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화 전생의 흔적들 (4)
중국의 결정.
그 이유는 얼마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6번째 대재앙에서 중국은 비교적 안전한 상황이었는데, 대한민국의 김정태 대통령으로부터 연합 제안을 받았다.
같이 북한을 토벌하는 대가로 반란을 정리해 달라는 제안. 사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연합처럼 보이나, 이것이 속국(屬國)으로 전락하는 계기임을 서로 모르지 않았다.
중국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왕위룡 주석의 명령에, 검귀 샤오룽을 필두로 한 병력이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황제 폐하. 드디어 대국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북한과 대한민국은 항상 눈엣가시였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국정에 간섭한다면 그들은 금방 ‘대국의 신하’를 자처할 것입니다.”
“멍청한 녀석들. 순간의 위기를 버티지 못해 나라 전체를 팔아먹다니.”
왕위룡이 웃음을 보였다.
북한과 대한민국.
수하의 말처럼 눈엣가시였다.
북한에서부터 밀려오는 몬스터들 때문에 중국은 매년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중국을 끌어내리려는 나라들이 많다. 무모하게 병력을 손실시킬 수 없었고, 북한 너머에 존재하는 대한민국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함을 선사했다.
북한부터 대한민국까지를 중국의 영토로 만든다면 대륙 정벌의 초석을 쌓을 수 있건만, 세계 정부가 사사건건 간섭하는 바람에 그동안은 대놓고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정태 대통령이 손을 내민 순간부터, 중국은 대한민국 국정에 관여해도 된다는 명분을 얻었다.
“대한민국은 대륙 정벌을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 나는 세상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황제로서, 전 세계를 정벌해 중국을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국가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선조들이 항상 바라 왔던 열망이며, 역사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웅들조차 실패했던 업적이 나로 인해 완성될 것이다.”
“아아!”
“황제 폐하시여! 세상을 통치하십시오!”
수하들이 열광했다.
왕위룡은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자신을 우러러보는 열망의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던 날.
대륙 정벌을 마음에 품었다.
모든 것은 천명(天命)이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자신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할 위대한 영웅이라고 확신했다.
“그래, 나는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때가 되었다.
앞으로 머지않아 세상을 발아래에 두고 군림할 것이며, 대한민국으로 보낸 샤오룽은 대륙 정벌의 초석을 쌓을 승전보를 가져올 것이다.
그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S등급 몬스터를 처리했다고는 하나, 검귀라는 명성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강력한 무력을 갖추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 샤오룽이 복귀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왕위룡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자신의 명령을 완벽하게 이행했다기에는, 샤오룽은 너무 이른 시기에 중국으로의 복귀를 택했다.
* * *
샤오룽이 무릎을 꿇었다.
죄인의 얼굴로 상황을 말했다.
“……죄송합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단순히 강했다면, 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대국의 저력을 증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친위대를 일격에 처리해 버린 로만 드미트리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가짜가 아닌 ‘진짜 무공’을 사용했습니다. 그 사실을 황제 폐하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저는 현실에 타협하고 본국으로의 복귀를 택했습니다.”
순간.
왕위룡의 표정이 굳었다.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진짜 무공은 중국의 뿌리를 말하는 것이며,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외국인에게 허락되는 영역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샤오룽은 이번 일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왕위룡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사용한 무공은 충격적일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감히 저조차도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대한민국의 친위대장은 S등급인데도 단 일격을 버텨 내질 못했습니다. 황제 폐하. 로만 드미트리는 대국에 뿌리를 내린 ‘무언가’를 얻은 것이 분명합니다.”
“……네 말에 목숨을 걸 수 있나.”
“예. 제 목을 걸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장되었던 무림의 뜻을 받아들인 존재가 분명합니다.”
충격적이었다.
만약 상대가 샤오룽이 아니었다면, 왕위룡은 절대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샤오룽은.
거짓을 말하거나 과장을 보탤 인물이 아니다.
왕위룡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 큰 공을 세웠고,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며 대륙 정벌이라는 같은 꿈을 꾸었다.
샤오룽이기에 믿을 수 있었다. 그가 보고 들은 것들이 전부 진실이라면, 대한민국이고 뭐고 간에 일단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왕위룡이 소리쳤다.
“지금 당장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모든 자료를 가져와라. 그의 과거, 그의 행보, 그리고 그가 전투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들. 내가 직접 확인하고, 로만 드미트리에 관해 판단을 내릴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세상이 대재앙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중국은 로만 드미트리에 집중했다.
정보부 전체가 나서서 자료를 확보했고, 그중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전투를 치르는 영상도 있었다.
왕위룡은 영상을 확인했다.
친위대장과 로만 드미트리.
둘이 격돌하는 상황을 확인하는 순간, 왕위룡은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콰앙!]
[콰콰콰콰콰콰콱!]
일격에 쓸려 갔다.
일반 사람들은 단순하게 파괴적이라고 감탄할 상황에, 왕위룡은 감히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무공의 체계를 보았다.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스스로를 무림의 희망이라고 표현하는 왕위룡조차도, 로만 드미트리가 사용하는 무공의 심오함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영상에 빠져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왕위룡이, 영상에서 시선을 떼더니 자신을 우러러보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모두 물러나라.”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수하들이 물러났다.
왕위룡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비밀 공간.
그곳엔 벽화가 있었다.
거대한 벽화에는 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모습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왕위룡을 탄생시킨 무공의 근간이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10년 전.
왕위룡은 갑작스럽게 나타나 분열된 중국을 통일시켰다.
사람들은 그의 존재가 느닷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왕위룡은 수많은 역경을 이겨 냈다.
오랜 옛날.
중국에는 무림이 존재했다.
