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전생의 흔적들 (5)
첫 번째 국제회의.
엉망으로 끝나 버렸다.
미국과 중국, 세계 정부를 주도하는 두 강대국이 반대하는 바람에 로만 드미트리를 처벌하자는 결론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참 황당한 상황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물과 기름처럼 절대 합심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이번 일만큼은 헛기침을 하면서도 서로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았다.
결국.
“제1차 국제회의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수일 내로 제2차 국제회의를 진행할 것이며, 그때는 국제법을 위반한 ‘로만 드미트리’를 직접 불러들여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인공.
로만 드미트리를 소환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생각과는 다른 결과에, 회의실을 나서는 프랑스 대통령 파트리스는 상당히 분노한 표정을 보였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평소에는 국제법을 조금만 위반해도 예외는 없다면서 길길이 날뛰더니, 로만 드미트리가 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옹호하는 거야?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와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것 같지만, 너희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을 거다.”
“맞습니다. 이번 일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수행원이 맞장구쳤다.
파트리스는 자리를 옮기더니, 곧바로 마론교에 연락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미국이 반대하다니. 미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중국은 의외구나.]
화면 너머.
세바스찬이 있었다.
세바스찬 또한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프랑스와 브라질을 비롯한 마론교 신봉자들을 움직이면서, 그는 금방 로만 드미트리를 처벌하는 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제법은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기에, 미국이라 한들 무조건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보호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중국이었다.
그들의 변심은 예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중국은 로만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황제의 나라임을 자처했다.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를 무너트리는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것이 오판이었다. 중국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옹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우리는 그분의 강림에 문제가 되는 요소를 허락할 수 없다. 파트리스.]
“말씀하십시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2차 국제회의를 준비하라. 로만 드미트리를 반드시 처벌 대상으로 규정해야 하며, 그 자리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처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 세계를 동원해 대한민국을 처단할 것이다. 그때는 인류가 정한 법도를 따르지 않는 로만 드미트리를 옹호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겠지.]
원래의 계획.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중국과 대한민국의 분란을 유도하려 했으나, 중국이 한발 빼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마론교가 생각하는 미래에 중국과 대한민국은 무너트려야만 하는 존재. 이 기회에 둘 모두를 처리할 방법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파트리스가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프랑스 대통령도.
브라질 대통령도.
회의를 준비하는 직원도.
이 시간에 거리를 쓰는 환경미화원도.
모두 마론교의 일원이었다.
그것이 마론교의 진정한 힘이었다.
화면 너머의 세바스찬은, 마론교가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회의실을 나와 사람이 한산한 공간에 도달하자, 존 해리슨을 따르는 수뇌부가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중국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그들이 평소 추구하던 행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지난 세월.
미국과 중국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애초에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중국과, 세계 제일의 강대국인 미국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방법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마론교와 중국이 분위기를 주도한다면, 미국만의 힘으로는 로만 드미트리를 옹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임을 회피하는 선에서 발을 살짝 빼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왕위룡이 개입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고 말았다.
두 강대국.
둘의 뜻이 통하자 다른 나라들로서는 무시할 수 없었다.
왕위룡은 표면적으로 세계의 평화를 말했지만, 존 해리슨은 그걸 믿을 만큼 멍청한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왕위룡은 절대 타협할 인물이 아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 수많은 적을 도륙했을 만큼,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본인과 똑같이 황제를 자칭하는 로만 드미트리를 옹호하다니.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확실했다.
절대 믿지 않았다.
순간, 존 해리슨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마론교는 항상 중국의 존재를 못마땅해했다.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고, 마론교가 모시는 그분에게 해가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대놓고 말해 왔지. 어쩌면 중국은 마론교를 견제하기 위해 로만 드미트리를 옹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국은 힘이 있기에 그동안 스스로를 지켜 왔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이제 막 힘을 형성하는 시점이라 마론교의 목표가 되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세력을 보존한다면, 마론교와 대한제국의 전쟁으로 두 세력이 공멸(共滅)할 수도 있겠지.”
제일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었다.
어찌 되었든.
2차 회의까지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정보부가 파악한 로만 드미트리의 힘이라면, 미국은 그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풀어 가야만 했다.
존 해리슨이 말했다.
“정보부를 총동원해 중국의 계획을 파악하라. 그리고 지금 당장 대한제국에 통신을 요청하라.”
로만 드미트리.
지금은 그와의 대화가 필요했다.
* * *
LA 사태 직후.
로만 드미트리는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을 열광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한제국은 그동안 대재앙에 고통받아왔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대한제국의 위기를 해결한 것뿐만 아니라 SS등급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실에, 사람들로서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복귀 직후.
로만 드미트리는 수뇌부들을 곧바로 불러들였다.
대재앙이 마무리되었다고는 하나, 국제 정세가 이대로 대한제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았다.
김준혁이 말했다.
“우려스러운 부분은 국제법 위반입니다. 그동안 세계 정부는 국제법에 한해서 절대 예외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대재앙 도중 내란을 벌인 사실을 처벌하려 할 것입니다. 특히 대한제국이 스스로를 증명한 지금, 국제법 위반이라는 명분을 기회로 여길 확률이 높습니다.”
