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전생의 흔적들 (7)
왕위룡의 성장기.
치열한 훈련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매일같이 훈련을 반복했고,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건 절대 어린 소년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 점점 불만이 차올랐고, 어느 날은 훈련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반항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는 항상 천마신교가 대륙 제일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대체 이게 뭐예요? 매일 죽을 듯이 훈련하고도 발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이 세상은 이따위 검 한 자루가 아니라 미사일 몇 발로 모든 것이 결정 난다고요.”
현대 사회.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세상에서, 근간을 잃어버린 무공을 붙잡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왕위룡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처벌을 가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왕위룡의 질문이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네게 할 말이 있다.”
자리를 옮겼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옆에 왕위룡을 앉히더니, 아버지는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던 천마신교의 과거를 얘기해 주었다.
“아들아. 아주 오랜 옛날, 이 세상에는 무림이 존재했다. 무공을 수련한 사람들이 각자의 이념에 따라 문파를 설립했고, 정파와 사파, 마도로 나누어진 세 세력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무림을 정벌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어떨 때는 정파가, 어떨 때는 사파가, 어떨 때는 마도가 강했다. 하지만 균형의 추는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 어느 한 세력이 무림을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무림 정벌을 단순히 꿈처럼 여기던 시절에 이변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왕위룡의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며,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반복했다.
“당대 천마. 그가 무림을 정벌했다. 정파와 사파가 힘을 합쳤는데도 천마의 상대가 되질 않았고, 무림 역사상 최초로 천마신교는 무림 정벌에 성공했다. 그때의 천마신교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성했다. 중국의 황제조차 감히 천마신교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천마의 통치에 고개를 조아리고 천마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네가 이어받은 검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무림을 정벌했던 천마의 업적. 우리는 그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비록 현재가 보잘것없을지라도, 천마신교의 후예들은 절대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마의 존재.
환상이 아니다.
수많은 기록이 천마의 업적을 증명했고, 대대로 관리해 온 벽화를 바라볼 때면 천마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벽화에서 뿜어내는 강렬한 기세. 그림으로 표현한 것인데도, 천마는 벽화 너머의 사람을 압도했다.
“만약 그분이 갑작스럽게 사라지지 않았다면. 세상은 많은 것이 변화했을 것이다. 황제의 무림인 말살 정책은 실패했을 것이고, 네가 천마신교의 후예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겠지.”
“……정말 검 한 자루로 무림을 정벌했어요?”
“아비가 약속하마. 벽화의 검술을 네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인 순간, 네가 손에 쥐고 있는 검 한 자루로 인해 현대 사회의 상식이 무너질 것이다.”
열망이 부풀었다.
검 한 자루로 세상을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
불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로, 왕위룡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분의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진짜 이름을.”
아버지가 웃었다.
기특했다.
힘겨운 삶을 이어 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희망을 심어 주고 싶었다.
“기억하거라. 천마 백중혁. 우리는 그분의 뜻을 받드는 천마신교의 후예라는 사실을.”
* * *
백중혁.
수도 없이 되새겼던 이름이다.
힘이 들 때면, 한계에 부딪힐 때면, 왕위룡은 백중혁의 모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리고 지금.
“나는 천마 백중혁이다.”
머리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신교의 후예임은 확신했지만, 설마 본인을 백중혁이라고 밝힐 줄은 몰랐다.
사고가 완전히 정지되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놀란 얼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일까.
아니.
불가능했다.
백중혁은 아주 오래전에 존재했던 인물이고, 지금은 세월의 흐름에 절대 살아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로만 드미트리는 명백하게 ‘외국인’이지 않은가.
머리만 검을 뿐 동양인과는 완전히 다른 외모를 바라볼 때면, 어떻게 외국인이 천마신교의 후예가 되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충격이었던 감정이.
점점 분노로 변했다.
