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전생의 흔적들 (9)
전생.
무림을 정벌하고도, 천하제일의 수식어를 획득하고도.
백중혁은 항상 강함에 목이 말랐다.
천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고, 매일같이 훈련을 반복하던 어느 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몇몇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훈련을 지켜보게 했다. 3
자의 시선을 빌려 현재를 판단하려는 의도였으나, 자신보다 실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천마라는 사실에 그들의 시선은 객관성을 잃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감히 천마의 무공을 지켜보는데, 무림에 발을 들인 사람들로서는 모든 것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무림과 관련이 없는 화백을 불러들였다.
실력이 있는 화백이라면 훈련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했던 도전은 대성공을 이루었다.
화백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편견 없이 그려 나갔다.
백중혁이 어떻게 검을 휘두르는지, 앞으로 치고 나갈 때 발은 어떻게 내딛는지, 그가 그림을 한 장 한 장 그려 나갈 때마다 백중혁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복되는 훈련.
쌓여가는 그림.
이제는 천마라는 존재가 익숙해졌는지, 화백은 그림을 그리다 말고 백중혁에게 이렇게 물었다.
“방금 동작. 왜 그렇게 검을 뻗으신 겁니까?”
그림의 완성도를 위한 물음이었다.
백중혁은 화백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고, 완성도가 높아진 그림으로 인해 원하는 바를 충족할 수 있었다. 현재를 파악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무공을 고쳐 나갔다. 그것은 훗날 ‘천의 경지’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화백을 친우로 받아들였다.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인자한 얼굴.
중년의 나이에 새하얗게 바랜 머리.
마치 신선처럼 그림을 그려 나가는 화백과의 대화는, 고독한 삶을 살아가던 백중혁에게 제법 즐거운 시간이었다.
서로 관계를 규정하는 특별한 대화를 나눈 건 아니다.
하지만 자주 만나면서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 친우라면, 백중혁은 화백이야말로 몇 안 되는 친우라 생각할 뿐이었다.
화백의 이름.
그는 바로 왕석호였다.
* * *
왕석호.
왕위룡.
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외관의 연관성을 찾기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왕위룡에게 ‘화백 왕석호’의 모습이 보였다.
문제는.
왕석호의 존재였다.
왕석호는 천마신교의 후계자가 아니다.
천마신교의 뜻을 받들기는커녕 일반인에 불과했고, 왕위룡이 왕석호의 후손이라면 현재 상황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천마신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무림을 정벌하며 천하제일임을 인정받았던 천마신교가, 어떤 연유로 왕석호의 후손에게 모든 것을 맡겼단 말인가.
‘내가 기억하는 왕석호는 진중한 사람이다. 천마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았고, 나에 관해 물어보는 질문들에 목숨을 걸고 입을 다물 정도로 강단이 대단했던 사내였지. 그는 내 훈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천마검법을 완벽하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천마신교의 명맥을 대대로 남겼다면, 분명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겠지.’
이해했다.
왕위룡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으나, 자신이 기억하는 왕석호를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네가 사용한 천마검법. 그것은 어떻게 터득했지?”
대대로 내려온 무언가.
그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왕위룡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그는 스스로를 적법한 후계자라고 생각했는데, 천마신교의 후예라고 생각했던 조상이 겨우 화백에 불과했다니.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 백중혁이라는 사실만큼이나, 그는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로만 드미트리는 천마가 분명하다는 사실이었다.
주변 일대를 단번에 쓸어버리는 파괴적인 일격은, 천마검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왕석호의 정체가 화백이라면. 대재앙이 발발할 때까지 벽화의 그림만으로 천마검법을 구현해 내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화백의 그림은 겉모습을 따라 그렸을 뿐, 천마검법에 진정으로 필요한 부분들은 왕석호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른침을 삼켰다.
왕위룡이 힘겨운 얼굴로 대답했다.
“……벽화를 보고 터득했습니다. 저희 가문은 대대로 벽화를 통해 ‘천마의 무공’을 전수해 왔습니다.”
