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화 태풍의 눈 (4)
회의 당시.
박민우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카터 대위는 건방졌다.
감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의견에 토를 달았을 뿐만 아니라, 마치 깔보는 듯한 발언을 내뱉었다.
“……만약 실패해 버린다면 그때는 상황을 수습할 수 없습니다. 대체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혹시 이번 일로 전과를 올리시려는 겁니까.”
세상 그 누가.
감히 천마의 능력을 의심한단 말인가.
세상을 군림하던 존재에게 그깟 전과를 운운하다니.
전생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민우는 듣고만 있는 상황인데도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마음 같아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터의 뺨을 시원하게 날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참석한 자리이지 않은가. 수하인 그로서는 주군의 허락 없이 함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지. 참자, 참아. 난 알렉산드르가 아니라 박민우잖아.’
박민우.
백의의 마법사.
정의의 대명사로서 알렉산드르처럼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막 때려눕히고 다닌다면, 지난 20년간 겨우 연하게 만든 업보의 펜던트가 새카만 색으로 물들어 버릴 것이다.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만약 벤자민이 카터의 말을 끊지 않았다면, 박민우의 분노는 분명히 한계치에 도달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천마 백중혁.
로만 드미트리 황제.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이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박민우 혼자만 속이 새카매지는 자리였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회의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밖으로 나왔다.
로만 드미트리와 임시 거처로 자리를 옮기는 도중에, 박민우는 걸음을 멈추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 잠시 용무가 있어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알겠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딱히 이유를 묻지 않았다.
박민우가 어떤 존재라 한들, 자신의 범위 안에 들어왔기에 특별히 제약하지 않았다.
걸음을 돌리는 박민우.
얼굴이 흉악하게 돌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분노를 어떻게든 억눌러 보려 했지만, 자꾸만 치밀어오르는 분노는 알렉산드르 시절의 성질을 부추겼다.
“건방진 새끼가 감히 천마님을 욕보여?”
천마의 백성으로서.
이번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 * *
카터는 귀를 의심했다.
박민우는 영어를 상당히 유창하게 사용했기에, 그의 상스러운 욕이 의미 그대로 귀에 팍팍 박혔다.
“……백의의 마법사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상대는 백의의 마법사다.
미국에서도 상당한 평판을 자랑하는 존재이지만, 그런 사실을 떠나 삼류 양아치처럼 행동하는 것에 분노했다.
자신은 미국의 장교이지 않은가. S등급 헌터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상대인데,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눈빛에 카터 또한 물러나지 않았다.
문제는.
박민우의 상태였다.
현실적인 부분들을 계산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민우가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넌 상황 파악도 안 돼? 그렇게 능력이 없으니까 그깟 대재앙도 막지 못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겠지. 우리는 말이야. 자발적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야. 너희 대통령이 직접 연락하면서까지 제발 도와달라고 비니까, 우리는 동맹국이었고 하니 좋은 마음으로 미국 정부의 요청을 수락한 거라고. 그런데 뭐? 겨우 대위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황제 폐하에게 이번 일로 전과를 올리려는 속셈이냐고?! 이런 씨발 새끼야. 넌 그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태도냐?”
“…….”
말문이 막혔다.
비상식적이었다.
눈으로 보이는, 귀로 들려오는 일련의 상황.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하자, 카터는 사고 회로가 완전히 정지되는 기분이 들었다.
박민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상대를 쏘아붙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어. 제국의 지도자는 황제라 부르는데, 너는 도움을 받는 주제에 왜 황제 폐하에게 ‘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야! 야! 왜 그렇게 부르냐고. 건방진 것도 모자라서 예의까지 팔아먹었냐?”
이건 정말.
삼류 양아치의 모습이었다.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에,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미친놈들은 괜히 건드렸다가 피를 볼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박민우가 세간의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이 남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미친놈이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들이받는다면? 정말 자신을 공격할지도 몰랐다.
박민우의 눈빛에서 번들거리는 살의(殺意)가, 그냥은 끝내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였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카터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도 전장에서 닳고 닳은 베테랑이지만, 오히려 많은 것을 경험했기에 물러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그래서는 안 되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 사과하는 게 맞지?”
박민우가 서늘하게 웃었다.
상대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물론 수틀리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목적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무시한 카터에게 경고하려는 의도였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말뿐일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사내가 한발 물러난 것이라면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했다.
“카악, 퉷.”
땅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강조하듯 말했다.
“앞으로 조심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씨발, 미국이고 뭐고 간에 네 머리부터 날려 줄 테니까. 미국이 널 보호해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나서기도 전에, 내 선에서 너희를 짓밟는 건 일도 아니니까.”
박민우.
알렉산드르 황제.
두 번의 삶을 살아가며 차근히 근본을 쌓아 갔지만, 그의 진정한 근본은 무지렁이 김판석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X도 아닌 새끼가 어디서 깝죽거려.”
단순무식.
그제야 분노가 조금 가라앉는 김판석, 아니 박민우였다.
* * *
카터로서는 난데없이 뺨을 맞은 상황이었다.
겨우겨우 분노를 가라앉힌 그는, 마론교에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했다.
“……저로서는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혼자서 뱀파이어 로드를 쓰러트린다면,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것을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판이 깔렸다.
