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전생의 흔적들 (8)
박민우의 언행.
참아 넘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왕위룡의 호위로 따라나선 샤오룽이, 앞으로 나서며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감히 황제 폐하를 능멸한 죄로, 저 개자식의 머리를 당장 날려 버리겠습니다.”
빈말이 아니다.
살의를 뿜어내는 모습에, 박민우 또한 마력을 일으키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보였다.
콰르르르릉.
“뷰웅신. 설명을 충분히 듣지 않았나 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순간, 왕위룡은 스스로를 황제라고 말하지 못할 텐데. 그리고 말이야. 내 앞에서 그딴 눈깔 보이지 마. 이 세상에서 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유일하니까.”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
샤오룽이 검집에서 검을 뽑는 순간, 박민우의 마법은 샤오룽을 폭격해 버릴 것이다.
승리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박민우는 스스로를 믿었고, 무엇보다도 대한제국에 발을 들이고도 콧대를 높이는 중국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는 천마신교의 후예다. 진실을 마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기에, 샤오룽의 같잖은 자존심 따위는 배려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무릎을 꿇든 현실을 부정하든, 어떤 선택지를 택하든 간에 자신과 저들의 서열 정리는 반드시 필요했다.
폭발하는 마력.
샤오룽의 표정이 굳었다.
백의의 마법사가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이 정도로 강렬한 마력을 분출할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샤오룽. 멈춰라.”
“황제 폐하!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천마 백중혁 님이라면, 우리는 자존심을 내세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왕위룡의 표정은 복잡했다.
대한제국행을 택했으면서도, 그는 아직도 확신을 지니지 못했다.
정말 천마 백중혁일까.
세월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얽힌 상황에, 박민우의 태도는 심적인 확신을 주었다.
백의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박민우가 왜 삼류 양아치처럼 행동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오래전부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강자다.
세상일에 밝은 존재. 그런 박민우가 중국을 상대로 과감하게 나오는 것은, 본인이 모시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천마일 가능성이 컸다.
서열을 정리하려는 박민우의 태도가, 오히려 왕위룡에게는 한발 물러나야 할 근거를 부여했다.
‘날 이리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그만큼 믿는 것이 있다는 의미겠지.’
감정을 억눌렀다.
싸늘하게 변한 표정으로, 박민우를 바라보았다.
“원하는 대로 나 혼자 가겠다. 단, 네가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신교와 전혀 관련이 없다면, 나 왕위룡은 절대 너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피식.
박민우가 웃었다.
그가 앞장서 걸으며, 말을 툭 내뱉었다.
“예, 예. X대로 하세요.”
* * *
박민우와의 트러블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왕위룡은 박민우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 방어’로 보호된 연무장에 도달했다.
그곳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화면 너머로 보았던 모습에, 왕위룡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
천마일지도 모르는 존재.
왕위룡은 마나를 끌어올렸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존재를 파악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로만 드미트리에게서 그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신이 치밀었다.
천마 백중혁이라면 자신을 압도하는 마력을 분출해야만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평범한 기운에, 어쩌면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흠칫.
시선이 마주쳤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았는데도, 왕위룡은 순간적으로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게 무슨.’
눈앞의 존재.
범상치 않았다.
자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라는 생각에, 그때부터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말 천마신교의 주인. 천마 백중혁일지도 몰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오만한 눈빛, 중국의 황제에게 직접 오라 말하는 건방진 태도. 모든 퍼즐이 천마 백중혁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심적인 증거들이 아닌, 정말 압도적인 무력으로 인한 증명을!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왕위룡. 검을 들어라. 네가 천마신교의 후예임을, 말뿐인 것이 아님을 직접 확인하겠다.”
“원하던 바다.”
슥.
검을 뽑았다.
더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와 다시 한번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왕위룡은 마나를 폭발시키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콰르르르릉.
파파파팟.
빨랐다.
왕위룡의 발걸음이 땅바닥에 족적을 남겼고, 땅바닥이 움푹 파일 때마다 엄청난 폭발력으로 거리를 좁혔다. 벽화에 나온 보법이었다.
그것을 천마군림보라 명명한 왕위룡은, 시작부터 상대를 쓸어버리겠다는 듯이 강렬한 마력을 분출했다.
콰앙!
콰콰콰콰쾅!
검과 검이 부닥쳤다.
로만 드미트리는 어느새 검을 뽑아 들었고, 왕위룡은 상대가 반응할 것을 예상하고 후속 공격을 펼쳤다.
‘단번에 끝장낸다.’
콰앙!
머리를 내리쳤다.
왕위룡이 보법을 밟자 순간적으로 옆을 파고들었고, 발걸음에서부터 활화산처럼 분출되는 마력이 이전 공격보다 더한 파괴력을 부여했다.
그것을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작렬시켰다. 강렬한 폭발이 일어나며 또다시 막아 내자, 왕위룡은 방향을 틀며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콰콰콰콰콱!
압도적이었다.
왕위룡.
사람들이 말하는 세계제일 검.
세상에는 S등급의 검사들이 많지만, 그들 모두가 왕위룡만큼은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인정했다. 그렇기에 중국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벽화의 가르침은 그를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고, 볼칸의 기억은 천마로 거듭나도록 완성해 주었다.
무림의 후예.
그의 근본이었다.
사실 단순히 전승자의 기억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면, 크리스의 기억을 물려받은 사무엘 같은 존재들이 왕위룡보다 뛰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똑같은 기억도 물려받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었다. 무림의 후예였기에, 왕위룡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마력이 몰아쳤다.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왕위룡이 퍼붓는 공격은 사방을 압도했다.
스스로를 믿었다.
그간의 노력을 믿었다.
상대가 천마든 아니든.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팟.
방금의 공격.