벽화.
의문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왕위룡이 어떻게 천마신교의 후예가 되었는지.
천마검법의 겉모습을 흉내 낸 것 같은 무공의 정체가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일련의 상황이 완벽하게 들어맞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섣불리 단정 짓지는 않았다.
“그곳으로 안내하라. 내가 직접 벽화를 확인할 것이다.”
* * *
그 시각.
샤오룽은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을 때는, 박민우가 눈을 부라리든 말든 안으로 들어갈까 수도 없이 고민했다.
‘침착하자. 이곳은 적의 소굴이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살아 나갈 방법이 없다.’
주변을 살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다.
왕위룡은 자신보다 강하지만, 그가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왕위룡을 구출할 생각이었다.
무림의 재건. 그리고 대륙 정벌. 그 위대한 꿈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천마신교의 후예인 왕위룡이 반드시 필요했다.
왕위룡은 절대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초조한 시간이었다.
감각이 예민하게 달아오르는 그때, 먼발치에서 로만 드미트리와 왕위룡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화, 황제 폐하?!”
뭔가 이상했다.
로만 드미트리와 왕위룡.
둘은 나란히 걷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조금 앞서 걸었고, 왕위룡은 마치 그와 나란히 걷는 것이 큰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뒤따라 걸어왔다.
그것은 자신이 왕위룡을 대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앞서 걸어가는 사람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는 모습에, 샤오룽은 흔들리는 눈빛을 보였다.
[샤오룽.]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
전음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왕위룡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우리는 지금부터 중국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예의를 갖추어라.]
더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왕위룡의 태도.
중국행.
명백했다.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의문을, 일련의 상황이 전부 설명해 주었다.
‘……정말 저분이 천마란 말입니까.’
눈앞의 사내.
로만 드미트리는 천마 백중혁이 분명했다.
* * *
중국과 한국.
먼 거리를 이동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텔레포트라는 마법 문명에 의해, 로만 드미트리는 금방 벽화가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이것입니다. 제 선조는 벽화의 그림을 남기며, 천마신교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눈앞에.
거대한 벽화가 있었다.
그것은 한 사내가 검을 들고 검법을 펼치는 모양새였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단번에 본인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직 천의 경지에 오르기 전. 그 시절의 무공이 벽화에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벽화를 어루만지며, 왕석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벽화를 확인하니 진실이 보였다.
벽화는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왕석호는 무림인으로서의 지식을 쌓았고, 그는 부족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 벽화의 그림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했다.
처음부터 벽화의 그림만으로 천마검법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천마신공이 배제된 천마검법의 한계는 명확했으며, 무엇보다도 형에 얽매이지 않는 천마검법은 그것을 터득하기 위해 걸맞은 준비가 필요했다.
수많은 검법.
수많은 무공.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형에 얽매이지 않고도 진정한 천마검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 겉핥기식으로나마 천마검법을 완성했다는 건, 왕위룡의 재능이 범상치 않음을 증명한다.’
인정했다.
왕위룡은 천재였다.
그가 만약 백중혁이던 시절에 자신을 만났다면, 눈부신 재능은 그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을 것이다.
벽화를 찬찬히 살폈다.
그때였다.
이상한 부분이 보였다.
그림에는 묘한 체계가 숨겨져 있었다.
진짜 천마검법을 알지 못한다면 알 수 없는, 그것은 왕석호가 숨겨 둔 비밀이 분명했다.
화악.
마력을 일으켰다.
그림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왕석호가 그림에 무언가를 숨겨 두었다면, 그것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파파파팟.
“……이, 이게 대체?!”
왕위룡이 눈을 부릅떴다.
벽화가 빛에 물들었다.
처음에는 미약했던 불빛이, 묘한 체계를 따라서 벽화 전체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왕위룡은 오랜 세월 벽화를 지켜보았지만, 벽화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넋을 잃은 얼굴로 벽화를 바라보았다. 벽화로 번져 나가는 불빛은 점점 체계를 갖추었는데, 그것은 왕석호가 ‘후대의 누군가’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벽화의 비밀을 파악했다면. 지금 이 글을 확인하는 사람은 천마 본인이거나, 아니면 천마의 뜻을 이은 후예겠지. 그게 누구든, 나는 세월의 흐름에 잊혀가는 진실을 이곳에 남기고자 한다.]
