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화 전생의 흔적들 (3)
지난 20년.
마론교는 어떻게 세계 제일의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처음 시작은 미약했다.
세바스찬은 성서를 기반으로 마론 드미트리의 강림이 이 세상을 구해 줄 것이라 말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개소리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대재앙을 명확하게 정의하지도 못한 시점에, 존재조차 증명되지 않은 인물을 모시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모두가 외면했다.
사람들은 세바스찬을 정신병자라 비난했고, 어떤 이들은 인간들의 혼란을 이용하려는 극악무도한 사기꾼이라고 말했다.
답답했다.
어째서 진실을 알아주지 않는단 말인가.
계속되는 외면에, 세바스찬은 방법을 바꾸었다.
“성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드미트리의 섬광 크리스, 드미트리의 악귀 케빈, 피닉스(phoenix)의 마탑주 펠릭스, 헥토르의 별 에드윈 헥토르 등등. 드미트리 제국을 구성하는 인물들 전부는, 모두 마론 드미트리 님의 은총을 받아 그만한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요. 이게 일반적인 인간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케빈은 빈민가 소년에 불과했으나, 훗날 크리스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검사로 성장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읊었다.
물론 당시에는 특별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크리스를 비롯한 드미트리의 전승자들이 몇몇 존재하기는 했으나, 이미 그들이 공개한 정보를 기반으로 소설을 쓴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농사였다. 세바스찬은 드미트리의 전승자들이 현생에 연결되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씨를 뿌리듯이 앞으로 나타날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전승자들이 차례로 나타나면서, 세바스찬의 말이 진실임이 확인되었다.
상황이 반전되었다.
사람들이 세바스찬을 찬양했다.
전승자의 기억에 ‘황제’의 존재는 항상 미스터리였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마론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가장 각광받는 전승 능력인 드미트리의 주체였다.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희망이 필요했다. 세바스찬의 발언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고, 사람들이 마론교로 몰려들어 고개를 조아렸다.
마론교의 번성.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순간이었다.
마론교는 급격하게 몸집을 부풀렸고, 대재앙을 연구하는 단체도 설립하면서 사람들의 신뢰를 받았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마론교를 따랐으며, 만약 세바스찬이 마론 드미트리의 강림일을 정확히 특정했다면 더 많은 세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약 10년 전.
몇몇 사람들이 의문을 보였다.
대재앙이 수차례 반복되는 동안, 인류를 구원해 주겠다던 마론 드미트리는 코빼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의 광기가 잦아들었다.
그들은 구원이 필요했다. 세바스찬의 말이 사실이라면 언제 강림하는지, 그분은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지.
실질적인 희망을 말해 주어야 하건만, 세바스찬은 성서를 기준으로 해서 조금의 거짓이나 과장을 보태지 않았다.
미정(未定).
모든 것은 확정적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마론교는 믿는 사람들은 믿는,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예 부정해 버리는 존재로 남았다.
미국인 5명 중 1명은 마론교라는 말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세력이었으나, 초창기의 영광에 비하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분의 존재.
강림의 날짜.
세바스찬의 숙제였다.
이름은 알아냈다고는 하나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고, 세바스찬은 드미트리의 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세계 어디든 곧바로 찾아갔다.
마론 드미트리, 조나단 드미트리, 벨라미 드미트리, 로만 드미트리, 요셉 드미트리 등등. 온갖 드미트리들이 나타났다.
드미트리의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드미트리의 이름을 내걸고 다니는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 나타났다.
그들 모두.
거짓이었다.
사칭에 불과했고, 세월이 흐르며 세바스찬은 점점 저급한 거짓말들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드미트리를 구분하기 위해, 기존에 드미트리를 쓰던 사람들의 이름을 바꾸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덕분에 사칭은 많이 줄어들었다.
드미트리를 사용하면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을 받기에, 정말 제대로 사기를 칠 생각이 아니라면 ‘드미트리의 성’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바스찬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마론 드미트리의 흔적이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성서의 내용 중 하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다.
[그 세상에 그분이 존재한다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라.]
존재 여부.
