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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36화 (536/615)

536화 전생의 흔적들 (6)

중국 통신병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조금 전.

왕위룡의 명령으로 대한제국에 통신을 요청한 그는, 회의가 끝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는 답변을 받았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미리 약속하지 않은 통신이었기에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나, 문제는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는 왕위룡의 불같은 성질이었다.

‘기다리라는 말을 대체 어떻게 전달하지.’

발을 동동 굴렀다.

감히 대국을 기다리게 하는 대한제국의 태도는, 왕위룡의 심기를 자극할 것이 분명했다.

겁을 먹었다.

자신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통신병은 산송장 같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런데.

“크하하하하, 기다리라니. 확실히 대담한 인물이야.”

왕위룡이 웃음을 터트렸다.

통신병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비밀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왕위룡은 대한제국을 용서하지 않겠다며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천마신교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만일의 가능성이 사실이라면, 지금과 같은 호전적인 태도는 오히려 당연한 반응이었다.

천마신교는 타협을 불허한다.

그들의 과격한 성질은, 오랜 옛날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특성이었다.

‘샤오룽이 로만 드미트리의 무공을 알아보았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의 수준이라면 샤오룽이 진짜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겠지. 그런데도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그는 천마신교의 후예가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중국을 상대로 지금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심장이 뛰었다.

왕위룡은 늘 궁금했다.

천마신교는 명맥이 끊겨 버렸고, 자신만이 유일하게 천마신교를 되살리고자 아등바등 노력해 왔다.

10년 전부터 그것이 결실을 맺었고, 과거의 영광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지는 못했으나 어찌 되었든 새로운 천마검법을 완성시켰다.

닳도록 바라보았던 벽화의 검흔. 자신의 검 끝에서 발현되는 강력한 힘에, 왕위룡은 더는 적수가 없다는 판단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분열되어 있었다.

십수 갈래로 찢겨 나가 스스로를 왕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왕위룡은 정말 검 한 자루로 그들을 모조리 쓰러트렸다.

샤오룽과 같은 무림의 후예들. 헌터로서 각성한 강자들. 저마다의 사정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왕위룡을 상대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였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생각에 왕위룡을 황제로 추대했다.

그래서일까.

항상 갈망했다.

천마신교의 역사는 투쟁으로 이룩했다는데, 자신은 단 한 번도 호적수라고 할 만한 상대를 만나 보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강하다. 뱀파이어 로드를 일격에 날려 버린 그 공격조차, 나로서는 확실하게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겠지. 하지만 전대 천마들은 그런 역경을 이겨 내고 비로소 천마신교의 하늘로 추대받았다. 이것은 어쩌면 대륙 정벌을 앞둔 내게, 신이 내린 관문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천마검법.

시험해 보고 싶었다.

같은 천마신교의 후예를 쓰러트리고 증명받는다면, 자신의 천마검법이 진짜가 아니라는 불안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왕위룡은 스스로를 믿었다.

천마신교의 뜻을 이어받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왕위룡의 자신감은 치열했던 노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왕위룡이 말했다.

“기다리겠다. 대한민국이 준비되는 대로 곧바로 통신을 연결하라.”

“가, 감사합니다!”

통신병이 화들짝 놀랐다.

자비롭게 돌아오는 대답에,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30분 뒤.

드디어 통신이 연결되었다.

서로 간단하게 통성명을 마친 왕위룡은, 본론을 말하기에 앞서 자신이 적이 아님을 밝혔다.

[제1차 국제회의에서 러시아를 필두로 대부분이 대한민국의 처벌을 주장했습니다만, 저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김정태 대통령 체제에서 나라를 지켜 내지 못한다면, 당연히 새로운 지도자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겠지요. 그렇기에 처음에는 대한민국을 도와줄 생각으로 병력을 보냈던 제가, 김정태의 진실을 알고 병력을 물렸습니다.]

교묘한 화법이었다.

원래는 대한민국을 속국으로 만들 속셈이었으나, 굳이 본인의 진심을 밝힐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대한제국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되, 황제로 인정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제2차 국제회의에서도 중국의 태도는 똑같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대가를 바란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도움을 대가로 물질적인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중국은 앞으로 대한민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그 약속 하나면 기꺼이 도움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미국과 같았다.

동맹 제안.

미국은 대한제국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에 반해, 중국의 제안은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왕위룡으로서는 호승심을 숨길 수 없었다.

정말 천마신교의 후예일까, 천마신교의 후예라면 자신과 로만 드미트리 중에 누가 더 강할까 등 그의 머릿속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눈빛이 열망으로 물들었다. 왕위룡이 판단하기에 이것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고, 이렇게 단계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알아 갈 계획이었다.

끼익.

로만 드미트리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그 모습은 예의와는 부합되지 않았고, 고개를 치켜들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무슨 생각이지?”

[있는 그대로입니다. 중국은 대한민국과의 협력을 원합니다.]

“그래서 문제라는 거다. 대한제국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대한제국을 대한민국이라 부르지는 않았겠지. 왕위룡. 너에 관해서는 세상에 무수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 그것들이 너를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할지라도, 그간의 행보는 네가 어떤 방향성을 추구하는지를 증명하지. 중국을 통일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존재. 대놓고 대륙 정벌을 말하며 호시탐탐 타국의 영토를 침범하고, 최근에는 대한제국의 내란에까지 개입했던 존재. 네 호의는 독이다.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리라 믿었다면, 네가 멍청하거나 나를 우습게 본 것이겠지.”