왕석호는 인생 전부를 벽화에 쏟아부었다.
수십 년간 고뇌한 끝에 그림을 완성했고, 그림 안에 진정한 천마만이 알아볼 수 있는 비밀을 남겼다.
[천마 백중혁 님이 사라진 순간부터 위기는 시작되었다. 그분이 건재하실 때는 그 누구도 감히 무림을 넘보지 못했지만, 천마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황실은 무림인 말살 정책을 계획했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바로 천마신교. 무림을 정벌할 만큼 강대한 세력을 구축한 천마신교를 완벽하게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황실은 오랜 세월 무림인 말살 정책을 준비했다. 마교의 인물들을 포섭하고, 중원 곳곳에 사람을 퍼트렸으며, 단 한 번의 계획을 위해서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사용했다. 그들은 만에 하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후손이 살아남아, 언젠가는 복수의 화살이 본인들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 그렇기에 단 한 번의 계획으로, 그들은 천마신교를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소멸시키고자 했다.]
천마신교.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무림을 정벌할 만큼 강력했기에, 황실은 의도를 숨기고 철저하게 때를 기다렸다.
[황실의 계획은 완벽했다. 그들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날, 천마신교는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단 한 권의 무공서적도 남기지 못하도록. 황실은 천마신교를 완벽하게 짓밟았다. 서고를 불태워 무공의 명맥을 끊었으며, 천마신교의 후예라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 그 목숨을 끊어 버렸다. 십만대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천마 백중혁 님의 존재를 찾았다. 그분이 돌아온다면 복수를 해 줄 것이라고. 그분이 돌아온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지만 헛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천마신교는 완벽하게 멸망했다. 다른 문파들은 그래도 몇몇 후예들을 살렸지만, 천마신교만큼은 관련자들이 모조리 죽어 버렸다. 나는 황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중원의 존재가, 천마신교의 존재가 위협적이라고 해서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까지 학살했다.]
명맥이 끊긴 이유.
황실의 집요함 때문이었다.
만약 왕석호가 일반인이 아니었다면, 그 무렵 중원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천마 백중혁, 그 위대한 존재가 이대로 잊혀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 미천한 능력으로는 그분을 감히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분의 존재를 기억하고 천마신교의 명맥을 이어 갈 것이다. 벽화의 진실을 확인한 자여. 네가 만약 천마신교의 후예라면 천마 백중혁 님의 뜻을 이어 가 다오. 그리고…….]
마지막 글귀.
[만약 천마 백중혁 님 본인이라면, 우리가 당신을 간절히 기다려 왔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 * *
화악.
빛이 가라앉았다.
글자들이 사라지는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을 보였다.
무림의 멸망.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황실이 철저하게 천마신교를 짓밟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그들의 역린(逆鱗)이 되었구나.’
천마의 존재.
절대적이었다.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강력했기에, 당대 황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도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
중원에 황제보다도 위대한 존재가 살아 있기에. 황제의 역린은 점점 커졌고, 천마 백중혁이 사라지자마자 그 분노는 중원 무림 전체를 쓸어버렸다.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백중혁으로 인해 무림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로 인해 멸망이라는 참담한 결말 또한 맞이했다.
고개를 돌렸다.
왕위룡이 있었다.
그의 무공은 보잘것없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고생했다. 네가 있었기에 천마신교는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다.”
순간.
왕위룡의 눈이 커졌다.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하고 알았다.
자신은 천마신교의 후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 따위가 감히 천마신교를 입에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그것도 천마 백중혁이 자신을 인정해 준다는 사실에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넙죽 엎드렸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더니,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신교의 후손이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케케묵은 역사에 남은 글귀.
왕위룡이 그것을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