“미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미국 정부는 저희에게 우호적이나, 마론교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처벌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마론교.
로만 드미트리도 그 존재를 알았다.
독특한 세력이었다.
처음 마론교에 대해 들었을 때, 자신의 일대기를 읊어 대던 그들의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금방 사기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론 드미트리라니. 애너그램이든 뭐든 간에, 자신의 진짜 이름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녀석들이 떠들어대는 말을 믿을 이유가 없었다.
김준혁도 10년 전에는 마론교의 위상이 대단했으나, 지금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마론교를 무조건 믿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행보를 말하는 것.
전승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드미트리의 세상을 받아들인 이곳에서, 마론교와 같은 사기는 불가능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관련이 있다면.
전생의 삶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렉산드르와 마찬가지로,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한달음에 달려와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물론.
언젠가는 마론교의 진실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들의 교주는 행적을 드러내지 않기에, 정보부를 시켜 마론교에 관해서 계속 알아보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너희의 말처럼 국제회의는 개최될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내 처벌을 논의하겠지만, 우리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의 안위를 정비하고 국제회의의 결과가 나오길 기다릴 생각이다.”
무모했다.
결과가 나왔을 때는, 대한제국은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아무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준 행보에, 김준혁을 비롯한 사람들은 의견을 제시할 뿐 맹목적인 믿음을 보였다.
일개 개인이 단시간에 보여 준 업적은 단 하나도 상식에 부합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신처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동안 보여 준 기적은 믿음의 근간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며칠 뒤.
국제회의가 끝나자마자 미국이 통신을 요청해 왔다.
* * *
화면 너머.
미국의 대통령, 존 해리슨이 있었다.
그는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했다.
[……현재 이런 상황입니다. 아마도 다른 나라들은 제2차 국제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처벌을 주장할 것이고, 미국으로서도 언제까지고 그것을 반대할 수는 없습니다. 국제법은 전 세계 국가들이 약조한 법도입니다. 아무런 명분 없이 국제법을 반대하는 것은, 앞으로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신뢰를 잃는 계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저희에게 그 명분을 주십시오. 대한제국이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는다면, 미국은 기꺼이 대세를 부정하고 대한제국을 옹호하겠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거래였다.
미국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괴물 같은 모습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할 충분한 시간이.
그때까지는 편을 먹고자 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관계를 새로이 하자고 했기에, 미국이 먼저 동맹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미국.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다.
그들이 편을 들어 준다면, 국제회의에서 어떤 결론이 나오든 대한제국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그런데.
“거절하겠습니다.”
[……진심입니까? 미국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국제법 위반에 대한 처벌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지난 통신에서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LA를 도와주는 것을 끝으로, 대한제국과 미국은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존 해리슨 대통령님. 제가 말하는 새로운 관계에 합리적인 거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대한제국은 ‘대가성의 거래’가 아니라 명확하게 대한제국에 득이 되는 존재들을 구분할 것이며, 특별한 혜택으로 대한제국이 먼저 도움을 요청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다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대가성이 아니라,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위험하고 말고는 대한제국이, 그리고 제가 감수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웃었다.
분명히 대한제국이 위험한 상황인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여유가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대한제국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제안.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대한제국이 위험하다는 전제가 성립되는 것 자체가,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그림과는 달랐다.
그래서 거절했다.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한제국은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 줄 것이다.
그렇게.
“제2차 국제회의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툭.
로만 드미트리는 통신을 끊어 버렸다.
* * *
방금까지 통신이 진행되었던 자리.
대한제국의 수뇌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복잡한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신뢰하나, 미국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미국은 강대국이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낸다면, 대한제국은 조금 더 편안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끼익.
로만 드미트리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일은 참 재밌어. 그동안 대한제국과 미국은 갑을(甲乙) 관계가 명백했다. 연합을 표방하지만, 그렇다고 국력에서 나오는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지. 대한제국은 항상 강대국들의 도움을 갈망했고, 그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관계를 갈라놓았다. 그 사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진 지금, 우리가 을의 입장을 고수할 이유는 없다.”
격변의 시기다.
대한제국은 변화하고 있으나, 그것은 단순하게 대한제국의 사람들만이 받아들일 변화가 아니다.
“지금의 대한제국과 미국. 누가 우위에 있는 것 같지? 미국은 자국의 위험을 해결하지 못해 내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것은 지난날의 대한민국과 다르지 않다. 관계가 뒤바뀌는 순간이며, 지금부터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대한제국의 통치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니 내가 앞으로 행하는 일들을 지켜보아라. 내가 내뱉는 말, 내가 보여 주는 행동, 그것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 그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앞으로 너희가 취해야 할 태도를 결정하라.”
존재감이 부풀었다.
거인(巨人)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대해와도 같은 거대한 그릇을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것이다. 다른 요소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우리만의 기준으로.”
그때였다.
밖에 있던 친위대가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황제 폐하. 중국의 왕위룡 주석이 통신을 요청했습니다.”
미국에 이어.
이번에는 중국이었다.
방금 말한 것처럼, 갑을 관계가 바뀌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전의 대한민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질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가 현실을 욱여넣듯 담담하게 반응했다.
“기다리라고 해.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순간.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한민국이, 아니 대한제국이 변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