[…….]

왕위룡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하대에 공격적인 발언까지.

참아 넘길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그래서 중국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겁니까?]

끝까지 이성을 붙잡았다.

참아야 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진실을 알아낼 때까지, 그는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굳이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한다. 내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 순간부터, 한 하늘 아래에 두 명의 황제는 존재할 수 없다. 네게 약속하지. 만약 네가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전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 * *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

이것은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우호적인 방법은 이제 끝났다.

자신이 황제임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발언을 들은 순간, 왕위룡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건방진 새끼. 감히 내 호의를 거절하다니.]

중국.

세계적인 강대국이다.

미국과 패권(霸權)을 다툴 정도로 국력을 갖추었으며, 스스로도 인간 중에는 적수가 없다고 단언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보여 준 호의는 진짜 무공에 대한 예의였다. 경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를 거둘 것이고, 패배한다면 그의 밑으로 들어갈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치열한 경쟁에서, 로만 드미트리와 얼굴을 붉힐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왕위룡은 더는 분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왜 너를 옹호했는지 아나. 네 힘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천마신교의 명맥을 이었다. 사장되었던 천마검법을 새롭게 탄생시켰고, 네가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하는 모습에서 나와 같은 뿌리를 확인했다. 그래서였다. 네게 내민 손길은, 만일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호의였다.]

무림.

그 존재를 드러냈다.

강대국의 수뇌부들은 진실을 알고 있지만, 일반 사람들은 ‘무림’이라는 세계가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현재 사람들이 터득한 무공은 현생에서 비롯되었으며, 헌터들이 터득한 가짜 무공이 아닌 진짜 무공을 익힌 존재가 바로 왕위룡이다.

존재감을 표출했다.

정체를 드러낸 이상, 로만 드미트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할 필요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의 대답에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려 있다. 만약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면, 나는 제2차 국제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처벌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직접 앞장서 대한민국을 무너트릴 것이다. 감히 대국의 황제인 나의 자리를 넘본 것은, 단순히 죽는 것 이상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단 하나의 사실.

그것을 확인했다.

[너는 정녕 천마신교의 후예인가?]

* * *

왕위룡과의 통신.

지켜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 수뇌부들이 물러났고,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 남은 상황에 통신을 받았다.

[너는 정녕 천마신교의 후예인가?]

마지막 물음.

로만 드미트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무림의 존재를 항상 궁금해했다.

자신이 무림을 다스리던 시절만 하더라도, 감히 황제조차 무림을 넘보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갖추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무림은 기록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소멸해 버렸다.

그것이 마음속에 늘 의문으로 남았는데, 왕위룡은 지금 스스로를 천마신교의 후예라고 밝혔다.

지금, 이 순간.

기쁘지도.

반갑지도.

아니면, 그 어떤 긍정적인 감정도 들지 않았다.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오히려 화가 났다.

“천마신교가 존재하고도 무림이 멸망했다는 건가.”

[묻는 것에나 대답해!]

“내가 기억하는 천마신교는 나약하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천마신교가 멸망해 버린 것이지?”

[이 새끼가.]

왕위룡이 분노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대답.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천마신교의 역사를 비난하는 듯한 음성에, 왕위룡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 감히 천마신교를 운운하다니! 천마신교는 멸망하지 않았다. 황실이 무림인 말살 정책을 펼쳐 무림 전체를 무너트렸으나, 내 선조들은 끝까지 천마신교의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런데 뭐라고? 네가 기억하는 천마신교는 나약하지 않다고? 네가 대체 뭔데 그런 말을 내뱉는 거지? 나를 비롯한 천마신교의 후예들은 끝까지 ‘천마 백중혁’ 님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네 정체가 무엇이든 비난할 자격은 없다.]

역린(逆鱗)이었다.

멸망이라는 단어는 그간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 네 정체를 밝혀라! 네가 무림과 관련이 없다면, 감히 천마신교를 우습게 본 죄로 네 머리를 날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천마신교의 후예라면, 고개를 조아리고 천마신교의 명맥을 이어 온 내게 용서를 구하라.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천마신교의 유일한 적통이다.]

말을 할수록.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

왕위룡이 건방지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로만 드미트리가 용서하지 못한 부분은 천마신교가 존재하고도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세상 그 어디에도 천마신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왕위룡이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는 하나, 과거의 백중혁이 만들어 낸 ‘천마신교’는 스스로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야 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재?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밑에는 수많은 강자가 존재했고, 그들은 현생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묻겠다. 어째서 ‘너 따위’가 천마신교를 이끌고 있는 거지?”

차가운 물음.

왕위룡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분노한 감정을 드러냈고, 그가 내뱉은 말들을 보면 천마신교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천마신교의 후예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아는 듯한 모습.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왕위룡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 세월.

천마신교는 근간을 잃었다.

자신만이 그 뜻을 받들었다고 생각했건만, 처음으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마신교를 이끄는 자신을 너 따위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만일의 가능성.

상대가 단순한 천마신교의 후예가 아니라, 천마신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왕위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후예.

멸망해 버린 천마신교를 이어 온 후예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정체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나는 천마 백중혁이다.”

그 말 한마디에.

물감이 번지듯, 왕위룡의 얼굴이 충격과 공포로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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