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40화 (540/615)

540화 약육강식(弱肉强食) (1)

자리를 옮겼다.

왕위룡이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대륙 정벌을 말했던 이유는 선조의 노력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씨 가문은 대대로 천마신교의 뜻을 받들었습니다. 천마신교는 무림 정벌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이루어 냈기에, 천마신교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내고 싶었습니다.”

오랜 세월.

왕씨 가문은 천마신교의 명맥을 이어 왔다.

주변 사람들은 왕씨 가문을 한심하다며 손가락질했다.

황실은 멸망한 무림의 기록을 삭제했고, 현대사회는 빠르게 발전했으며, 몇 남지 않았던 무림의 후예들조차 더는 무공이 실용성이 없다고 단정했다.

그런 상황에서 벽화만 바라보고 있는 왕씨 가문의 모습은 한심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왕위룡의 아버지는 근방에서 할 일 없는 한량 취급을 받았으며, 왕위룡 또한 스스로가 행하는 일에 의구심이 생겨났다.

이게 맞는 일일까.

환상을 좇는 건 아닐까.

매일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던 왕위룡은, 대재앙이 발발하고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았다.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한심하다고 말하던 왕씨 가문의 노력은 진짜였고, 왕위룡은 천마신교를 재건하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덕분에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공을 되찾은 사람들을 불러 보았다.

사람들은 왕위룡을 호전적인 인물이라 비난했지만, 그는 천마 백중혁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대륙 정벌을 통해서 ‘천마신교’가 다시 태어났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

왕위룡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였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이 나라를 로만 드미트리 님께 바치겠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천마신교가 대륙을 정벌하는 날,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 곁에서 제 존재 가치를 다하고 싶습니다.”

눈앞의 사내.

그는 절대 천마 백중혁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양인의 얼굴에 낯선 이름.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왕위룡은 상대가 천마 백중혁이라는 사실을 더는 부정하지 않았다.

천마가 어떻게 로만 드미트리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천마검법을 펼치고 벽화의 진실을 알아보는 모습은, 왕위룡에게 눈앞의 존재를 받아들일 충분한 근거를 부여했다.

있는 그대로를.

눈앞의 존재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왕씨 가문의 핏줄이 본능적으로 진짜 천마임을 말해 주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동안 천마신교의 뜻을 이어 왔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나의 사람이 될 자격이 있다. 너와 너의 나라를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네가 이룩한 천마신교는 나약하다. 만약 네게 과거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면, 반쪽짜리 천마신교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겠지.”

“제게 길을 제시해 주십시오.”

“내 곁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라. 패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네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하라.”

감정이 벅차올랐다.

천마 백중혁.

전설 속의 존재다.

그가 지금 자신에게 길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왕위룡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신 왕위룡, 천마신교를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대재앙 이전.

길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茫茫大海) 속에서도 천마신교의 명맥을 이어 왔다.

그에게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었다.

나아갈 길이, 따라야 할 존재가 명확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왕위룡은 들뜬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단 하나.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천마신교. 그 흔적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 * *

자료를 가져왔다.

그것을 건네며 왕위룡이 말했다.

“대재앙 이후. 세계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락.

책장을 넘겼다.

왕위룡의 말처럼 그 안에는 특정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18년 전. 중국의 한 마을에서 A등급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A등급 몬스터의 출현은 흔치 않았으며,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몬스터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문제는 그 존재가 사용한 무공입니다. 파괴적이고 강렬한 검흔은 마치 벽화의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으며, 그 존재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5년 전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락.

“암영(暗影)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집단인데, 전 세계 국가를 상대로 의뢰를 받아 해결해 주는 전형적인 청부 조직입니다. 문제는 15년 전. 현재 러시아 대통령인 마르코프가 정적을 처리하기 위해 암영에 의뢰를 넣었는데, 암영에서 정적을 처리할 때 다시 한번 ‘벽화의 검흔’이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벽화의 검흔을 사용한 존재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암영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천마신교와 비슷한 무공을 사용하는 게 확실하며, 저희는 그들이 천마신교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거기까지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왕위룡과 같이 천마신교에 뿌리를 내린 존재들이라면, 그들과의 연합으로 미래를 도모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의 근간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이후. 저는 무림인 말살 정책을 펼쳤던 황제의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천마신교의 무공은 완전히 소실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는 천마 백중혁 님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했고, 그 결과 무공의 일부를 빼돌려 자신의 수하들에게 연구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온전히 본인의 힘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던 것이죠. 황당하게도 황제가 병으로 일찍 사망하면서 그와 관련한 기록은 사라졌지만, 여러 자료를 확인한 결과 암영은 천마신교를 무너트렸던 황제와 관련한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암영’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무엇을 의도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천마신교가 멸망하던 순간에 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탁.

자료를 덮었다.

왕위룡의 말처럼.

암영에게서 천마신교의 흔적이 보였다.

그들이 천마신교를 무너트렸던 황제의 후손이라면, 그들의 존재는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재밌었다.

암영의 존재가, 천마신교를 불태웠던 황제의 후손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왕위룡.”

“예.”

