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전생의 흔적들 (2)
때는 30년 전.
마론교 교주가 아닌 세바스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사내는, 정말 소름 돋는 광경을 목격했다.
툭.
“으악?!”
화들짝 놀랐다.
눈앞에 갑작스럽게 책 한 권이 떨어졌다.
그게 무슨 특별한 일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세바스찬은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휑한 공간에는 책이 떨어질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고,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방금 목격한 사실이 달려지지는 않았다.
책을 챙겼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고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한다.”
세상에 알릴 수는 없었다.
세바스찬은 논리적인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목격한 광경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책의 존재를 증명할 과학적인 근거가 없지 않은가.
단순하게 본인의 경험으로 이 책의 특별함을 주장한다면, 정신병동에 입원해 중얼거리는 사람들과 자신이 다를 게 없었다.
결국.
책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가 가장 컸고, 책의 겉표지를 확인하는 순간 흥미가 동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혀 새로운 언어 체계야. 설마 외계인의 언어인 건가.”
공교롭게도 세바스찬은 언어학자였다.
언어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었고, 책에 적힌 생소한 언어에 세바스찬은 그날부터 책의 언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실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는 매우 심오한 학문이고, 수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더라도 완벽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지막 파트.
그곳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세바스찬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무슨.”
마지막 파트 이전.
책은 무언가를 장황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것의 내용은 아직 파악할 수 없었는데, 마지막 파트는 마치 언어 체계를 설명하듯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책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때부터는 책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마지막 파트의 내용을 곱씹으면서 언어의 체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세바스찬에게는 유능한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도 되었지만, 이 책만큼은 온전히 본인의 업적으로 남기를 바랐다.
1년.
2년.
3년.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설명이 첨부되었더라도 언어를 해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차곡차곡 세월이 쌓여 가면서 세바스찬의 눈에 뜨문뜨문 문장들이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다.
책 안에.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 * *
책의 제목.
[위대한 영웅의 업적을 기리며.]
가슴이 웅장해지는 제목이었다.
문장이 해석되기 시작하면서, 세바스찬은 빛처럼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책의 내용을 읽어 갔다.
‘저자, 헨리 앨버트.’
사락.
책장을 넘겼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세바스찬의 세월이 녹아들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샐러맨더 대륙에는 위대한 영웅이 존재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나 또한 위대한 영웅의 일대기를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분에 대한 기록을 책으로나마 남기고자 한다.]
사락.
[그분은 드미트리 남작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북쪽 일대에서는 나름대로 알아주는 가문이었지만, 카이로 자체가 약소국이었기에 그 누구도 그분의 행보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영웅의 행보가 시작되었던 것이. 그분은 자신의 영지민을 핍박하는 블러드 팽을 토벌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락.
[카이로의 내란. 베네딕트 후작의 사람들이 모조리 죽었다. 실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다니엘 카이로 국왕은 내란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분을 믿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반란 세력을 정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날, 피가 강이 되어 흘렀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남부 전선에서도 증명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때의 전투로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명확하게 알았다. 적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는 존재. 바르코가 하루아침에 멸망했던 것처럼, 그분을 적대하는 순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불가능…….]
사락.
[그 누가 알았겠는가. 변방 출신의 장남이, 대륙의 양대산맥인 발할라와 크로노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할 줄은. 나는 그분을 굳게 믿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그분의 행보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결과로 증명해 냈다. 발할라 황제의 머리를 베어 버리며 세상에 진실을 밝혔고…….]
사락.
[알렉산드르 황제. 과거의 명령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때의 우리는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마계! 마계의 악마들이 세상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인간들은 멸망을 코앞에 두었고, 알렉산드르 황제의 죽음으로는 세상에 평화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마계로 직접 넘어가 그곳을 정벌하겠다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세바스찬의 얼굴에 주름이 늘어 갔다.
처음에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알아간다고 생각했으나, 세바스찬은 점점 책의 내용을 판타지 소설처럼 받아들였다. 말이 되지 않았다.
책이 말하는 세상에는 마법과 오라가 존재하고, 몬스터와 악마가 나타나 사람들을 죽인다는 사실이.
무려 10년에 달하는 시간이 흘러서야, 세바스찬은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모두 그분의 업적이었으나, 그분은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그분의 일대기를 책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단순히 위대한 업적을 추억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성녀가 말하길, 그분은 차원 너머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했다. 나 헨리 앨버트는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차원 너머에 뿌릴 것이며, 누구라도 이 책의 내용을 확인한다면 명심하라. 그 세상에 그분이 존재한다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라. 그분의 울타리에 들어간다면 완전한 평화를 허락받으나, 그분을 적대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를 간곡하게 부탁하겠다.]
책 너머.
누군가에게 말했다.
헨리 앨버트의 펜이, 글자를 깊숙이 박아 넣으며 모두의 뜻을 전했다.
