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약육강식(弱肉强食) (5)
파스스스.
세상이 뒤엉켰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집무실에 있었는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허벌판에 짙은 안개가 밀려들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마법 방어 아티팩트(artifact)를 소지했건만, 공간 전체를 변화시키는 마법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동요하지 마라! 마법 트랩이라면 분명히 파훼할 길이 있을 것이다!”
파벨의 목소리.
짙은 안개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래도 아직은 부대원들이 시야 안에 있었는데, 그들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파벨이 아무리 소리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계획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 작전을 준비하면서 수많은 시뮬레이션 훈련을 진행했지만, 단 한 번도 이와 같은 상황은 없었다.
탈칵.
탈칵, 탈칵.
마법 전등을 켰다.
소리가 전달되지 않으면 빛으로라도 신호를 보낼 의도였다.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 부대원들.
이대로라면 상황이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파벨은 일단 가장 가까운 부대원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자.
확.
파스스스.
안개가 그대로 부대원을 휩쓸어 갔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부대원을 집어삼키는 모양새였고, 분명히 부대원이 있었던 장소에 도달하자 사람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파벨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자, 여전히 다른 부대원들이 적당한 거리에서 귀머거리처럼 주변을 배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이를 악물었다.
빠르게 땅을 박찼다.
안개에 잡아먹히기 전에, 어떻게든 부대원들을 확보하려 했다.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파벨이 부대원들과 맞닥트리기 직전, 마치 파벨을 놀리는 것처럼 안개가 부대원들을 집어삼켰다.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마법 방어 아티팩트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건만, 눈앞의 광경은 ‘마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한번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하려는데, 안개 너머에서 맹렬한 기세가 느껴졌다.
캬악!
캉!
몬스터였다.
짐승 형태의 몬스터가 나타나 앞발을 휘둘렀고, 파벨은 뒤늦게 파악했는데도 가볍게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 냈다. 게나찌트의 수장이자 A등급의 헌터.
수많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베테랑인 만큼, 그는 치고 들어오는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치더니 단번에 목숨을 끊어 버렸다.
퍽.
끄르르르륵.
몬스터가 피거품을 물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밀려들었다.
‘대체 어떤 개수작을 부리는 거냐!’
안개 속.
파벨은 고립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일단 살고자 발악해야만 했고, 맞닥트리는 족족 몬스터들을 도륙해 버렸다. 어느새 부대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짙은 안개와 바닥에서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몬스터들의 사체들뿐. 얼굴이 피로 흠뻑 물든 파벨은, 눈앞의 상황을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일에 집중했다.
살아야 했다.
반드시 살아서 임무를 완수해야만 했다.
악에 받쳤다.
죽이고, 또 죽였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기는 상황에, 파벨의 눈빛이 독기로 물들었다.
‘개자식들. 우리의 공격을 예상하고 함정을 파다니.’
만약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김준혁의 머리를 잘라 성벽에 내걸 것이다.
감히 게나찌트를 우롱한 대가를 확실하게 치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쓰러진 몬스터의 사체에 단검을 수차례 찔러 넣자, 갑자기 심해에서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감각이 확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안개가 사라졌다. 황급히 고개를 든 파벨은, 시각적으로 빨려드는 광경에 순간 말을 잃었다.
“……이, 이게 무슨.”
집무실 안.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파벨은 부대원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은 채로 존재하고 있었다.
* * *
파벨의 동공이 흔들렸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자신을 제외하고 부대원들이 전부 죽었다는 사실에, 그는 비틀거리면서 황급히 시체에서 멀어졌다.
“참 잔인한 지휘관이야. 본인이 살기 위해 수하들을 전부 죽여 버리다니.”
김준혁이었다.
그가 집무실 책상에 엉덩이를 걸터앉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파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으로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에는 자신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들이 존재했다.