백중혁의 존재를 아는 로만 드미트리가, 감히 자신을 조롱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을 것 같나. 천마 백중혁 님은 천마신교의 전설이다. 무림 정벌이라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업적을 이루어 낸 위대한 인물이며, 나를 비롯한 천마신교의 후예들은 대대로 그분의 뜻을 이어 왔다. 그런데 스스로를 천마 백중혁 님이라 말하다니. 넌 선을 넘었다. 네가 그 어떤 만행을 저질러도, 나는 같은 천마신교의 후예에게 자비를 베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다. 감히 천마 백중혁 님을 욕보인 순간부터, 나 왕위룡은 네 녀석을 단죄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분노했다.
격렬하게 음성을 쏟아 냈다.
왕위룡의 반응은 이해가 되었다.
외국인의 외형을 지닌 로만 드미트리가, 오래전에 죽었을 백중혁이라고 말하는 상황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 이상으로 왕위룡을 배려하지는 않았다.
천마신교의 뜻을 이었기에 정체를 밝혔지만, 진실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왕위룡의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왕위룡을 인정하지 못했다.
천마 백중혁으로서 이룩한 천마신교는, 겨우 지금의 중국 따위로 만족할 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대륙 제일.
거대한 산을 이룩했다.
천마신교의 후예라면, 그에 걸맞은 위상을 갖추었어야 했다.
중국?
강대국 중 하나다.
유일한 존재가 아닌, 여러 강대국 중 하나일 뿐.
게다가 세간의 평가는 미국을 더 높이 평가하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왕위룡에게 차갑게 말했다.
“왕위룡. 나는 통신 화면 너머로 내가 백중혁이라는 사실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대혼란이 찾아온 세상에는 불가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라. 정확히 1시간. 대한제국으로 찾아와 내게 스스로를 증명하라. 만약 1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중국을 적으로 규정할 것이다.”
[그게 무슨…….]
대답은 듣지 않았다.
일방적인 통보.
툭.
로만 드미트리는 통신을 끊어 버렸다.
* * *
새카맣게 변한 통신 화면.
왕위룡은 넋을 잃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마지막 발언.
충격적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라니.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대한민국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절대자가 나타나고 전승 능력이 발현되는 순간부터, 이 세상에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정말 만약에.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 백중혁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만에 하나.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왕위룡과 대화를 나누었던 그날부터, 시간이 날 때면 천마 백중혁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매우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루어 낸 태평성대(太平聖代)에 자비로운 인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낼 때까지 대해를 이룰 만큼의 피를 흘렸다.
적으로 규정한 존재에게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가 그에 부합했다.
레드문과 중앙 정부. 분명히 타협의 여지가 충분했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적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또 미국행은 어떤가.
LA를 찾아가서 홀로 뱀파이어 로드의 머리를 날려 버린 모습은, 오만할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했다.
마치.
천마와도 같았다.
천마의 행보와 로만 드미트리가 겹쳐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 백중혁이라면 천지가 개벽할 것이다. 아버지가 말하길, 천마는 천마신공이 완전하지도 않은 시점에 무림을 정벌했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 감히 도전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고, 중국의 황제는 무림을 별개의 존재로 취급할 정도였지. 그렇다면 뱀파이어 로드를 처리한 일격은 절대 전력이 아닐 것이다. 나는 그것조차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데, 그보다 더한 힘을 갖추었다면 나의 패배는 확실하다.’
아득했다.
천마의 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막상 진짜 천마를 마주하자, 감히 그를 대적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인간은 상상력의 동물이다.
상상이 머리를 잠식했다.
분명히 말이 안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은 왕위룡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그만큼.
천마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천마신교의 후예들은 천마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왕위룡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 당장 대한민국으로 갈 것이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하라.”
“화, 황제 폐하! 30분 뒤에 러시아 대통령과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파기하신다면 후에 문제가…….”
“그딴 것들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말을 끊었다.
왕위룡이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소하라. 나는 반드시 대한민국으로 가야만 한다.”
* * *
조금 전.
박민우는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특명을 받았다.
