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화 태풍의 눈 (1)
6번째 대재앙.
사람들은 역대급 규모로 휘몰아치는 절망을 경험하며, 미국에 레드 포인트가 설정된 것은 인류에게 다행인 일이라고 말했다.
만약 다른 나라에 레드 포인트가 설정되었다면. 절대 미국만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적인 강대국인 미국이기에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레드 타임 첫날에 나타난 몬스터만 하더라도 약소국 두세 개 정도는 충분히 멸망시킬 전력이었다.
사람들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미국을 찬양했다.
이렇게 대재앙이 마무리되리라고 생각하던 그때, 레드 타임 마지막 날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그곳에 새로운 종류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인간들이여. 죽어라.]
인간 형태의 존재였다.
해골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경계선에 있는 괴물이,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순식간에 미국의 병사들이 쓸려 나갔고, 사람들은 단 한 번의 공격에 S등급 몬스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미 수차례 S등급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 냈고, 방어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수도이니만큼 문제없이 공격을 막아 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지의 존재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어 냈다.
마법을 퍼붓던 존재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사나운 기세를 드러냈다.
[죽음의 향기가 느껴지는구나. 리바이벌(revival).]
화악.
마력이 퍼져 나갔다.
땅바닥이 들썩이더니, 망자들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캬악!
크르르르르륵.
수백? 수천?
아니었다.
수십만이었다.
이 자리에 잠들었던 몬스터들이 생명력을 얻었고, 더욱 충격적인 문제는 그들 중에는 S등급 몬스터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병사들은 몬스터들에게 막혔다.
미지의 존재를 처리하기는커녕 망자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고, S등급의 망자들은 생전의 강력함을 드러내며 병사들을 휩쓸어 버렸다.
그 뒤로.
마법이 발현되었다.
인간들이 역할을 나누어 공격하는 것처럼, 미지의 존재는 끊임없이 마법을 퍼부어 댔다.
[죽어라!]
콰앙!
콰콰콰콰콰쾅!
대재앙이었다.
미국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 정부는 미지의 존재를 보스 몬스터라고 판단, 6번째 대재앙을 막아 내기 위해서 미국의 전력을 수도로 소집했다.
그야말로 총력적이었다.
보스 몬스터는 대재앙의 끝을 알리는 존재다.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려야만 평화를 되찾을 수 있기에, 미국은 이번 싸움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다.
미국의 총사령관.
로버트가 전장에서 병사들을 진두지휘했다.
“목숨을 걸어라! 절대 물러나지 마라!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린다면, 미국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로버트는 S등급 헌터였다.
그가 검을 들어 축복을 발현했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마력이 병사들에게 무한한 힘을 부여했고, 버프 계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미국은 그에게 총사령관 역할을 맡겼다.
물러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이대로 패배한다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멸망할 것이기에,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에도 병사들은 꾸역꾸역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을 잃은 병사들은, 리바이벌에 의해 다시 적으로 나타났다.
극악의 상성이었다.
미지의 존재.
단순히 S등급으로 분류하기에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냈다.
도시가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전투에 전념하던 그때, 로버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달받았다.
[LA에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보스 몬스터라고?!”
충격적이었다.
눈앞의 존재가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니.
미국 정부가 판단했을 때, 이 말도 안 되는 괴물보다 LA에 나타난 몬스터가 더 강력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일 터. 로버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미국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미국이 레드 포인트로 설정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도 이 나라가 무너질 일은 절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미지의 존재와 보스 몬스터.
이건 20년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미국 정부가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벌써 수십 차례 진행되었던 회의지만,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희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의 국방장관(國防長官)이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LA의 방어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수도를 공격한 미지의 존재처럼, LA를 공격한 뱀파이어(vampire) 형태의 몬스터는 미국의 병력을 자신의 숙주로 만들어 순식간에 LA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국방부가 판단하기에, 앞으로 데드 라인은 24시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방어 체계가 무너진 지금, 24시간이 지난다면 LA 전체는 뱀파이어의 영역으로 추락할 것입니다.”
“이런.”
“크흠.”
다들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미지의 존재.
뱀파이어.
둘 다 인간들에게는 최악의 상성이었다.
수족을 부리기에 머릿수로 압도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보스 몬스터로 추정되는 뱀파이어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LA를 지키던 S등급 헌터 두 명이 그에게 머리가 날아갔다.
압도적인 무력에 미국 정부는 뱀파이어가 보스 몬스터라고 확신했고, 뱀파이어는 검붉은 피를 토해 내더니 헌터들의 머리를 이어붙여 자신의 종으로 만들었다.
그때부터는 미국의 든든한 인재였던 존재들이, 같은 인간들을 도륙하고는 목덜미에 이빨을 꽂아 넣었다.
수도와 LA.
동시에 위기를 맞닥트렸다.
그중 LA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수도를 지키려고 병력을 모두 소집했기 때문이었다.
힘의 불균형.
그렇다고 병력을 물릴 수도 없었다.
미지의 존재를 처리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이도 저도 아니게 병력을 분산했다가는 LA뿐만 아니라 수도까지도 무너질 수 있는 상황. 미국 정부로서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수도의 안전을 먼저 확보할 생각이었는데, 전투가 길어지면서 LA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한 수뇌부가 말했다.
“……24시간이라니. LA가 몬스터들의 소굴이 된다면 미국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 지원을 요청할 방법은 없습니까?”
