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47화 (547/615)

547화 약육강식(弱肉强食) (8)

로만 드미트리의 방문.

기습 공격이 아니다.

마치 초대받은 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정문에 나타나 마르코프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이건 함정입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째서 제 발로 사지(死地)에 들어오겠습니까?”

마르코프의 생각도 같았다.

모스크바에는 러시아의 전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 로만 드미트리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도가 있는 것이 명백했다.

예를 들자면 만남을 빌미로 접근한 뒤에, 마르코프를 암살해서 불리한 상황을 뒤엎으려고 한다던가. 그런 의도만이 로만 드미트리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었다.

거절하려 했다.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병사가 이렇게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하길, 대한제국의 명예를 걸고 암살과 같은 시도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황당했다.

먼저 선을 그어 버렸다.

그렇다면 정말 만남을 목적으로 찾아왔다는 것인데, 마르코프로서는 당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거짓을 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라고는 하나 로만 드미트리는 상당히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절대 내뱉은 말을 어기지 않기에,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을 이용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코프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목적으로 나를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감히 러시아의 본거지에 발을 들이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건방지게 행동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암살을 대비한다면 내가 위험할 일은 없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이곳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목숨을 끊어 버릴 수도 있겠지.”

발상의 전환이었다.

기회였다.

로만 드미트리만 약속했을 뿐, 마르코프도 로만 드미트리를 해치지 않겠다는 발언 따위는 내뱉지 않았다. 물론 위험할 것이다.

마르코프 스스로가 미끼를 자처하는 일이었지만, 게나찌트가 아직 건재하다면 텔레포트 마법진을 점령할 충분한 시간을 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여러모로 적절한 수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족쇄를 찬 지금, 그를 불러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전군에게 전투태세를 명하라.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것이며, 어떠한 대화가 오가든 그를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절대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SS등급의 뱀파이어 로드를 쓰러트린 괴물이다. 이번 전투로 수많은 병력을 잃을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만 죽일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나머지 떨거지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웃었다.

멍청한 녀석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과신은, 로만 드미트리를 나락으로 빠트릴 것이다.

‘어쩌면 세계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전쟁을 끝낼 수도 있겠어.’

짙어지는 웃음.

마르코프가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곧 나타날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나갔다.

* * *

넓디넓은 공간.

그곳에 러시아의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그 숫자는 무려 십수만에 달했으며, 그들은 오와 열을 맞추고서는 오로지 마르코프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적의 입장에서는 소름이 돋는 광경이었다.

약소국의 전력으로는 이 많은 병력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이 내뿜는 강렬한 기세가 공간 전체를 압도했다.

이곳은 명백한 사지였다.

적의 발길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건만, 저 멀리에서부터 한 사내가 이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인파를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시선을 받아들였다.

장관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를 위한 단어인 것만 같았다. 십수만의 병력과 단 한 명의 적.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되도록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전투태세를 발동하는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분위기가 들끓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적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어느새 마르코프가 마련한 자리에 도달했다.

“일단 앉지.”

덩그러니 놓여 있는 탁자 너머.

마르코프가 앉아 있었다.

마르코프의 뒤로는, 로만 드미트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러시아의 S등급 헌터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들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적혈(赤血)의 블라디미르는, 4번째 대재앙이 발발했을 때 혼자서 수만의 몬스터들을 도륙하면서 러시아 최고의 헌터라고 불렸다.

끼익.

로만 드미트리도 맞은편에 앉았다.

이곳이 적지라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 모습에, 마르코프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이미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네가 왜 나를 직접 찾아온 거지?”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다.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그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웃음이 나왔다.

참으로 같잖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내 요청을 받아들인 그 안일한 판단에서, 너희가 스스로를 상당히 과신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르코프. 너는 이 자리가 나를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뱀파이어 로드를 쓰러트린 나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한제국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겠지.”

척.

척척.

마르코프 뒤로.

호위들이 전투를 준비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내뱉는 발언이, 그들 전부를 긴장하게 했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사람들이 인정하는 강대국인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무너트릴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나.”

“……그게 무슨 소리지?”

“간단한 문제야. 나는 지금부터 1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개입하지 않는 이 상황에서, 과연 네 기대처럼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무너트릴 수 있을까. 네게도 이곳에 발목이 묶여 있으라고 강요하지는 않겠다. 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으나, 나는 1시간 동안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건방졌다.

오만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이 마르코프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설마 감히 러시아를 상대로 대한민국의 힘을 증명하려는 생각인가. 오냐. 네 제안을 받아들이마. 대한민국이 그나마 인정받는 이유는 ‘너 하나’ 때문인데, 네가 직접 나서지 않고도 러시아를 상대로 버틸 수 있다고 판단하다니. 어디 한번 지켜보자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마르코프는 발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라고 여겼다.

두 거물의 만남.

시간이 흘렀다.

더는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 쪽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수뇌부 하나가 다가와 마르코프에게 수차례 귓속말을 했다.