확실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
마론 드미트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 *
막막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세바스찬은 성서를 펴 놓고는 며칠 내내 고민에 빠졌다.
성서의 존재.
이것은 신의 뜻이다.
자신을 대리인 삼아 인류를 구출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일개 언어학자에 불과했던 세바스찬의 어깨에는 인류라는 무거운 짐이 짊어져 있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인해, 문제를 해결할 근거를 확보하고도 멍청하게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그때.
마론교를 따르는 한 마법사가 말했다.
“교주님. 제가 터득한 마법 중에 상대를 제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마법이 있습니다. 만약 ‘그분의 소지품’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분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으로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머리가 번뜩였다.
하늘에서 빛줄기가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물론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그분의 소지품을 확보해서 불러들인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에게는 성서가 있었다.
성서를 기록한 헨리 앨버트라는 존재는, 마론 드미트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인물이 분명했다.
‘성서가 말하는 세상.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을 이 세상으로 불러들인다면, 그들을 통해 마론 드미트리님의 소지품을 확보할 수 있어. 이거야. 성서의 존재 자체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었어.’
10년 전 그때부터.
마론교는 차원 이동 마법을 연구했다.
단순히 소지품을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차원 너머의 존재를 불러들일 수 없기에, 헨리 앨버트의 소환이라는 1단계를 통과하기 위해서라도 마법적인 발전이 필요했다.
일련의 상황에 세바스찬은 조금도 의구심을 보이지 않았다.
성서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마론교를 설립한 지금까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들 모두가 신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날.
세바스찬은 교도들에게 말했다.
“신의 뜻을 믿어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우연은 그분으로부터 비롯되며, 우리가 성서를 손에 넣은 순간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다. 곧 때가 올 것이다. 그분이 살아가던 세상을 우리가 눈앞에 마주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분의 강림을 이루어 낼 것이다.”
스스로 다짐했다.
반드시 강림을 성공시키겠다고.
이 세상을.
전 인류를 구원해 내기 위해서.
* * *
그리고 현재.
세바스찬은 조심스럽게 성서의 책장을 넘겼다.
이미 수만 번도 넘게 읽은 내용이지만, 심적으로 복잡할 때마다 이렇게 성서를 다시 한번 읽었다.
로만 드미트리.
마론 드미트리.
사실 애너그램(anagram)과 같은 유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만약 스스로를 드미트리라고 밝힌 사기꾼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바스찬은 분명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성서의 그분이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고 확신하기에, 로만 드미트리를 동일 인물이라 보지 않았다.
과격한 행보를 보고도.
성서에 나온 성향과 비슷한데도.
세바스찬은 눈앞의 진실을 보지 못했다.
성서를 처음 접한 순간이 30년 전이었기에, 시간의 괴리는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인류에겐 안타까운 일이었다.
성서를 복구한 마법사.
그의 실력이 조금만 좋았더라면, 성서에 생겨난 글자는 분명히 로만(ROMAN)을 말했을 것이다.
세바스찬이 성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믿고 20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30년의 세월이겠지요. 제 머릿속에 존재하는 당신은 흑발을 휘날리며 세상을 통치하는, 그야말로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존재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강림하는 순간 인류는 모든 짐을 당신에게 떠넘기고, 성서를 기록한 헨리 앨버트가 살아가는 세상처럼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겠지요.”
그날을.
수도 없이 되새겼다.
어느 날은 그분의 존재가 선명하게 떠오르다가도, 어느 날은 존재 자체가 흐릿해졌다.
지난 30년의 세월을 살아가며, 수많은 신도를 다스리는 세바스찬은 혼자만의 고통을 삼켜 냈다.
“이 미천한 종은 당신 외에 그 누구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스스로 황제라고 부르는 존재도, 곧 내부에서부터 그를 무너트려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계획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강림했을 때, 이 세상은 온전히 당신의 것일 겁니다. 그러니 절대 제 기대를 저버리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마론 님은. 반드시 절대자를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강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광기(狂氣)였다.
세월의 흐름이 보이는 세바스찬의 얼굴에는, 그분에 대한 강렬한 집념이 보였다.
“그것만이 제가 바라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10년 전 그날처럼.
세바스찬은 다짐했다.