“이미 연락을 돌려 보았습니다만, 미국을 도와줄 만큼의 여력이 허락되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6번째 대재앙은 길고 길었던 공백만큼이나 엄청난 규모로 전 세계를 휩쓸어 버렸습니다.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면 병력을 보내 주겠다고는 하나, 지금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LA를 포기하자는 말씀입니까?”
“최대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만, 이대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참담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미국의 수뇌부들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미국의 국무장관(國務長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통령님. 대한민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 *
순간.
회의실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지난 며칠 대한민국은 회의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말했다.
“국무장관. 대한민국은 국제법을 어겼다. 그런데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대한민국의 일들.
미국의 정보부에 보고되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행보였기에, 미국은 대재앙이 끝나는 대로 대한민국의 처우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국제법은 명확한 경계.
그것을 넘어선 존재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저 또한 예민한 문제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나타나 반란 세력을 형성했고, 그들은 국제법을 어기고 김정태 대통령을 처단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모습은 세계 평화를 위해 반드시 엄벌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대재앙을 해결한 과정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S등급 몬스터를 일격에 처리하고, 겨우 3일 만에 대한민국 전체에 발발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했습니다. 그는 상식을 초월하는 존재입니다. 이번에 나타난 몬스터들은 S등급이 아닌 새로운 등급을 책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무장관 또한 참담했다.
자국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절대 이와 같은 제안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타국을 도와줄 여력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미국에 적대적인 감정을 지닌 중국과 같은 나라들을 배제한다면 대한민국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대통령님. 지금의 선택이 ‘대한제국’에 정통성(正統性)을 부여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먼 미래를 보았을 때는 당연히 배제해야 하는 선택지이지만, 단순하게 자국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지금으로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LA 시민들의 안전이 우선이지 않습니까. 그곳이 완전히 멸망해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LA를 구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타당한 발언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LA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대한민국의 가치는 단번에 급부상할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고민했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간 끝에, 미국 대통령이 물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정확한 신원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드미트리라는 성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번 일로 마론교가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미국의 마론교.
그들은 대재앙을 연구하는 집단이자,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신도수를 보유한 세계 최대의 단체다.
그들의 목적은 독특했다.
마론교에는 성서가 있다.
그들이 모시는 신이 이 세상에 강림할 수 있도록, 마론교는 ‘그분’을 위한 환경을 미리 만들자는 목적을 내세웠다.
훗날 신의 강림(降臨)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존재들. 그들은 대한민국의 행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감히 스스로를 황제라 표현하는 존재는 신의 권위를 넘본다면서, 대한민국의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단체가 바로 마론교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도움을 받는다면?
마론교가 난리가 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절대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물론 문제가 될 것입니다. 마론교는 LA의 멸망을 시련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이 강림한다면 인류의 문제는 모두 해결될 테니, 그들은 신을 받아들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에 더 큰 뜻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 정부가 따라야 할 목적과는 다릅니다.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지금은 리스크를 감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딜레마였다.
많은 문제가 있었다.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대재앙 이후의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안위다. 지금 당장 대한민국에 연락하라. 내가 직접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 * *
통신이 연결되었다.
화면 너머.
미국 대통령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미국을 도와주십시오. 대한민국이 동맹 관계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미국은 대한민국이 원하는 만큼의 전쟁 보상금을 지급하겠습니다. 이번 대재앙으로 입은 피해를 완벽하게 복구하고도 남을 만큼의 보상을 약속하겠습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목소리였다.
대한민국은 국호를 변경했다.
이제는 대한제국이 되었지만, 미국은 그 사실을 알고도 대한민국이라고 불렀다.
아직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동맹 관계와 전쟁 보상금을 언급하며, 그들은 예민한 문제를 배제하고 거래하자는 쪽으로 제안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도와주겠다는 말씀입니까?]
“예.”
미국 대통령이 당황했다.
사실 단도직입적인 제안에 여러 조건을 붙일 줄 알았다.
대한제국의 정통성 등을 거론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고민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간단한 문제였다.
미국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대재앙 발발 이후. 미국과 대한제국은 동맹 관계를 이어 왔습니다. 미국이 대한제국을 도와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처럼, 저 또한 동맹국이었던 미국의 위험을 외면하지 않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으로 그간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고, 앞으로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모든 관계를 새로이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일에 특별한 의미는 부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동맹으로서 역할을 해내고, 미국 대통령님이 말씀하신 만큼의 충분한 보상금을 받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제국과 미국이 동맹 관계로 남을지는, 지금부터 충분히 고민하시면 될 문제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나라.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되었다고 해서, 로만 드미트리는 그간의 관계를 완전히 내팽개치지 않았다.
미국은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그간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함이 아니다.
미국은 세계적인 강대국.
제일의 국방력을 보유한 나라인데, 그들조차 감당하지 못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사람들은 대한제국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대한제국이 국제법을 어기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는 하나, 대한제국이 보유한 힘은 마냥 적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 것이다.
그것을 의도했다.
대한제국이 안전을 확보한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직접 움직일 때임을 알았다.
그렇게.
툭.
통신을 끊었다.
주변에 대한제국의 수뇌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뜻을 들었고, 김준혁이 나서서 말했다.
“지금 당장 지원 병력을 편성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번 지원.
압도적으로 증명해 낼 것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병력을 무리하게 차출하는 것보다, 이번 일에 적합한 방법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와 박민우만 간다. 너희는 내가 없는 동안 대한제국의 안전을 책임지거라.”
순간.
박민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의 의사를 묻기도 전에, 박민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지금 당장 미국의 좌표를 확인하여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