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화 약육강식(弱肉强食) (9)
이번 전쟁.
단순히 승리를 목적으로 했다면 간편한 방법은 많았다.
러시아의 전력으로는 절대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수 없지만, 대한제국이 새롭게 탄생하는 지금 특별한 퍼포먼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강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추상적으로 ‘초월 등급’이라고 명명했을 뿐, 마르코프는 그래도 강대국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헛된 망상에 빠졌다.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알지 못하기에 섣부른 판단을 내렸고, 알지 못하기에 대한제국을 아직도 약소국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판을 깔았다.
러시아의 의도를 알고도 전쟁을 유도했으며, 곧바로 마르코프를 죽일 수 있었는데도 인천의 전력과 박민우, 왕위룡이 활약하도록 한발 물러났다.
인천이 게나찌트를 박살을 내고, 박민우와 왕위룡이 러시아의 도시들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사람들은 이번 기회로 대한제국에는 로만 드미트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화룡점정(畫龍點睛).
완벽한 임팩트가 필요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앞으로 판도를 주도할 포식자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확실한 임팩트가.
그렇게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적의를 받아들이며 인파 사이를 걸었다.
마르코프 맞은편에 앉은 2시간.
그동안 전 세계가 이곳을 집중하고 있었다.
마르코프와 주고받은 대화가 실시간으로 알려졌으며, 한발 물러난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러시아와 대한제국의 격돌을 지켜보았다.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강대국의 위엄을 증명하겠지만, 대한제국이 승리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세상의 판도가 바뀔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는 상황을 극한으로 밀어 넣었다.
마르코프에게 연합군을 불러들이라는 말은, 그가 고립될 것을 예상하고 내뱉은 발언이 아니었다.
마론교.
그리고 그를 따르는 세력들.
그들이 기회랍시고 러시아에 달라붙어도 상관없었다.
1시간 뒤에 정말 수많은 연합군이 모스크바에 몰려들었다 하더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기꺼이 그들 전부를 상대할 생각이었다.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였다. 현 세상의 기준으로는 감히 자신을 올려다볼 수 없음을 증명할 것이다.
앞으로 모두가 대한민국이 아니라, 자신을 대한제국의 황제라 부르기를. 더는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목숨을 잃지 않기를.
의도를 드러냈다.
존재감을 표출했다.
그걸 모르는 러시아의 수뇌부들로서는, 지원을 요청하는 시간 동안 불안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설마 정말 혼자서 우리 전부를 상대하려는 걸까요.”
“아닐 겁니다. 이곳에만 십수만의 병력이 있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해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맞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전력을 이곳에 모아 두고 뒤통수를 친다든가, 아직 움직임이 없는 미국을 동원해 무언가를 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계획이 무엇이든 간에 일 대 다수의 싸움은 이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건 가능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10분.
20분.
30분.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눈빛은 불신으로 가득 차올랐다.
상식을 믿었고, 현실을 부정했으며, 로만 드미트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꿀꺽.”
1시간이 지났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있는 이 공간에, 옆 사람의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때마침 마르코프가 나오는 타이밍에,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설마 했다.
모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인이 내뱉은 말을, 이번만큼은 무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1시간. 이제 약속한 시간은 끝났다.”
스릉.
검을 뽑아 드는 로만 드미트리.
사람들의 사고 회로가 정지되었다.
이 미친 인간은 기어코, 혼자서 러시아의 전력을 상대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 * *
더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났고.
로만 드미트리는 검을 뽑았다.
약속의 이행이었다.
홀로 모두를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순간,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공격해!”
“로만 드미트리를 죽여라!”
“죽어!”
파파파팟.
장관이었다.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거센 파도가 들이치는 듯한 광경이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마르코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일었다.
인파(人波)가 한 인간을 집어삼키기 위해 강렬한 살의를 드러내건만, 그는 마치 이 상황과 무관한 듯이 평온한 표정을 보였다.
“마르코프. 지금부터 벌어지는 모든 일은 네 선택으로 인한 결과다.”
툭 내뱉은 말.
몸을 돌렸다.
코앞에 들이닥친 수많은 적의에, 로만 드미트리가 땅을 박차며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번뜩.
푸화아악!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먼저 달려들던 병사들의 머리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고, 뒤따라붙던 병사들이 그 광경을 확인했을 때는 가슴팍이 무차별적으로 찢겨 나갔다.
비명이 귓속을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연약한 인간들이 꽥꽥 질러 대는 소리에, 로만 드미트리는 머리를 부서트리며 눈앞의 적을 베었다.
콰득.
막긴 막았다.
검과 같이 몸이 베어졌을 뿐, 병사는 막는 자세 그대로 양옆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팟.
파파파파팟.
사방에서 피를 흩뿌렸다.
기습적으로 공격하던 병사는 순식간에 머리가 날아갔고, 양옆을 동시에 공략하던 병사들은 한쪽은 팔이 잘리고 한쪽은 다리가 날아갔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뒹굴자, 거세게 몰아치는 인파에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
머리 위를 공략하는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호기롭게 뛰어올라 머리를 내리찍자, 로만 드미트리는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낚아채 버렸다.
