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전생의 흔적들 (1)
대재앙에도 끝은 있었다.
보스 몬스터가 죽으면서 몬스터들이 물러났고, 미국은 치열한 전투 끝에 데스 매지션을 처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때부터는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세계 각국은 단계적으로 대재앙을 정리해 나갔고, 세계 정부는 적색경보에서 이제는 안전 단계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10번의 대재앙.
드디어 그중 절반을 넘어서는 순간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열렬한 환호성을 보냈다.
끝이 보였다.
처음 대재앙을 맞닥트렸을 때는 10번의 지옥을 어떻게 감당할지 막막했는데, 이제는 인류에게 남은 시련보다 견뎌 낸 시련의 숫자가 많았다.
물론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6번째 대재앙은 주기가 길었던 만큼 미국조차도 휘청거릴 만큼 강하게 몰아쳤지만, 과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인류가 버텨 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런 와중에.
세계 각국이 집중보도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로 화제가 되었던, 바로 대한제국의 LA 탈환 사건이었다.
[잉글랜드 방송국]
“6번째 대재앙은 이전과는 다른 강도로 인류를 강타했습니다. 배 이상의 S등급 몬스터가 나타났으며, 특히 SS등급으로 추정되는 몬스터들의 출현은 군사 강국인 미국조차도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은 미국이 위기를 해결한 과정입니다. LA는 보스 몬스터로 인해 붕괴 직전까지 갔으나, 대한제국의 ‘로만 드미트리 황제’가 나타나 SS등급의 보스 몬스터를 일격에 처리했다고 합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잉글랜드 정부 또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지만, 현 상황에서는 미국의 공식 발표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대한제국에 모든 공을 떠넘기는 것은 미국에 득이 될 게 없습니다. 전부 사실이어야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행보는 충격적이었다.
미국조차 처리하지 못한 SS등급을 일격에 처리했다는 소식에, 전 세계 사람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스페인 방송국]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사항이라고는 하나, 이건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S등급의 엘리멘탈 골렘을 처리하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습니까. 그런데 미국 정부는 겨우 단 한 명의 인물이 SS등급 몬스터를 일격에 처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목격했던 순간들이 미국 정부의 발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러시아 방송국]
“우리는 미국의 발표를 믿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등 처벌받아 마땅하기에, 미국 정부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지 않습니까. 국제기구가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까지, 러시아는 상황을 관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국의 방송 관계자들.
그들이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일부는 미국 정부를 신뢰했으나, 일부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실 어느 쪽도 비난할 수는 없었다.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이기에 믿는 것도 당연했고,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너무나 비상식적이기에 신뢰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대재앙으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와중에도,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는 전 세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사람들은 말했다.
국제기구.
전 세계가 힘을 합쳐 창설한 국제 헌터 협회.
등급을 책정하는 등 중립적인 일을 도맡는 그들이, 이번 사건을 확실히 확인해 주기 전까지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혼란이 정리되는 시기.
사람들의 관심은 국제 헌터 협회에 집중되었다.
* * *
대재앙 직후.
제일 바쁜 집단을 묻는다면, 모두가 국제 헌터 협회를 말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재앙은 매번 새로운 위험을 선사했고, 그때마다 국제 헌터 협회는 몬스터들의 등급 체계를 정리하는 등 사람들의 의문을 해소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번 대재앙의 경우에는 SS등급으로 추정되는 몬스터가 무려 두 마리나 나타났다.
그들로서는 곧바로 미국에 파견 인원을 보냈고, 세상이 로만 드미트리로 들썩이는 동안 증거 자료들을 확인하며 골머리를 앓았다.
수차례 반복된 회의.
이탈리아 출신 협회장이 보는 앞에서, 연구원들이 저마다의 결론을 말했다.
“5번의 대재앙이 반복되며 협회에서는 S등급에 부합하는 기준을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에 나타난 데스 매지션과 뱀파이어 로드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S등급의 기준을 넘어섰습니다. 개개인의 무력이 S등급 헌터를 압도하는 수준인 데다, 그들은 머릿수로도 상당한 우위를 보이는 특별한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SS등급으로 책정하고, 앞으로 나타날 미지의 존재들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합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동안 나타났던 그 어떤 몬스터도 데스 매지션과 뱀파이어 로드처럼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이는 대재앙의 강도가 앞으로도 점점 심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는 SS등급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조사 결과.
연구원들은 참담한 진실을 목격했다.
SS등급 몬스터들은 정말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것은 새로운 기준으로만 평가할 수 있었다.
협회장이 말했다.
“사실 이번 등급 책정은 결과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두 괴물이 보여 준 행보는 스스로가 새로운 등급임을 증명해 냈다. 문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국제 헌터 협회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우리는 ‘뱀파이어 로드’를 규격 외의 존재로 인정하고, 그가 바로 6번째 대재앙의 보스 몬스터라고 선포했다. 그런 괴물을 로만 드미트리가 일격에 처리했다면, SS등급만으로는 로만 드미트리의 현재 위치를 설명할 수 없다.”
연구원들이 직면한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
등급 책정이 난관에 부딪혔다.
몬스터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들도 등급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도 연구원들의 조사 대상으로 올랐는데, 조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연구원들은 난색을 보였다.