“너에게 분명히 말했었지. 한 하늘 아래에 두 명의 황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천마신교 또한 마찬가지다. 암영이 정말 천마신교의 힘을 받아들인 존재라면, 그들은 절대 다른 누군가가 본인들 위에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웃음에 담긴 살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천마신교의 하늘은 오로지 나를 위한 자리다. 머지않아 세상에 내 존재를 각인할 것이고, 암영의 가설이 진짜라면 그들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어떤 것이든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겁쟁이라면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이고, 만약 천마신교를 내세워 모습을 드러낸다면…….”

살의를 번들거렸다.

벽화에 기록되었던 사람들의 고통이, 로만 드미트리의 눈앞에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나는 내가 해야만 했던 일을 행할 것이다.”

* * *

자리를 마무리했다.

왕위룡은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따를 것이며, 암영은 계속해서 알아보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왕위룡이 앞장섰다.

로만 드미트리를 안내하기 위함이었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신하가 왕위룡을 확인하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당연한 태도였다.

왕위룡.

중국의 황제다.

그를 발견했으면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 당연하고, 왕위룡 또한 신하의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었다.

문제는 바로 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제치고 자신에게만 예를 표하는 모습에, 왕위룡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로만 드미트리는 말했다.

한 하늘 아래에 두 명의 황제는 존재할 수 없다고.

그 말과 함께 번들거리는 살의를 목격했기에, 정말 다급하게 신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빨리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예를 갖추어라!]

“예?”

신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해하질 못했다.

앞뒤 설명이 생략되다 보니, 그는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이런 개#$*(#)($*)@# 염병할 새끼야. 당장 머리가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예를 갖추라고!]

귀에 신랄하게 박히는 욕설.

신하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해는 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신하가 뭐라 말하든 말든.

로만 드미트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위룡과 로만 드미트리가 지나갈 때마다, 눈치 없는 신하(?)들이 꼭 달려와서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황제…….”

그때마다.

왕위룡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중국을 통일한 황제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초조한 얼굴로 분주하게 로만 드미트리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로만 드미트리는 상황을 이해해 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분노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가 떠나는 대로 제대로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목적지가 보였다.

왕위룡은 끝까지 로만 드미트리를 안내하려고 했지만, 한달음에 달려온 박민우가 앞을 막아섰다.

“지금부터는 황제 폐하의 이인자인 저 ‘박민우’가 안내하겠습니다.”

순간.

왕위룡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신을 흘겨보는 박민우의 눈빛과 살짝 오만한 듯 올라간 콧대.

분명했다.

저 새끼는 자신을 견제하는 게 분명했다.

왕위룡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럼 그쪽은 이만 들어가시고.”

찡긋 웃는 박민우.

아무래도 앞으로 박민우의 존재가 매우 띠꺼울 것 같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마침내 제2차 국제회의 당일이 되었다.

이미 구성원들이 전부 참석한 상태였고, 사람들은 이번 국제회의의 주인공인 로만 드미트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벌어질 일에.

프랑스 대통령인 파트리스는 웃음을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 네가 어떻게 중국을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회의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며칠 전.

파트리스는 왕위룡에게 연락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처벌하기 위해 설득할 의도였는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왕위룡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파트리스는 하나의 가설을 내세웠다.

중국은 그동안 대한민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궁지에 몰리자 중국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왕위룡이 이렇게까지 대한민국을 감쌀 이유가 없었다.

‘중국과 미국. 두 강대국이 대한민국을 옹호한다고는 하나, 국제회의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자리. 제1차 국제회의처럼 단순하게 로만 드미트리에게 예외를 적용해야 한다는 말은 먹히지 않을 거다.’

마론교의 목적은 명확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처벌.

파트리스는 그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다.

러시아, 브라질뿐만 아니라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등 각국의 수장들을 만났고, 로만 드미트리를 처벌해야 하는 확실한 이유를 납득시켰다.

모두가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SS등급의 뱀파이어 로드를 처리하며 스스로를 증명했지만, 강력한 무력은 오히려 두려움을 낳았다.

지금부터 확실히 견제하지 않으면 로만 드미트리의 대한민국이 어떤 야욕을 보여 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로 인해서, 세계 각국이 프랑스 정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러시아 대통령, 마르코프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부터 참 건방지지 않습니까. 죄인이면서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게.”

“맞습니다. 일찍 얼굴을 비추며 환심을 사도 모자랄 판에 이런 모습이라니. 이래서 제가 대한민국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존재가 건방지기까지 하다면, 앞으로 인류에 어떤 재앙을 선사할지 모릅니다.”

“역시 마르코프 대통령님이십니다.”

둘은 죽이 잘 맞았다.

마르코프 또한.

대한민국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론교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순수하게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적의를 표출했다.

그렇게 떠들어 댈 무렵.

마침내 회의실 너머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로만 드미트리 님이 입장하십니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도.

황제의 칭호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놓고 국제 사회에서 깎아내리는 상황.

파트리스는 웃는 얼굴로 문을 바라보는데, 순간 바로 옆에서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지,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왕위룡.

중국의 수장이, 안으로 들어서는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