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서울 정벌 (10)
로만 드미트리의 등장.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조달수와 문태준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가 감히 로만 드미트리 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며, 대해와도 같은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앞으로 평생 참회의 삶을 살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이 한목숨 바칠 것이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절절한 목소리였다.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자, 그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목숨을 구걸했다.
살고 싶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을 분출하는 그들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박민우. 현 상황을 보고하라.”
“계획대로 금천구는 몬스터 웨이브를 소멸시키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현재 금천구는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며, 중국의 지원군이 퇴각하면서 벼랑 끝에 몰린 상황입니다. 조달수와 문태준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도주를 시도했고, 제가 계획을 예상하고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알겠다. 중국의 퇴각과 김정태의 죽음으로 이미 전쟁은 끝이 났다. 남아 있는 적들을 정리하기 이전에, 일단 시민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몬스터 웨이브를 먼저 해결하도록 하겠다.”
타당한 명령이었다.
대한민국의 안위를 생각한 판단이었으나, 박민우는 괜히 실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이 죄인들은 어떻게 할까요?”
로만 드미트리가 좋아할 줄 알았다.
건방지게 굴었던 조달수와 문태준을 바친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기뻐하며 그들의 목부터 날릴 줄 알았다.
그런데 시선조차 주지 않는 모습이라니. 자신의 선물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박민우는 기대한 것만큼이나 빠르게 감정이 식어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대한민국의 안전을 확보하는 즉시, 전범(戰犯)들의 공개 처형식을 진행할 것이다. 조달수와 문태준 또한 그 자리에서 죄를 물을 것이다.”
“아아.”
조달수가 탄식을 내뱉었다.
공개 처형식.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내뱉은 말을 회수하는 인물이 아니기에, 그때부터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번 전쟁은 조달수와 문태준이 원인이었다.
그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진가를 알아보고 미리 관계를 형성했다면, 중앙 정부가 뒤늦게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지금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로만 드미트리의 충격적인 진실을 확인했을 때는 김정태의 머리가 날아가 버린 뒤였고, 로만 드미트리는 조달수와 문태준을 용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김정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과거의 잔재다.
대한민국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죽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걸음을 옮기며 말을 툭 내뱉었다.
“잘했다. 전범들이 계획대로 망명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작부터 잡음이 일어났을 것이다.”
담백한 말.
박민우가 눈을 부릅떴다.
잘했다니.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지 않은가.
머릿속에서 폭죽이 펑펑 터졌고, 입술이 씰룩이며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몬스터 웨이브 따위, 제가 단번에 쓸어버리겠습니다.”
신이 나서 달려가는 박민우.
어쩌면 그에게 업보의 청산은 뒷전일지도 몰랐다.
* * *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금천구의 몬스터 웨이브를 소멸시키는 등 대한민국의 안전을 확보했고, 남아 있는 적들은 김정태의 죽음에 백기를 내걸었다.
그들은 자진해서 항복하면 로만 드미트리가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곧바로 포승줄에 묶여 처형대로 끌려갔다.
로만 드미트리는 지방 수장들에게 처형식에 참관할 것을 명했다.
그렇게 김정태가 죽음을 맞이했던 영등포 광장에, 각 도시의 시장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부산시장 차영민과 울산시장 이명환도 있었다.
“……정말 놀랍네요. 로만 드미트리 님이 처음에 인천의 힘으로 중앙 정부를 상대하겠다고 말했을 때, 저는 상당히 무모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며칠 만에 이런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다니.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중국까지 개입한 전쟁에서, 로만 드미트리 님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감탄했다.
지방 정부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믿었다.
그가 보여 준 무력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비상식의 영역은 결과를 확인할 때까지 불안감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도시에 머물며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지방 정부를 동원하지 않는 안일한 선택 때문에, 인천이 중앙 정부에 패배하며 전멸하는 그림.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중앙 정부는 반란 세력에 가담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전쟁의 불길은 반란을 주도했던 부산과 울산을 쓸어버릴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자신들의 목숨이 걸려 있기에, 창밖 너머를 바라보며 제발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승전보가 들려왔다.
처형식에 참여하라는 소식에, 안도감이 들면서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이 피어올랐다.
그는 괴물이었다. 감히 가늠할 수 없는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련의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신뢰가 더욱 강해졌다.
그는 내뱉은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지방 정부들을 몬스터들의 위협으로부터 구해 주었고, 중앙 정부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도 김정태의 머리를 날리며 진심임을 증명해 냈다.
신뢰가 공고해졌다.
믿었다.
내뱉은 말을 천금처럼 지키는 사람이라면, 그를 믿고 미래를 만들어 갈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영등포 광장.
각 도시의 시장들이 예외 없이 참관했다.
그들의 시야에 한때 권력의 상징이라 불렸던, 서울의 구의원들이 처형대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입장이 뒤바뀌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저들이 권력자였건만, 시장들은 저들을 지켜보는 위치에 있음을 감사히 여겼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시다!”
“길을 열어라!”
처형식의 주인공.