왕위룡의 팔이 튕겨 나갔다.
허점을 드러내는 순간이었고, 왕위룡은 무리하면서까지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을 방어하려 했다.
그런데.
공격하지 않았다.
차가운 시선은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봐주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을 수비적으로 받아 낼 뿐, 생각해 보면 아무리 틈이 생겨도 반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반응을 끌어내려고 적절하게 찔러 넣는 수준 정도로만 공격했다.
왕위룡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자신과의 차이가 이 정도로 크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실과는 별개의 문제다.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했다.
상대가 정말 전설 속의 존재라면,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꽉.
“지금부터는 다를 거다.”
표정이 돌변했다.
천마군림보를 밟았다.
동시에.
‘천마검법.’
자신의 전력을 드러냈다.
* * *
콰앙!
콰콰콰콰콰콱!
하늘이 요동쳤다.
폭발적인 마력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이 일었고, 왕위룡의 얼굴은 마력을 감당하지 못해 빨갛게 물들었다.
꽈득.
이를 악물었다.
마나를 억눌렀다.
천마검법의 강력한 힘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천마검법이다!”
번뜩.
콰콰콰콰콰쾅!
이전과는 달랐다.
공격이 작렬할 때마다 엄청난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쳤고, 왕위룡은 상대에게 틈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곧바로 따라붙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일련의 모습은 벽화의 그림과 같았다.
벽화가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모습을 표현했기에, 왕위룡의 검은 하늘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한 줄기의 벼락을 내리쳤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벽화의 그림이 양쪽 팔을 베어 버리며 심장을 노렸기에, 왕위룡의 검도 그와 같은 형태를 보였다.
팟.
콰콰콰콰쾅!
완벽한 동화.
벽화에 빠져들었다.
천마신교의 선조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벽화를 연구했고, 그 가르침은 온전히 왕위룡에게 전달되었다. 한평생을 벽화를 바라보며 수련하는 것에 몰두했다.
대재앙이 발발하기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무의미하다고 말했지만, 볼칸의 기억을 받아들인 이후 그간의 노력은 엄청난 폭발력을 일으켰다.
천마검법.
천마의 힘을 손에 움켜쥐었다.
스스로가 천마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왕위룡은 자신의 존재를 불태웠다.
‘나는 천마 왕위룡이다!’
휘이잉.
콰콰콰콰콰콱!
마력이 휘몰아쳤다.
얼굴이 당장에 터져 버릴 것처럼 붉어지더니, 전력을 다한 공격을 그대로 퍼부었다.
콰앙!
콰콰콰쾅!
콰콰콰콰콰쾅!
주변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휘몰아치는 마력만으로 마법 방어에 균열이 생겼고,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연무장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이것만큼은 절대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구름을 바라보며, 몇 발 떨어진 거리에서 왕위룡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허억, 허억.”
그간의 노력.
헛되지 않았다.
상대가 정녕 천마라면, 자신의 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
눈앞에.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먼지구름 너머로, 로만 드미트리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분명히 팔 한쪽이 날아갔을 만한, 아니 S등급 헌터들 정도는 여러 명을 동시에 찢어발길 만한 강력한 공격이었는데도 로만 드미트리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왕위룡이 전력을 다한 공격조차도 로만 드미트리는 받아 주었다. 멀쩡한 그의 모습이 왕위룡과의 압도적인 차이를 증명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차갑게 말했다.
“그건 천마검법이 아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왕위룡이 당황했다.
천마검법이 아니라니.
상대가 천마라는 사실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이 더 당혹스러웠다.
로만 드미트리는 왕위룡을 충분히 파악했고, 그의 존재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네가 정말 천마신교의 후예였다면 단순히 겉모습만 흉내 내는 수준의 천마검법을 사용하지 않았겠지. 천마검법은 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틀에 얽매여 있는 너의 검법은, 네가 천마신교의 후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더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마력을 일으켰다.
“보아라. 이것이 천마검법이다.”
천마검법 후반부 초식.
그중 일초식을 펼치는 순간.
번뜩.
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마법 방어가 찢겨 나가며, 주변 일대가 그대로 소멸되었다.
* * *
털썩.
왕위룡이 무릎을 꿇었다.
넋을 잃은 얼굴로 파괴되어 버린 공간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진정한 천마검법이라니.”
벽화와는 완전히 달랐다.
내리치는 동작도, 양옆을 베어 버리며 심장을 노리는 동작도, 어떠한 유사성도 없이 그냥 휘두른 공격이 주변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렸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진짜 천마검법을 확인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으면서, 동시에 본인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자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를 천마신교의 후예라고 믿었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네가 사용한 천마검법은 천마신공이 배제된 껍데기에 불과하다. 내가 즐겨 사용하던 검로를 흉내 낸 것 같으나, 정식으로 천마신교의 명맥을 이어 왔다면 그따위로 사용하지는 않았겠지. 왕위룡. 네 선조의 이름을 말하라. 선조가 누구냐에 따라, 이 자리에서 네 생사(生死)를 결정하겠다.”
이미.
왕위룡은 전의를 상실했다.
천마신교의 재건이라는 꿈을 가졌던 그에게,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은 삶의 의욕을 박탈해 버렸다.
멍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을 죽이든 살리든.
지금부터는 로만 드미트리의 몫이었다.
“왕석호. 저는 왕석호의 후손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십니까?”
로만 드미트리를 인정했다.
상대는 천마다.
천마가 아니고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왕석호라는 이름.
로만 드미트리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네가 왕석호의 후손이라니. 그는 나의 친우이자…….”
기억 너머.
한 존재를 떠올렸다.
먼발치에서 자신을 바라보았던 존재.
자신의 곁을 허락했던 존재.
“내가 훈련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던 화백(畫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