콱.
“흐, 흐억!”
엄청난 악력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손아귀가 그대로 머리를 부서트렸다.
콰직.
뚝, 뚝.
핏방울이 손에서 흘렀다.
털어 내지 않았다.
핏방울이 흥건한 손으로 검을 바꿔 들며, 로만 드미트리는 다시 병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병사들이 동요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그때, 세 번째 걸음에 병사들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퍼퍼퍼퍼퍽.
머리가 터져 나갔다.
사지가 찢겨 나갔다.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겁을 먹은 눈동자에 비춘 것은 피를 흩뿌리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진실을 직시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히 협박성 발언을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마르코프에게 제안한 발언은 ‘특별한 의도’가 포함되었던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혼자서 러시아 전체를 상대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던 것이다.
시체가 쌓여 갔다.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는 상황에, 러시아의 S등급 헌터들도 전투에 가담했다.
“침착하게 상대하라!”
“로만 드미트리는 초월 등급의 실력자다. 섣부르게 공격했다간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마법으로 S등급을 확보한 실력자가 엄청난 바람을 일으켰고, 동시에 근접 무기를 사용하는 S등급 헌터들이 사방을 공략해 왔다.
물론 일반 병사들을 먼저 밀어 넣었다. 그들을 미끼로 사용하면서, S등급 헌터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틈을 공략하고자 했다.
그리고.
“블러드 티쓰(blood Teeth).”
투웅.
투투투퉁.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권능을 발현했다.
바닥에 흥건했던 피 웅덩이가 뒤얽히더니 이빨의 형태로 변했고, 마치 수백 마리의 짐승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듯 빠르게 날아들었다.
눈이 팽팽 돌아갈 만한 상황이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마법은 수백 명의 사람을 동시에 소멸시킬 만한 S등급의 마법이었고, 병사들 틈에서 달려드는 S등급의 헌터들 또한 웬만한 S등급도 막지 못하는 본인들의 필살기를 펼쳤다.
일 대 다수.
상황을 완벽하게 이용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강함은 미지의 세계이기에,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번뜩.
하늘 위로 뻗은 검.
마법을 베어 버렸다.
마법이 마나의 형태로 변하더니, 마치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처럼 주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콰앙!
콰콰콰콰콰콰쾅!
병사들이 쓸려 나갔다.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났고, 로만 드미트리는 그것을 뚫고 나타나더니 병사들을 베어 버리고는 S등급 헌터 또한 단번에 머리를 날려 버렸다.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 S등급 헌터는 자신의 전력을 사용했는데도, 병사와 마찬가지로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을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타타타탕.
블러드 티쓰도 모조리 막혔다.
인간이 반응하지 못할 각도와 속도로 들이닥쳤건만, 뭘 했는지도 모르게 단번에 소멸되고 말았다.
이상했다.
너무나 이상했다.
계속해서 병사들을 죽여 나가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블라디미르는 이상함의 정체를 알았다.
‘의도적으로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뱀파이어 로드를 일격에 쓰러트렸던, 그 강력한 힘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있었다.
* * *
일반 사람들.
그들은 상식의 영역에서 생각했다.
뱀파이어 로드를 쓰러트렸던 강력한 일격은 비상식의 영역이었기에, 사람들은 그것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얼마나 강력한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초월 등급이라는 구분은 무의미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논외의 존재였지만, 상식의 영역에서 해석하려다 보니 자꾸만 충돌이 일었다.
강하다는 건 인정했다.
그렇다고 강대국을 홀로 감당할 만큼일까?
상식적으로 아니라고 판단했다.
강대국의 힘을 전부 동원한다면, 뱀파이어 로드라도 버티지 못할 테니 상식적인 잣대를 들이밀었다.
상식.
균열이 일었다.
무지가 자꾸만 문제를 일으켰다.
로만 드미트리는 뱀파이어 로드를 쓰러트렸다.
러시아 정도의 전력이라면 뱀파이어 로드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고로 로만 드미트리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것은 비상식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들의 오판이었다.
그래서 힘을 거두었다.
전력을 표출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천마검법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기에, 그들이 단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시각적인 잔인함을 택했다.
일격에 수백, 수천 명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데도. 굳이 팔을 날리고 머리를 베어 버렸다.
대한제국의 병력을 이곳에 불러들일 수 있었는데도, 전 세계가 집중하고 있는 이 상황에 혼자서 러시아의 전력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존재감이 부풀었다.
블라디미르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는 스스로를 러시아 최고의 헌터라 자부했지만, 비상식의 영역을 직시하는 순간 진실을 알았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다.’
하지만.
이미 선을 넘었다.
서로의 명운을 건 싸움은 시작되었다.
블라디미르는 결과를 알고서도 마력을 끌어올렸고,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스킬을 사용했다.
“블러드 레인(blood rain).”
쿠르르르르릉.
핏방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이 먹구름을 일으켰고, 빨갛게 변한 구름에서 사람의 살을 찢어발기는 붉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콰콰콰콰콱!
“크악!”
“아아아악!”
아군들의 비명은 개의치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만 처리하면 되었다.