강림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그리고 그분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들이라면, 그 상대가 누구라도 전부 쓸어버릴 것이다.
중국의 황제든.
SS등급을 일격에 찢어발긴 로만 드미트리든.
그분의 걸림돌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미국에서 국제회의가 진행되었다.
안건은 바로 대한민국의 국호 변경,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의 국제법 위반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 대통령.
마르코프가 말했다.
“저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죄를 물을지 말지를 논의하다니요. 로만 드미트리는 국제법을 위반했고, 그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게다가 부당한 방법으로 한 나라를 찬탈하고서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국제법을 위반한 로만 드미트리를 얼마나 강하게 처벌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
세계를 대표하는 강대국 중 하나다.
마르코프는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불편함을 느꼈고, 회의 자리에서 그 생각을 거침없이 밝혔다.
미국 대통령, 존 해리슨이 말했다.
“마르코프 대통령님의 뜻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김정태 대통령의 독재 정치로 인해서, 해당 국가의 국민들이 상당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증거로 로만 드미트리가 반란을 일으킬 당시 지방 정부 대부분이 반란 세력을 지지했으며, 중앙 정부를 무너트린 이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본인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국제법 위반은 잘못된 부분이 맞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부터 썩어들어 가는 상황에, 그들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국제법 위반이 타당하다는 말입니까?”
“예외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며칠 전.
미국 정부는 격렬한 내부 회의를 진행했다.
국제회의에서 어떤 입장을 표명하느냐의 싸움이었는데, 마론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로만 드미트리의 처벌을 주장했다.
하지만 존 해리슨은 그들의 판단을 따를 수 없었다.
만약 대세가 그러해서 세계 정부가 결정을 내린다면 모르겠지만, 절대 미국이 총대를 멜 수는 없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 때문이었다.
아무리 전 세계가 힘을 합친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준 단편적인 모습조차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대한민국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그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국호 변경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발 뺐다.
몸을 사렸다.
존 해리슨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프랑스와 브라질 대통령이 말했다.
“그건 너무 무책임한 말씀입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니요. 국제법은 그 어떠한 상황에도 예외가 없기에,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엄격하게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라는 예외를 허락한다면 세상은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합니다.”
“설마 로만 드미트리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LA를 도와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겠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SS등급 몬스터를 처리할 만큼 강할지라도 이 세상에는 규율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강하다고 해서 규율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두 인물.
대표적인 마론교의 신봉자였다.
호전적인 성향의 마르코프가 말할 때는 조용히 동조하다가, 존 해리슨이 반대 의견을 보이자 격렬하게 비난했다.
두 인물뿐만 아니라 마론교와 관련된 지도자들은 모두 특명을 받았다.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의 처벌을 끌어내라는 특명.
이 자리 자체가 세바스찬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존 해리슨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마론교.
참 애매한 존재였다.
그들은 세상을 위한 일을 행하나, 이처럼 과하게 행동하는 면도 있었다.
‘사실 국제법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납득하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겠지. 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은 로만 드미트리의 성향이다. 그는 처벌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을 확률이 높다.’
회의장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반발하니, 존 해리슨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동안 국제법 처벌을 주도해 왔던 존재가 미국이었기에, 이 이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존 해리슨이 바랐던 것은 책임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포지션. 적어도 이번 사건은 러시아와 마론교 신봉자들이 주도하는 판이 되었다.
그때였다.
브라질 대통령이, 힘을 보태라는 듯이 한 존재를 거론했다.
“왕위룡 주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선이 집중되었다.
중국 또한.
세계를 대표하는 강대국이다.
사람들은 아직 왕위룡 주석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들마저도 로만 드미트리를 처벌하자는 쪽으로 힘을 싣는다면 대세를 뒤엎지는 못할 것이다.
마론교가 손을 쓴 순간부터 정해진 순서였다. 마론교는 세상 곳곳에 뿌리를 내렸고, 그들이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루어 냈다.
게다가.
중국은 호시탐탐 대한민국을 노려 왔다.
그들로서는 이번 일에 동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저는 대한민국의 선택을 이해합니다.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예상외의 답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왕위룡 주석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