벤자민 장군이 미국의 안위를 우선으로 하기에, 카터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통신기 너머.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스스로가 모든 위험을 떠안겠다는데, 우리가 굳이 만류할 이유는 없겠지. 뱀파이어 로드는 S등급 헌터 두 명의 머리를 동시에 날려 버린 괴물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소문처럼 강하다고 한들, 홀로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지금부터 네 역할은 대한민국을 의도적으로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모든 위험을 떠안도록, 뒤늦게 무모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상황을 돌이킬 수 없도록.]
뱀파이어 로드.
마론교가 파악한 정보대로라면, 그 괴물은 SS등급을 책정받아 마땅한 새로운 형태의 괴물이었다.
혼자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하는 것.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존재하기에, 마론교는 로만 드미트리가 LA 대응팀의 도움을 받는 상황을 배제할 생각이었다.
정말 혼자서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하도록.
혼자만의 힘으로 상대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어떻게 손써 볼 겨를도 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그가 죽는다면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은 힘을 잃을 것이고, 그분의 심기를 건드릴 존재가 사라지게 되겠지.]
웃음을 머금었다.
참 어리석은 인간들이다.
그분의 강림만이 인류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인데, 대체 왜 아득바득 현실을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날이 찾아오기 전에 그분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세상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마론교는 정의를 추구하나, 정의라 말할 수 없는 모호한 경계선을 신념으로 삼았다.
카터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모든 것은 마론교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 * *
1시간 뒤.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지역을 맡은 존재들이었는데, 그곳의 문제를 해결하고 황급히 LA행에 몸을 실었다.
세 명의 S등급 헌터.
불멸(不滅)의 라이언.
괴력(怪力)의 고든.
빙결(氷結)의 레이첼이었다.
미국 정부는 수도의 전력을 유지하면서 최대한의 병력을 보냈고, 그들의 등장에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미국의 저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세 사람은 어느 나라에서든 상위권을 다툴 만한 강자이건만, 그들을 LA로 보낼 수 있을 만큼 미국은 엄청난 국방력을 갖추었다.
천조국.
괜한 말이 아니다.
미국은 최초의 대재앙이 발발하자마자 헌터 육성과 영입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아부었고, 자본주의 세상에서 실력이 있는 헌터들에게 미국만 한 선택지는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대외적으로 공개된 S등급 헌터만 수십 명에다가, 미국이 비밀리에 육성한 S등급 헌터들이 더 존재한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세 사람은 굳은 표정을 보였다.
뱀파이어 로드의 강력함을 들었기에, 자신들이 힘을 합칠지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런데.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방금 들은 그대로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로만 드미트리가, 홀로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길을 여는 것입니다”
벤자민의 말.
당혹스러웠다.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있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생각을 내뱉기도 전에 카터가 끼어들었다.
“제가 보기엔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로 본인을 증명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기에, 세계 정부의 공격을 받지 않으려면 본인들의 힘을 증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로만 드미트리가 원하는 대로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승리한다면 LA는 평화를 되찾을 것이고, 패배한다면 힘이 빠진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절묘했다.
작전의 틀을 따르면서, 은근슬쩍 로만 드미트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불순한 의도가 있는 싸움.
카터가 내뱉은 말로 인해서, S등급 헌터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해질 때까지 상황을 지켜볼 것이다.
벤자민이 말했다.
“위험해진다면 당연히 도와야겠지만, 제가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는 허언을 내뱉을 존재가 아닙니다. 한번 믿어 보시죠.”
“……알겠습니다.”
장군과 S등급 헌터들.
서로를 존중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받아들였고, 예정대로 LA 대응팀은 병력을 이끌고 이동했다.
로만 드미트리와 박민우도 합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했고, 아름다웠던 도시는 이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멀리서 비명과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괴물들이 도시를 완전하게 장악해 버린다면, LA는 다시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도시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벤자민이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현재 LA에는 뱀파이어 로드에게 지배당한 수만 마리의 숙주가 존재합니다. 그들을 뚫고 현 위치에서 약 100km 정도를 들어가면, 위성으로 파악한 뱀파이어 로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저희가 길을 열겠습니다.”
“알겠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벤자민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병사들은 들어라. 극악무도한 몬스터들로 인해 LA 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구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고향인 이곳 LA는 완전히 파멸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LA를 시작으로 미국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목숨을 걸어라. 너희의 죽음을 이 나라가 기억할 것이며, 의미 있는 희생들이 모여 미국은 온전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는 후방에서 명령만 내리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직접 검을 뽑고 전방에 나섰다.
“전군 돌격! 나를 따르라!”
LA 토벌.
마침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병사들이 달려 나가기 직전.
박민우가 로만 드미트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황제 폐하. 제가 힘을 좀 써도 되겠습니까?”
박민우는 옹졸했다.
카터에게 개지랄을 떨어 놓고도, 카터를 비롯한 미국 병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곱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미국의 그 누구도 황제의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 님이라고 말하는 모습에, 박민우는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우릴 만만히 본다 이거지. 오냐, 내가 보여 주마. 대한제국의 힘은 99.99%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서 비롯되지만, 겨우 0.01%에 불과한 나조차도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추고 있는지를.’
생각할수록 X 같았다.
본인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는 그 누구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앞에서 건방을 떨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네 뜻대로 하거라.”
“알겠습니다. 제가 황제 폐하가 나아갈 길을 열겠습니다.”
허락을 받았다.
고삐가 풀렸다.
때마침 벤자민이 진격을 명령했다.
박민우는 그들을 뒤따라 걸어가며, 서클을 개방해 마력을 일으켰다.
‘개새끼들. 지금부터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마.’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강대한 마력.
박민우가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