[이 책을 매개체로 우리를 그쪽 세상으로 인도해다오.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추억하고 있으며, 그분의 백성이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이름은…….]
마지막.
가장 중요한 부분을 확인하는 순간, 세바스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대한 영웅 #[email protected]#@#$#@$다.]
그분의 이름.
그것이 훼손되어 있었다.
* * *
10년의 세월.
허망했다.
세바스찬은 그분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고, 사실 알아냈다 하더라도 이건 잘 짜인 판타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세상을 열광시켰던 소설도 작가가 언어 체계를 직접 구성한 것으로 유명했다.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책이 나타난 것은 분명히 특별한 무언가가 있음을 증명하지만, 그것 또한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본인이 확인한 것이 진실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책을 들고 길거리를 나섰다.
동료 언어학자들에게 이것을 공개해서, 10년의 세월이 그래도 의미가 없지는 않았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때.
콰르르르르르르릉.
[인간들은 들어라.]
대재앙.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절대자가 나타나 세상의 기준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첫 번째 대재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다.
세바스찬은 책을 꼭 품은 채로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그때만 해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인류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경험해야 하는지. 20년 전의 현대 사회는, 대재앙을 직접 경험하고도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존재들이 나타났다.
헌터라고 불리게 될 각성자들, 그중에서도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전승자와 선택받은 자들.
세상이 격변했다.
새로운 체계가 생겨나는 그 순간에, 세바스찬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저는 드미트리의 섬광(閃光), 크리스의 능력을 물려받았습니다.”
전승자.
그들이 새로운 힘에 대해 말했다.
현재 스페인의 S등급 헌터인 사무엘은,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서 본인의 힘이 ‘크리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문제는 세바스찬은 크리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헨리 앨버트가 기록한 일대기에는 그분을 따르는 존재로 드미트리의 섬광 크리스와 드미트리의 악귀 케빈 등 여러 인물을 거론했고, 사무엘이 전투하는 영상을 확인하자 이게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속속들이 나타나는 드미트리의 전승자들.
대부분이 일반 병사에 불과했으나, 그들의 존재는 ‘드미트리’가 가상의 세계가 아님을 증명했다.
소름이 돋았다.
멍한 눈빛으로 책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게 전부 사실이었어?”
헨리 앨버트의 기록.
그분의 존재.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게 전부 우연일까?
대재앙이 들이닥치기 10년 전에 자신에게 이 책이 주어졌고, 자신이 모두 해독을 끝낸 순간에 대재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책을 얻은 자신은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퍼즐이 딱딱 맞았다.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세바스찬은 무교가 아닌 불신론자였건만, 충만하게 차오르는 감정에 신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 신이시여.”
책은.
아니, 성서는 말했다.
그분은 알렉산드르 황제라는 과거의 명령이 대륙 정벌을 도모했을 때, 인류를 하나로 만들어 알렉산드르를 물리쳤다.
그리고 세상에 마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는. 과감하게 마계의 영역으로 쳐들어가, 인간의 힘으로 허락되지 않는 마계 정벌이라는 불가능한 업적을 이루어 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절대자를 처리하는 일.
그분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라면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구해 줄 것이다.
믿음이 차올랐다.
맹목적으로 믿었다.
문제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이 세상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의 이름이 필요했다.
* * *
처음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미 훼손되어 버렸으니까.
그런데 황당하게도, 새로운 세상은 세바스찬에게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복구 마법이라면 가능합니다.”
마법사들.
그들은 특별한 능력을 발현했다.
단순히 불과 바람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마법’이라는 단어 하나로 해결해 버렸다.
복구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바스찬은 그에게 당장 복구 마법을 부탁했고, 마법사는 성서를 눈앞에 두고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화아아아악.
마력이 일어났다.
마법사가 땀을 흘려 댔다.
아직 대재앙 초기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던 마법사는, 글자 몇 개를 복구하는데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세바스찬에게는, 시간이 아예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똑딱똑딱.
초침이 움직였다.
1분, 2분, 3분.
그렇게 5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훼손되었던 글자들이 마법사의 마력에 반응했다.
두웅.
글자들이 허공에 떠올렸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뒤얽히더니, 세찬 빛을 동반함과 동시에 제자리를 잡았다.
팟.
번뜩.
세상이 밝아졌다.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빛이 모두 가라앉았을 때, 세바스찬은 인류의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순간을 목격했다.
“아아.”
이름이 복구되었다.
위대한 영웅.
헨리 앨버트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류 전체가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그 이름.
“마론 님이시여!”
로만(ROMAN)이 아닌.
마론(MARON) 드미트리.
세바스찬이 성서를 향해 넙죽 엎드렸다.
앞으로 20년간 세상을 지탱할, 인류의 희망인 마론 드미트리를 모시는 마론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