“왕위룡이 대한민국으로 오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비밀리에 그를 내게 데려와라.”
왕위룡의 방문.
세상이 들썩일 문제였다.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박민우에게 이번 일을 맡겼고, 왕위룡이 어째서 대한민국을 찾아오는지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왕위룡이 천마신교의 후예라는 사실. 그리고 천마 백중혁임을 밝힌 상황에, 왕위룡이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방문한다는 것을 말이다.
결론은 이미 나왔다.
왕위룡은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하는 순간, 그가 천마 백중혁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황제 폐하의 비밀은 나만의 것인데…….’
박민우는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른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그것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을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하지만, 그런데도 아무 말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자신과 로만 드미트리만의 비밀이다. 위대한 천마와 비밀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왠지 모를 특별한 감정을 부여했다.
그런데 왕위룡이라니!
천마신교의 후예라니!
자신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나타난 것 같았다.
자신은 천마신교 아랫마을에 살았던 무지렁이였다면, 왕위룡은 정말 천마의 후예이지 않은가.
‘설마 진짜 후계자가 나타났다고 해서 막 나를 외면하거나, 소홀히 대하시진 않겠지. 그래. 황제 폐하는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니야. 단순히 인맥(?)을 우대하는 존재라면, 전생에 드미트리 사람들을 그리 챙겨 주진 않았겠지. 나는 괜찮을 거야. 언제나 황제 폐하는 내게 곁을 허락해 주실 거야.’
불안감이 치밀었다.
마론교.
그들의 존재도 이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박민우는 마론교가 말하는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임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로만 드미트리에게 위협이 되는 일이라면 당장에 마론교 교주의 머리를 날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경험한 천마는 무적이었다. 마론교가 아무리 날뛰어도 로만 드미트리를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에, 마론교가 뭘 하든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자신은 전생에 로만 드미트리의 정체를 알지 못해 머리가 날아갔다.
목숨을 걸고서 얻은 소중한 비밀인데, 왜 마론교를 살려 주겠답시고 진실을 알려 주어야 한단 말인가.
박민우, 아니 김판석의 근본.
알렉산드르의 삶을 거치며 그는 썩을 대로 썩었다.
그는 마론교 사람들의 생명보다 자신과 로만 드미트리의 특별함(?)이 중요했고, 마론교와의 전쟁으로 인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고? 그들이 로만 드미트리는 아니니까. 박민우의 우선순위는 1순위가 로만 드미트리고, 2순위가 본인이며, 3순위가 아닌 100순위 바깥으로 다른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런 박민우에게.
왕위룡은 눈엣가시였다.
그가 진실을 확인하고 자신보다 특별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까부터 괜히 속이 쓰라렸다.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만약 왕위룡이 천마의 존재를 부정했다면, 감히 황제 폐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서 박민우는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그런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왕위룡 따위에게 내 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어. 전생도 아닌 이번 삶에서, 황제 폐하의 2순위는 나야.’
그때였다.
텔레포트 마법진이 반응했다.
상대가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박민우가 마력을 불어 넣자, 환한 불빛이 일어나더니 왕위룡을 비롯한 그의 호위들이 나타났다.
박민우가 그들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왕위룡은 따라오고, 나머지는 여기서 기다려.”
“이 새끼가!”
“감히 황제 폐하의 존함을 입에 올리다니!”
호위들이 발끈했다.
중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위룡도 분노한 기색을 보였으나, 박민우는 오히려 지지 않겠다는 듯이 사나운 표정을 보였다.
“자존심을 내세울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대한제국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지. 야 왕위룡. 명심해. 네가 정말 천마신교의 후예라면, 지금부터 너는 복종과 투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 눈 깔아, 이 새끼야. 투쟁을 택하면 어차피 황제 폐하의 손에 죽을 거고, 복종하면 넌 내 밑인 거니까.”
기선제압.
아직 진실을 확인하지 못한 왕위룡으로서는, 시작부터 당혹스러운 순간에 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