데스 매지션과 뱀파이어 로드는 미국을 초토화했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실력자들을 내세워 몰아붙였는데도, 그들은 오히려 S등급 헌터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압도적이었다.
새로운 등급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파괴력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진실을 의심했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국제 헌터 협회는, 현장을 수차례 확인한 결과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연구원이 말했다.
“첫 회의가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문제는 단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뱀파이어 로드를 일격에 처리한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은 등급으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저희로서는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며, 당장 발표해야 한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수많은 자료를 취급하는 연구원들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미스터리한 존재였다.
“등급 외 존재. 로만 드미트리의 현재를 평가할 수 없기에, 그를 초월(超越) 등급이라 명명하고 명확히 파악되기 전까지 논외로 취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 *
국제 헌터 협회의 발표.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가 진실임을 증명함과 동시에, 협회장이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는 발언을 내뱉었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를 SSS등급으로 구분한다면, 협회로서는 손쉽게 로만 드미트리의 현 위치를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조사한 바에 따르면 로만 드미트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SS등급의 뱀파이어 로드와 로만 드미트리. 두 존재 사이에 몇 단계의 차이가 있는지 파악되지 않기에, 협회에서는 로만 드미트리를 등급 외의 존재. 초월 등급의 헌터라 명명하겠습니다.”
난리가 났다.
대한제국이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만약 일반 헌터였다면, 세계 각국에서 그를 영입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에 빠진 사이, 로만 드미트리는 한 나라를 짊어지는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는 국가 간의 영역. 사람들로서는 혼란스러웠다.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국제법을 어긴 일 등은, 로만 드미트리의 명성과는 별개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뜨거운 감자였다.
모두가 그에 대해 말했고, 세계 정부가 대한제국을 어떻게 처벌할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 무렵.
미국의 마론교.
카터 대위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한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만한 괴물이라면, 아무리 방해해도 저지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겠지.”
마론교의 신전.
넓은 복도 양쪽으로는 신도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로브를 푹 눌러썼는데, 마론교의 교주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성서에서 말하길,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그분은 본인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분을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섬긴다면 그분 또한 진심을 보여 주지만, 조금의 적의라도 보이는 순간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이다. 성서의 내용이 그를 증명한다. 인간, 몬스터, 악마들. 수많은 존재가 그분에게 적의를 드러냈고, 그들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모조리 죽었다.”
“아아.”
“옳습니다.”
신도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분.
마론교의 토대가 되는 차원 너머의 존재.
교주가 강렬한 눈빛을 보였다.
“마론 님은 반드시 현세에 강림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어리석은 존재들을 내버려 둔다면, 마론 님의 분노는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진실을 직시하라. 사탄의 목소리에 현혹되지 마라. 마론 님만이 세상을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이며, 그분의 강림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마론 님이시여!”
“믿습니다! 저희에게 나아갈 길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각국의 주요 인사다.
마론교는 본인들이 진짜임을 이미 수십 년 동안 증명해 왔고, 세계 각지에 뿌리를 내려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강하다. 국제 헌터 협회에도 마론교를 믿는 신도들이 존재하고, 신도들이 직접 확인한 결과 로만 드미트리에 관한 모든 소문이 진실임이 확인되었다. 나는 이것이 신의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 이때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고 생각하나. 마론 님이 살아가는 세상에 악마들이 나타났던 것처럼, 이 또한 그분이 강림하기 전에 인류가 경험하는 시련의 한 종류일 뿐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 괴물을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는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형제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집단의 힘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무너트릴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마론교의 교주는 해결할 방법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조만간 국제회의를 개최할 것이다. 전 세계 교도들에게 전하라. 로만 드미트리의 국제법 위반, 대한제국의 국호 문제 등을 논의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를 스스로 황제라고 명명한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 * *
모두가 떠난 자리.
교주가 홀로 걸음을 옮겼다.
매일 마론교의 신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신전 깊숙이, 교주 외에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존재했다.
끼익.
문을 열었다.
성역에 발을 들인 교주는, 조금 전에 있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로만 드미트리. 그 존재가 나타난 타이밍이 매우 공교롭다. 곧 마론 님을 모실 준비를 끝내 가는 이 상황에,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 존재가 나타나다니. 이는 사탄의 수작질이 분명하다. 그에게 현혹되어 눈과 귀가 멀어 버리는 순간, 인류는 파멸의 길에 빠져들고 말겠지.’
마론교.
수십 년간 그분의 강림을 준비해 왔다.
고지를 목전에 두었건만, 로만 드미트리라는 파멸적인 존재의 등장은 불길한 상상을 자극시켰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을 도와 인류를 구해 주었다.
하지만 성서에서 말하는 그분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이는 미래에 그분의 심기를 자극하는 신의 장난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만약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인정받는다면. 그분은 같은 하늘 아래에, 본인을 제외한 다른 황제의 존재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앞에.
마론교의 토대가 되었던 성서가 있었다.
신앙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성서의 겉표지에는, 다른 차원의 언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대한 영웅의 업적을 기리며.]
성서의 제목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저자(著者), 헨리 앨버트]
성서를 기록한 존재.
이 세상에 마론교를 선사한, 위대한 인물의 이름도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