 정벌에 가담하는 직할대의 마음가짐은 승리를 강렬하게 갈구했다.

반드시 이겨야만.

인천이 살아남는다.

어쭙잖은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인천을 무너트리려 했던 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했다.

그런데.

모두가 직할대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남에서도 그랬지만, 구리의 병사들을 상대로 백일의 마법사들은 영 힘을 쓰지 못했다.

백일이 어떤 집단인가.

그들은 정의를 추구했다.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그들에게,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행위는 신념에 위배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박민우의 눈썹이 홱 올라갔다.

‘이 새끼들이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밉보이면 어쩌려고.’

전장에서의 자비?

헛소리다.

박민우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전적으로 동의했다.

알렉산드르 황제로서 수많은 세월을 경험하며, 조금이라도 전장에서 자비를 베풀었다가 등 뒤에서 칼을 맞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애초에 자비를 구걸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적의를 드러내는 순간 죽음을 각오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진심을 말할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장에서 병신 같은 태도를 보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의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백일의 마법사들은 들어라! 전쟁은 반드시 악(惡)을 대변하지 않는다. 세상을 멸망에 빠트리는 악마를 처리하기 위해서 천사라 할지라도 무기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악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현실의 참담함을 삼켜 내야만 한다. 중앙 정부는 그동안 인천을 핍박했다. 본인들의 의도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인천의 사람들이 죽었다. 너희는 그들을 용서할 것인가. 너희가 정의를 추구한단 이유로 악의를 방관하는 것이 맞는가.”

인천 사람들의 죽음?

허위사실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천의 사람들이 고통받았다는 것은 팩트였다.

어차피 중앙 정부는 모조리 죽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일은 없었다고 부정할지라도, 그때 가서는 패배자의 변명 따위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정의감에 불을 질렀다.

박민우가 앞으로 나섰다.

“나를 따라라! 정의를 위해 우리는 싸울 것이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은 우리의 정의를 악행이라 부를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이 평화를 되찾는다면 적어도 대한민국의 국민만큼은 우리가 정의를 위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혔다는 사실을 알아줄 것이다!”

“백의의 마법사님을 따르라!”

“정의를 위하여!”

백일의 마법사들이 같이 소리쳤다.

그들의 눈빛이 변했다.

옳은 소리다.

단순히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으나, 상대는 이미 승리를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때부터는 망설임이 사라졌다.

박민우를 필두로 마력을 폭발했다.

박민우가 속마음으로 소리쳤다.

‘감히 천마의 앞길을 막아서는 건방진 새끼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려라!’

순수한 악의(惡意).

박민우는 그냥 천마에 대항하는 새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백일의 마법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의 정의를 위하여!”

“백일이여, 영원하라!”

정의감을 불태우는 사람들.

전장을 압도했다.

백일이 진심으로 전투에 임하자, 구리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전쟁 발발 이후 겨우 2시간 경과.

하남에 이어, 구리라는 또 하나의 도시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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