무림은 황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번성했고, 무림인들의 강력한 힘에 불안함을 느낀 황제는 무림인 말살 정책을 계획했다.
그렇게 무림은 멸망하고 말았다.
무림을 정벌한 천마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계획이 번번이 실패했지만, 그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황제는 무림을 분열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무공을 찢어발겼다.
다시는 위험한 힘에 손대지 못하도록 근간을 무너트렸다.
무림의 후예들은 세계 각지로 찢겨 나갔고, 세월이 흐르며 무림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잊혀 갔다.
왕위룡과 샤오룽.
모두 무림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무림의 명맥을 이어 왔지만, 현대의 사람들이 무공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에 기록되었던 것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무림이 멸망하면서 무공의 근간을 잃었다. 무림인들이 쌓아 온 세월이 증발하는 순간이었고, 현대 사회가 발전하면서 자연의 기운이 혼탁해졌다.
더는 옛날 방법으로 내공을 쌓을 수 없었고, 그렇지 않아도 많은 것을 잃어버린 무림의 선조들로서는 무공이 점점 퇴보하는 현실을 해결할 수 없었다.
무공은 쓰레기가 되었다.
하지만 왕위룡은 스스로가 무림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았다.
그의 선조.
천마신교의 출신이었다.
벽화에 천마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고, 왕위룡은 그것을 기반으로 천마검법을 되살리고자 했다.
천마는 무림을 정벌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되새길 때면, 그만이 무림의 영광을 되찾을 희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무공 복원에 번번이 실패했다.
참담한 현실이 눈앞에 놓였다.
더는 외면할 수 없었고, 왕위룡은 자신 또한 실패를 되풀이했던 선조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대재앙이 발발했다.
세상이 혼란으로 뒤덮였던 그 시기에, 왕위룡은 한 존재의 기억을 받아들였다.
‘볼칸.’
드미트리의 일원.
일반 병사 수준은 아니나, 그렇다고 드미트리의 섬광과 악귀처럼 대단한 명성을 떨치지는 못한 존재. 하지만 그것이 왕위룡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볼칸의 기억에는 ‘수라 심법’이 포함되어 있었고, 수라 심법은 무림의 선조들이 해결하지 못한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현대의 혼탁한 기운으로도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왕위룡은 그때부터 10년간 무공에 전념했다.
왕위룡은 전승자였다.
보통은 전승의 기억을 발현하는 것에서 끝나나, 무림의 존재는 왕위룡을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새로운 천마검법을 완성시켰다.
그것은 과거의 천마검법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최대한 벽화와 비슷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냈다.
물론 완전히 다른 무공임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천마검법이라 명명한 이유는, 한때 무림을 정벌했던 천마의 업적을 그대로 이어 가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중국을 통일했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무림의 후예들을 받아들인 왕위룡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림은, 천마신교는 나로 인해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날.
중국은 열광했다.
멸망했던 무림이, 왕위룡으로 인해 다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그리고 현재.
왕위룡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무공은 심상치 않았다.
벽화에 기록되어 있는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달랐지만, 파괴력만큼은 천마검법에 버금갈 정도였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눈으로 확인한 것만 해도, 자신의 천마검법보다 완성도가 높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무림의 후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무공은 천마신교의 것과 비슷한 맥락을 보이고 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신교의 후예이거나, 혹은 천마신교의 것을 얻은 인물이라면. 나는 그를 함부로 적대할 수 없다. 나와 똑같은 조건을 갖추었다면, 그 또한 나처럼 무림을 재건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자신과 행보가 비슷했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그 모습이, 불과 며칠 전에는 감히 대한민국 주제에 황제를 거론하냐면서 분노했던 왕위룡으로서도, 지금은 왠지 천마신교의 후예라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발 물러났다.
관망을 택했다.
섣불리 접근해 자신의 바닥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상대가 정말 천마신교의 인물일지라도, 왕위룡은 순순히 자신의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천마신교는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다. 강한 존재가 모든 것을 차지하지.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신교의 인물이라면 그를 무너트리고 내가 절대자의 자리에 오를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그의 무공을 빼앗아 천마검법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만약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패배한다면…… 날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위대한 업적을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을 것이다.’
고로.
태도를 바꾸었다.
다른 나라들의 예상처럼 원래라면 대한민국의 국호 변경은 분노할 일이지만, 왕위룡은 로만 드미트리의 진실을 알아낼 때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같은 천마신교일지도 모르기에. 왕위룡은 자신의 수하들에게 대한민국을 적대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제회의.
상황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중국의 변심에, 프랑스 대통령이 신랄하게 비난했다.
“대한민국을 처벌하는 것이 가혹한 처사라니요! 그것이 주석께서 할 말입니까? 그동안 국제법을 위반한 국가들은, 왕위룡 주석이 주도한 여론 때문에 강력한 처벌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만 예외로 두는 것은 명백한 모순입니다. 그에 대해 이해가 되게 설명을 해 주십시오.”
그의 말처럼.
중국은 그동안 호전적인 모습을 보였다.
항상 처벌을 주도하며, 그들로 인해 고통을 겪은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혹을 운운하다니.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한 각 국가 수장들의 적대적인 눈빛에, 왕위룡은 스스로도 모순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자신이 우습게 보이더라도, 그에게는 다른 것이 더 중요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을 처벌하지 않는 이유는 인류를 위해서입니다. 대재앙이 이제 막 마무리된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굳이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특히 프랑스 대통령은, 필터링 없이 진심을 토해 냈다.
“아니, 그동안 대륙 정벌이니 뭐니 그딴 말을 운운한 주석께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사람들은 정말.
왕위룡을 미친 것이 아니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