단검을 짧게 잡고 급소를 공격하는 방식. 시체의 상처도 같았다. 그렇다면 안개 속에서 헤매고 다니던 일련의 상황이, 김준혁이 만들어 낸 환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모든 것이 계획되었다.
짙은 안개로 감각을 현혹하고, 부대원들의 모습을 감추어 그들이 먼 곳에 존재한다고 인식하게 만든 뒤에, 몬스터의 모습을 한 부대원들을 밀어 넣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정
말 완벽하게 당해 버리고 말았다. 파벨은 악귀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강렬한 살의를 보였다.
“이런 개새끼가!”
“왜. 우리가 너희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할 줄 알았나.”
제2차 국제회의.
대한제국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다.
회의가 파국으로 치달아 만약 대한제국과 전 세계가 전쟁을 벌이더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을 믿고 따르라고 말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수뇌부들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반란을 성공한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맹목적인 신뢰를 받았다.
지난 며칠.
여러 가능성을 계산했다.
만약 적들이 인천을 공격한다면, 높은 확률로 텔레포트 마법진과 김준혁을 노리려고 할 것이다.
당연했다.
텔레포트 마법진은 대규모 이동을 위해서 필요하고, 김준혁은 로만 드미트리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두뇌이니까.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특히 김준혁의 집무실에는 진법을 겹겹이 설치했고, 마법과는 틀을 달리하는 그것은 마법 방어로도 막을 수 없는 복잡한 체계를 갖추었다.
마르코프의 생각은 틀렸다.
그는 대한제국의 허를 찌르는 완벽한 기습 공격이라고 생각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생각한 여러 가능성 중에서 러시아 혼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문제였다.
그것도 모르고 게나찌트는 인천 정부 건물에 발을 들였다. 본인들이 사지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김준혁이 말했다.
“세계 정부는 대한제국의 국제법 위반을 들먹이지만, 너희가 적법한 절차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한 순간부터 세계 정부는 명분을 잃었다. 너희는 우리를 처벌하고자 모순을 저질렀다. 국제법 위반을 위반으로 대응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지. 게나찌트의 수장 파벨. 너희의 선택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의미다.”
눈을 부릅떴다.
소속도 이름도.
모두 간파되었다.
살아남기는 틀렸다는 생각에, 파벨은 단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처럼, 텔레포트 마법진을 노리는 너의 수하들 또한 모조리 죽임을 당할 것이다.”
“죽어라!”
땅을 박찼다.
어차피 죽을 몸.
김준혁이라도 데리고 가야만 했다.
파벨은 득달같이 달려들며 김준혁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순간 그의 시야가 사선으로 비틀렸다.
푸확.
피를 흩뿌렸다.
파벨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파벨의 뒤로.
파벨의 머리를 날려 버린 이태성이, 싸늘한 눈빛으로 검을 거두고 있었다.
‘섬전(閃電).’
그건 미처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른 쾌검이었다.
* * *
김준혁의 말대로였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공격한 병력.
그들은 10분이면 충분히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했건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매우 참담했다.
번뜩.
“크악!”
게나찌트 부대원의 팔이 날아갔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상대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강민호는 침착하게 공격을 막아 내더니 그대로 머리를 날려 버렸다.
이미 강민호 주변에는 차갑게 식어 가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게나찌트의 부대원들은, 서너 명의 머리가 날아가고서야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강하다!’
이곳.
강민호와 수호대가 담당했다.
수호대는 아직 창설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이미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모두 로만 드미트리 덕택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수호문의 무공을 알려 주었고, 강민호를 비롯한 수호대의 일원들은 대재앙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기반으로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는 무공과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했던 경험. 하위 등급을 전전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반 사람들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할 것들을 받아들이며, 그들은 전혀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다.
카앙!
카카카카캉!
강민호가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공격들을 단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더니, 오히려 치고 나가며 상대의 사지를 찢어발겼다.
팟.
파파파팟.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존재감이 부풀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던 존재가, 이제는 단 한 명도 통과시키지 않을 수호신처럼 보였다.