로만 드미트리가 인파를 뚫고 나타났다.
* * *
처형식.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쟁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가감 없이 보여 주었다.
“이들은 김정태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나라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기생충처럼 달라붙어 본인의 안위만을 생각한 족속들이다. 이들을 처형함으로써 나는 전쟁의 종결을 선언하겠다.”
슥.
검을 들었다.
처형을 도맡았다.
다른 사람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모든 것을 뒤집어썼다.
의원들이 발작을 일으켰다.
바로 머리 위에 검이 겨누어진 의원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하,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는 것 아니었습니까? 듣기로는 병사들은 살려 준다는데, 왜 저희에게는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는 겁니까? 이렇게 다 죽여 버리면 서울의 미래는 없습니다. 앞으로를 생각해서라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제발 일말의 여지를 허락해 주십시오.”
반란을 일으키며.
늘 따라붙는 말이었다.
잔인하다, 가혹하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의지를 말했다.
“오랜 옛날 누구나 인정하는 강자가 있었다. 그는 강력한 무력에 인품마저 뛰어나, 적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뉘우치는 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중 열에 아홉은 새로운 삶을 살았다. 다시는 강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단 한 명의 존재는 악심(惡心)을 품어 강자가 머물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그는 몸이 전부 타 버리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전장에서 자비를 베풀지 않는 이유다. 나는 만에 하나를 허락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지금 결정권이 허락되지 않았던 병사들은 살려 주나, 지휘관들은 온전히 그 책임을 떠안아야만 한다. 너희가 진심으로 반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너희로 인한 변수를 차단할 뿐이다.”
강자.
그는 정파의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훌륭한 인물로 기억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았다.
“물론 잘잘못에 따라 너희와 같이 명을 달리하는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문태준 조사관이 그러하다. 그는 조사관의 위치를 악용하여 사람들을 핍박하고,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렸다.”
조달수와 문태준.
그들을 보았다.
죽음의 공포에 그들은 미친 듯이 떨었다.
결정권자인 의원이 아닐지라도, 문태준과 같이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처형대에 끌려왔다.
“너희가 만행을 저질렀을 때 너희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지?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한들, 너희의 안위에 위협이 되지는 않을 테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 또한 같다. 내게는 힘이 있고, 죄인들을 즉결처형함으로써 감당해야 할 대가는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그러니…….”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압도되었다.
생소한 논리였다.
약자의 입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로만 드미트리가 말하는 것들은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했다.
“죄인들은 이 자리에서 모두 죽어라.”
번뜩.
퍽!
* * *
로만 드미트리가 처형대에서 내려왔다.
얼굴은 피로 흠뻑 물든 상태였고, 로만 드미트리는 뚝뚝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굳이 닦아 내지 않았다.
김준혁이 다가와 말했다.
“……죄가 약한 몇몇 인물들을 살려 주었다면 민심을 달랠 수 있었을 겁니다.”
김정태 처형 직후.
로만 드미트리는 민심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
병사들을 살려 주었다고는 하나, 의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모습에 시민들 사이에서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로서는 이토록 잔인한 지도자는 난생처음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았고, 죄인들이 죽어 마땅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포박되어 있는 죄인들의 머리를 차례로 날려 버리는 모습은 시각적으로 충격을 선사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앞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에서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지도자이지, 모두에게 사랑받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만약 죄를 지었다면. 그 상대가 너라 할지라도 나는 서슴없이 머리를 베어 버릴 것이다. 만약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선례를 허락한다면, 나중에 선택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에게 충분한 여지를 허락하겠지. 나는 명확한 기준을 내세웠을 뿐이고, 그것이 가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 또한 당연하다.”
두 번의 삶.
매번 치열하게 살았다.
혼란한 세상에서 말랑말랑한 기준 따위는, 사람들을 오히려 더 큰 고통에 빠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란은 같은 피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이번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삶을 충분히 돌보아라. 그들이 나를 원망할지라도, 국가는 남겨진 사람을 챙길 의무가 있다.”
“……사람들이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상관없다. 우리의 진심이 거짓처럼 느껴져도, 국가는 그렇게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군림하는 삶.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과 한 발짝 거리를 두었다.
그로 인해 본인이 외로워지리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게 해야만 세상에 완전한 평화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두 번의 삶에서 증명받았다.
그래서 더욱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그리운 것일지도 몰랐다.
어떤 사람들은 잔인하다고 기록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도, 한스와 크리스, 케빈 같은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진심을 알아주고 곁에 남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첫 번째 삶과는 달랐다.
그때는 살기에 급급했다면, 두 번째 삶에서야 로만 드미트리는 비로소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김준혁 시장. 앞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에서 인천이 부흥하기를 바란다면, 강자의 방식을 이해하고 학습하라. 늘 불안해하고 공격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패자의 방식은 지금부터 허락되지 않는다.”
세상이 변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대한민국의 수뇌부들을 모두 소집하라. 이 나라의 지도자인 나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으로.”
“명을 따르겠습니다.”
김준혁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김준혁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