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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30화 (530/615)

530화 태풍의 눈 (6)

전투 직전.

박민우는 시체 더미 위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았다.

마치 영화관에라도 온 것처럼, 잔뜩 상기된 얼굴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천마의 싸움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김판석일 때는 무지렁이에 불과한 평민이라 이런 기회가 존재하지 않았고, 알렉산드르일 때는 천마를 적대하는 상황이다 보니 감상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다.

참 가혹한 운명이었다. 항상 천마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우러러보았건만, 그의 삶에 천마의 곁은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천마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시체밖에 보이지 않는 이 자리가, 박민우에게는 영화관 VVIP 관람석이나 다름없었다.

몬스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얻은 기회다.

박민우의 눈빛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뱀파이어 로드는 단언컨대 새로운 등급 체계를 형성할 만한 괴물. 과연 황제 폐하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5분? 3분? 1분? 멍청한 미국놈들은 황제 폐하의 승리를 의심하고 있지만, 내가 경험한 이 세상의 기준은 황제 폐하에게 해당하지 않아.’

그때였다.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었다.

[심연의 왕인 내가 전력을 다해 주마.]

번뜩.

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난 공격이었다.

시작부터 뱀파이어 로드가 폭발적으로 마력을 분출하더니, 로만 드미트리를 단번에 찢어발기겠다는 듯이 거세게 몰아붙였다.

지켜보면서 입이 떡 벌어졌다. 뱀파이어 로드는 확실히 강력했다.

S등급 헌터 둘이 어째서 당했는지 알 것 같았고, 이번 대재앙이 마무리되면 뱀파이어 로드를 기준으로 SS등급이라는 새로운 등급 체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뿐.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상황에, 박민우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파악했다.

“역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멀쩡했다.

일부러 공격을 받아 주고도, 아무런 피해가 없는 모습으로 먼지구름 사이를 걸어 나왔다. 전율이 일었다. 이게 바로 로만 드미트리다.

백의의 마법사라는 평판을 내팽개칠 정도로, 중앙 정부고 뭐고 곧바로 노선을 바꾸어 버릴 정도로. 박민우가 돌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저 모습에 있었다.

김판석, 알렉산드르라는 두 번의 삶을 살아가며, 박민우는 단 한 번도 천마가 밀려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 강력한 마왕조차도.

천마에게 찢겨 나가지 않았던가.

그렇게 벅차오르던 감정은,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검법을 사용하는 순간 화룡점정(畫龍點睛)을 찍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크아아아악!]

콰콰쾅!

콰콰콰콰콰콱!

그대로 찢겨 나가는 뱀파이어 로드.

바람이 불었다.

거대한 육체가 바람을 타고 흩뿌려졌고, 그것은 마치 화장한 뼛가루를 바람에 날리는 듯이 한 생명의 목숨을 가혹하게 빼앗아 갔다.

뒤늦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박민우보다 큰 충격을 받았으나, 이 영광스러운 순간에 박민우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아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들이 보든 말든, 박민우는 본능적으로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마재림 만마앙복(天魔再臨 萬魔仰伏)! 천마재림 만마앙복!”

박민우의 목소리는 전장의 소음에 묻혔다.

확실한 건.

천마의 존재를 부르짖는 이 순간, 박민우는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는 충만함이 차올랐다.

* * *

일련의 상황.

박민우에게는 그래도 예상된 승리였다면, 뒤늦게 도착한 LA 대응팀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 일격에 뱀파이어 로드를 처리하다니.”

카터 대위.

그가 경악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박민우가 눈치챈 것처럼, 그는 마론교의 명령에 따라 의도적으로 병사들을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박민우와 로만 드미트리가 모든 위험을 떠안도록.

나중에 책임을 회피할 명분을 확보하는 선에서 의도를 드러냈는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일단 박민우.

그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적들도 그를 상대로는 의미가 없었고, S등급의 숙주를 가볍게 처리하는 등 마법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부터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박민우가 이렇게 강하다면 그가 모시는 로만 드미트리는 과연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초조한 마음이 점점 커지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의 일격에 뱀파이어 로드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단 일격.

허무한 승부였다.

LA를 무너트렸던, S등급 헌터 둘의 머리를 날려 버렸던 괴물.

뱀파이어 로드 하나를 쓰러트리겠다고 미국 전체가 들썩였건만, 그간의 행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결과였다.

뱀파이어 로드의 흔적이었던 것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터의 머릿속에 혼란이 일었다. 사실은 뱀파이어 로드가 약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건 절대 아니다.

LA 대응팀 소속으로서,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했던 두 명의 S등급 헌터는 미국을 대표하는 강자였다.

그렇다면.

진실은 명백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상식을 벗어났을 뿐이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카터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이게 말이 되는 일인 건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주변 사람들.

자신과 표정이 비슷했다.

다들 충격을 받았다.

말도 안 되는 현실에, 그들은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잘못 판단했구나.’

마론교가 대한민국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던 판단이, 오히려 로만 드미트리를 수식할 엄청난 업적을 만들어 주었다.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대한민국, 아니 대한제국의 이름이 세상을 강타할 것이다.

* * *

그 시각.

미국은 한참 수도 탈환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장과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미국 대통령은, 총사령관 로버트에게 강조하듯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수도를 탈환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이 지원군을 보내 주었다고는 하나, LA의 문제를 그들이 모두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안일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세상 그 누구도 타인의 문제를 본인의 문제처럼 생각해 주지 않는다. 만약 LA 토벌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우리는 더는 수도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겠다.”

툭.

통신을 끊었다.