‘역시 황제 폐하의 예상대로야.’
어제저녁.
강민호는 천검의 마스터를 만났다.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는 전쟁을 대비하는 상황에, 민찬기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대체 어떻게 모든 상황을 예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었다.
적으로 상대할 때는 소름이 돋는 능력이, 아군으로 지켜볼 때도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때.
강민호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의 곁에서 여러 상황을 경험하며 제가 내린 결론은 단순합니다. 그분은 모든 상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중 가장 호전적이고 과감한 행보를 택하기에 사람들은 그분이 위태롭게 외줄 위에 올라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중앙 정부를 무너트리는 과정에는 수많은 계산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가능하기에,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수많은 기적을 지켜본 저희로서는, 저희에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하면 될 뿐입니다.”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누군가 대한제국을 공격할지라도, 강민호는 인천이 무너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번뜩.
상대의 머리를 날렸다.
피를 뒤집어쓰며, 강민호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대한제국을 공격한 죄. 죽음으로 응징하라!”
“죽음으로 응징하라!”
인천.
그곳의 상황은 마르코프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러시아의 도시.
이르쿠츠크.
그곳의 텔레포트 마법진이 예고도 없이 반응하더니, 갑작스럽게 한 사내가 빛무리를 뚫고 나타났다.
“누구냐!”
“어떻게 텔레포트를…….”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빠지지지지직.
“크악!”
“악!”
병사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쓰러졌다.
사내의 정체.
바로 박민우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박민우에게 텔레포트 마법진을 가동할 것을 명했고, 계획에 따라 로만 드미트리를 작전 장소로 보냈다.
그리고 박민우와 왕위룡에게는 각각 다른 명령이 부여되었다. 왕위룡은 중국으로 복귀해서 병력을 이끌고 북진, 박민우는 이르쿠츠크를 공격해 러시아를 혼란에 빠트리라 말했다.
개별 임무가 부여되었다는 사실.
그건 기분이 좋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였지만, 문제는 바로 왕위룡의 존재였다.
‘왕위룡이 날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어. 그건 분명히 내 자리를 노리는 음흉한 뱀 새끼의 눈빛이었어. 왕위룡이 화백이든 뭐든 천마신교의 후예가 맞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혹시라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왕위룡이 마음에 든다고 진짜 천마검법이라도 가르치는 날에는 내 이인자 자리는 끝이야. 그 전에 어떻게든 이인자 자리를 견고히 할 필요가 있어. 감히 왕위룡 따위가 넘볼 수 없을 만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돼야 해.’
의지에 불타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말했다.
이르쿠츠크를 공격해 러시아를 혼란에 빠트리라고.
만약 이곳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다면, 다음에는 어떻게 움직이라는 특별한 명령은 없었다.
‘내가 이르쿠츠크뿐만 아니라 다른 러시아의 도시들을 각개격파한다면, 겨우 한두 도시를 무너트릴 왕위룡과 내 전과는 비교될 수밖에 없겠지. 그래, 이건 속도전이야. 빠르고 압도적인 전과만이 나를 빛낼 수 있어.’
위잉!
위이이이이잉!
주변에서 경고음이 들렸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무단으로 사용하면서, 러시아에서 박민우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었다.
저 멀리.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애초에 박민우에게 한 개 도시를 공격하라 말한 것도 상식에 벗어나는 임무였지만, 박민우의 머릿속엔 이곳에서 만족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건 기회였다. 왕위룡이라는 굴러들어 온 돌에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킬 기회. 원래라면 적당히 타격하고 빠졌어야 했겠지만, 지금의 그에게 뵈는 것은 없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마력을 일으켰다.
검푸른 마력에 휩싸이며, 박민우가 이곳으로 몰려드는 병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냐, 모조리 죽여 주마.”
폭발하는 마력.
박민우는 마왕에게 버림받았을 때보다 더 사나운 표정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