“……대통령님. 중국군이 방향을 틀어 동부지방의 도시들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백의의 마법사가 지마를 함락시켰습니다. 병력을 아무리 투입해도 백의의 마법사를 막는 것에 번번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백의의 마법사에 의해 다른 도시들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대통령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러시아의 전력을 모스크바에 내버려 둔 채로, 백의의 마법사와 왕위룡 두 괴물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계속되는 패전.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이토록 밀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였다.

“게나찌트가 아무래도 괴멸당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보고에.

마르코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 *

마르코프는 로만 드미트리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받는 상황인데, 로만 드미트리는 아무런 소식을 전해 듣지 않고도 평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기습적으로 공격한 게나찌트는 괴멸당했고, 왕위룡은 중국군을 이끌고 명성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일개 개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백의의 마법사는 이번 전쟁에서 최대의 변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승전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제야 눈앞의 진실이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모스크바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사실 본인이 원했다면 언제든 모스크바 한복판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는 의미겠지. 그런데도 굳이 나를 찾아와 이따위 제안을 말한 것은, 지금 대한민국은 감히 러시아를 상대로 본인들의 저력을 세계에 증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짜증이 치밀었다.

특단의 방법이 필요했다.

체면을 구기더라도, 러시아의 본대를 보내 백의의 마법사와 중국군을 어떻게든 일망타진해야 했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원하는 대로 계획이 진행되지 않나 보군.”

“…….”

답하지 않았다.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마르코프.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관계에 타협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회의에서 국제법을 운운하던 너의 목을 날리지 않았던 이유는, 국제법이 부당하다고 한들 너희가 적법한 절차를 따라서 나의 처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절차를 생략하고 대한제국을 기습적으로 공격한 순간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이번 전쟁이 끝난다는 의미다.”

살의가 집중되었다.

이 자리.

적지다.

마르코프 뒤에 있는 호위들이, 로만 드미트리 뒤로 도열해 있는 십수 만의 병력이. 모두 살의가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모습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부터 네게 새로운 제안을 하지. 앞으로 다시 1시간을 주겠다. 러시아의 전력, 그리고 프랑스와 같은 연합 세력의 병력을 모두 불러들여라. 그리고 1시간 뒤. 나는 이곳에서 러시아의 전력을 상대할 생각이다. 어떤가.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대한제국은 패배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때부터는 네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약속 따위는 지킬 수 없다.”

명백히 러시아를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아넘길 수가 없었다.

콰앙!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르코프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버러지 같은 새끼. 네 제안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마.”

* * *

로만 드미트리의 제안.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대재앙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는 알지만, 혼자서 러시아 전체를 상대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원군도 얼마든지 부르라니. 마음 같아서는 러시아만의 힘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처단하고 싶었지만, 마르코프로서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만 했다.

파트리스에게 연락했다.

일단 그를 시작으로 차례로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프랑스는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파트리스 대통령님이 마론교를 따르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마론교는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한다고 들었는데, 이것보다 좋은 기회는 없지 않습니까!”

답답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파트리스가 겁쟁이라고 한들, 이런 상황에도 발을 빼는 것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맞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를 도우려 했습니다만, 그건 ‘기습 공격’이 통했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마르코프 대통령님.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은 게나찌트의 기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냈고, 왕위룡의 중국군과 백의의 마법사가 러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전력을 갖추었습니다. 아직 로만 드미트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 시점에, 섣부르게 그를 공격했다간 마론교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는 ‘교주님’ 또한 동의한 부분입니다.]

겨우 몇 시간.

상황이 뒤바뀌었다.

세바스찬은 프랑스를 내세워 전쟁에 가담할 생각이었지만, 러시아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계획을 바꾸었다.

상황이 생각보다도 좋지 않았다.

마론교는 인류의 희망. 섣부른 선택으로 뼈대를 잃어버린다면, 그분의 강림은 영영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결단을 내렸다.

프랑스가.

마론교가 한발 물러났다.

로만 드미트리의 강함을 인정하고, 지금처럼이 아니라 조금 더 신중하게 공략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왜 그렇게 섣부르셨습니까. 이번 일은 러시아가 감당할 문제입니다.]

툭.

통신이 끊겼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계획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르코프는 황급히 다른 나라들에도 연락을 돌렸고, 그들은 입을 맞춘 모양인지 하나같이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이번 전쟁은 본인들과는 무관하다는 답변. 오히려 국제법을 위반한 러시아의 행동을 지적하는 지도자들도 있었다.

의도가 명백했다.

러시아가 승리하든, 대한제국이 승리하든.

다른 나라들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러시아가 유리하다고는 하나, 혹시 모를 후폭풍을 대비해 한발 물러나 상황을 관망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마르코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러시아 홀로.

대한제국을, 로만 드미트리를 감당해야 했다.

아직도 러시아가 유리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러시아 한복판을 찾아온 로만 드미트리의 당당한 행보에 불길한 마음이 일었다.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일개 개인이 하나의 국가를, 그것도 강대국을 감당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강하다. 그간의 역사가 그를 증명하며,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걸음을 돌렸다.

모스크바에 러시아의 전력이 집중된 상황.

의지를 다졌다.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갔는데, 때마침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1시간. 이제 약속한 시간은 끝났다.”

스릉.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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