다소 굳은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대자, 회의실 한편에 앉아 있는 국방장관이 말했다.

“조금 전. LA 대응팀에서 토벌 작전을 진행하겠다는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대한민국은 로만 드미트리와 백의의 마법사 외에 추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지만, LA 대응팀을 이끄는 벤자민 장군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믿어 보시지요. S등급 헌터를 세 명이나 보냈으니, 어쩌면 수도를 탈환하기 전에 LA의 문제가 먼저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그건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혼란한 세상.

미국 대통령은 진리를 깨달았다.

희망적인 일에 목을 매달다 보면, 희망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았을 때의 절망감은 대단했다.

그래서 항상 최악을 대비했다.

LA 토벌 실패.

수도 탈환의 지연.

미국 대통령이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대한민국의 합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로 시간을 버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만 한다. 물론 정말 LA 토벌에 성공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겠지만, 만약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실패를 미리 대비하고 있다면 우리는 직면한 위험을 헤쳐 나갈 수 있겠지. 중요한 것은 수도 탈환의 시점이다. 수도를 탈환하고 병력을 빠르게 재정비한다면, LA 대응팀이 시간을 버는 동안 우리는 추가 지원군을 편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쉽지 않을 겁니다. 망자를 부리는 데스 매지션(death magician)의 능력은 인류의 천적입니다.”

미지의 존재.

그를 데스 매지션이라 명명했다.

뱀파이어 로드는 숙주를 만들어 내는 데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면, 데스 매지션은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는 것만으로도 수천 명의 망자를 만들어 냈다.

많은 사람이 죽을수록. 상대해야 할 적도 많아졌다. 계속되는 전투로 데스 매지션을 궁지에 몰아넣고는 있으나, 그것이 하루 이틀로 끝날 문제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참담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믿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설령 최악의 상황이 닥칠지라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의지를 다졌다.

흔들림 없이 버텼다.

말하는 것밖에 없는 위치일지라도, 지휘 체계가 무너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알았다.

그간의 노력을 신뢰해야 할 때.

그것은 안일함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통신 요청이 들어왔다.

수도 탈환 소식을 기대했던 미국 대통령과 수뇌부들은, 예상치도 못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대통령님! LA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작전을 진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사람들의 표정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 * *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작전이 진행되고 1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벤자민 장군은 LA 탈환 소식을 알려 왔다.

미국 대통령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대한민국. 그들의 합류가 주요했습니다. 백의의 마법사가 길을 열었고, 로만 드미트리가 일격에 뱀파이어 로드를 처리했습니다. 사실 저도 이것이 현실인지 잘 믿기지 않습니다만, 분명히 S등급 헌터 둘의 머리를 날려 버렸던 뱀파이어 로드가 로만 드미트리의 일격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눈동자가 흔들렸다.

뱀파이어 로드.

등급 체계를 뒤바꿀 정도의 괴물이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희망을 건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렇게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표정이 굳었다.

이게 마냥 좋은 일일까?

LA 시민들을 구한 것은 다행이나, 이것이 앞으로 국제적으로 어떤 후폭풍을 일으킬지 미국 대통령은 단번에 파악했다. 그는 그렇게 타국을 위하는 사람이 아니다. 항상 미국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에게,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위험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벤자민 장군. 네가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는 어떤 인물이지?”

[……제 솔직한 생각을 묻는 것입니까?]

“그래, 솔직한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야, 미국은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할 수 있다.”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입니다. 뱀파이어 로드를 일격에 처리한 것만 보더라도,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상대할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문제는 그의 성향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하는 자리인데도 백의의 마법사 한 명만을 대동했고, LA 대응팀에 세 명의 S등급 헌터가 합류했는데도 혼자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강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간의 행보를 보았을 때, 적아를 구분함에 있어 어중간함이 없습니다.]

지난 통신.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 지원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새로이 시작할 것이라 말했다.

벤자민 장군의 생생한 증언을 들으니, 로만 드미트리의 그 발언이 그냥 내뱉은 게 아님을 알았다.

그때 이미.

로만 드미트리는 승리를 확신했다.

미국에 어떤 문제가 생겼든 본인이 해결할 수 있음을 알기에, 세계 제일의 강대국을 상대로도 거리낌 없이 본인의 생각을 말했다.

대체 어디에서 이런 인물이 나타났단 말인가. 모든 것이 미스터리이면서도, 로만 드미트리는 미국조차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알겠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으나, 대재앙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LA를 재정비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라. 후에 전쟁의 공로는 반드시 보상받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최선을 다해 LA를 수호하겠습니다.]

툭.

통신을 끊었다.

연락을 마무리한 미국 대통령과 수뇌부들은,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LA 토벌.

그 중심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대한제국은 단번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한 번의 전투로 자신을 증명해 냈고, 앞으로 국제법 위반과 관련한 문제들은 그와의 대립점을 만들 것이다.

그때.

미국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마론교는 로만 드미트리를 끌어들인 일만으로도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부분들을 고려하고도,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대국의 자존심, 마론교의 반발. 지금은 그딴 것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번 사건으로 미국이 확인한 진실은, 미국 전체가 감당하지 못한 문제를 로만 드미트리가 일격에 해결해 버렸다는 것. 그 사실 하나에 집중한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힘든 결정이었다.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은 현명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말했다.

“국무장관.”

“예.”

“지금 당장 공식적으로 발표하라. 대한민국의 도움으로…….”

말끝을 흐렸다.

현실을 인정할 거라면.

어중간하지 않게, 태도를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 대한제국의 도움으로 LA 탈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라.”

LA 탈환.

대한제국이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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