그러나 빗방울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닿는 순간 소멸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블라디미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병사를 베었고, 또 다른 병사를 베었으며, 그렇게 십수 명의 병사를 베었을 때 갑작스럽게 블라디미르의 눈앞에 나타났다.
마력을 폭발했다. 피 웅덩이를 일으키며 몸을 보호하려 했으나, 특별한 스킬을 사용하지 않은 공격이 그의 몸을 갈라 버렸다.
엄청난 충격에 블라디미르는 이를 악물면서 도주 스킬을 사용했다.
‘분열(分裂).’
팟.
몸이 찢겨 나갔다.
수백 발의 핏방울로 변해,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데.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번뜩.
파파파파팟.
수백 발의 핏방울이 모두 관통되었다.
단 한 방울만 벗어나도 목숨을 유지할 수 있건만, 그것이 모두 관통당하며 블라디미르의 마력이 단번에 소멸되었다.
러시아 최고의 실력자. 피를 활용하는 능력으로 수만 마리의 몬스터를 도륙했다고 알려진 존재가, 천마검법을 사용하지 않는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단 1분도 버티지 못했다.
특별함은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블라디미르를 처리하고는, 로만 드미트리는 다시 병사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확실한 선례. 이 한 번의 전쟁으로 모든 분쟁을 끝낸다.’
푸확.
피가 튀었다.
십수만의 병사.
죽이고 또 죽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데도, 멈추지 않겠다는 듯이 학살을 이어 나갔다.
시각적인 요소들이 눈에 빨려들었다.
병사들 사이를 날뛰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강렬함을 선사했다.
피로 흠뻑 물들었다.
머리가 피에 절었다.
완전히 핏빛 인간이 되었지만, 햇볕에 번뜩이는 검만큼은 매끄러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렇게 만 명 이상을 도륙했을 때.
“……이, 이건 아니야.”
“이길 수 없어.”
“괴, 괴물!”
병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느 순간부터 더는 달려들지 못했다.
단 30분.
사람들이 비상식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겨우 그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 * *
일련의 상황.
마르코프의 얼굴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현실을, 단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을 상식의 기준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건 아니야. 러시아가 패배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창백하게 겁에 질린 얼굴과는 다르게, 떨리는 목소리로는 연거푸 공격을 명령했다.
“고, 공격하라! 로만 드미트리를 죽이란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S등급 헌터들이 모두 학살당해 버린 지금, 일반 병사들을 이끌어줄 사람은 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코프의 외침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병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
로만 드미트리의 괴물 같은 모습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차마 무기를 들고 달려들 수 없었다.
저벅저벅.
로만 드미트리가 마르코프를 향해 걸어갔다.
모두가 길을 열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흥건히 물드는 핏자국에, 병사들은 현실을 외면하듯 시선을 피했다.
죽음이 다가왔다.
뒷걸음질을 치던 마르코프가 발라당 넘어졌다.
더는 도망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러시아는 패배를 인정하고 대한제국의 속국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끝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포식자였다.
더는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에, 목숨이라도 구걸해서 살아남고자 했다.
우뚝.
로만 드미트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마르코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마르코프. 검을 들어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네 선택에 목숨을 걸었다는 걸 증명하라.”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상대로 검을 들 수 있겠습니까. 한 번만, 단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중국과 미국이 그랬듯, 러시아 또한 대한제국의 편에 서겠습니다.”
애걸복걸했다.
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참으로 초라한 인간이었다.
본인이 강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더니, 상황이 뒤바뀌자 자비를 구걸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는 마르코프에게 동조했다. 그런데도 내가 너희 전부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전쟁이 이제 끝났으며, 너희는 동조했되 결정권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앞으로 속국으로 전락할 것이다. 대한제국을 따라야 하며, 이 나라는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충격이 번져 나갔다.
패배.
현실을 말했다.
앞으로 받아들여야 할 미래에, 병사들은 흔들리는 눈빛을 보였다.
“단, 나의 통치 아래 너희는 안전할 것이다. 속국이라고는 하나 너희의 자유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선택하라. 목숨을 걸고 끝까지 마르코프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모순되었다.
속국이지만,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
속국이지만,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이다.
하지만 말뿐일지라도 그것은 결정에 보탬이 되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자유와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말은 더없이 크게 다가왔다.
툭.
투투투툭.
“항복하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하나둘 무기를 버렸다.
처음에는 몇 사람의 용기였던 것이, 순식간에 번져 나가며 십수만의 병력이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들 또한 전쟁은 원하지 않았다.
마르코프의 야망에 진심으로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 것이 전쟁의 잔인한 현실이었다.
마르코프는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러시아가.
자신이 힘겹게 일구었던 강대국이 무너지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마르코프는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로만 드미트리! 나, 나를 죽인다면 국제 사회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세상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멈춰라. 여기에서 멈춘다면 더는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제발 멈추라고 이 개새끼야아아아!”
다가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걸음에, 마르코프는 실성한 모습을 보였다.
척.
검을 들었다.
머리를 한번 겨누더니, 살짝 들어 올리고는 차갑게 말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의 협박은 무의미하다. 네가 살고자 했다면 나보다 강한 힘을 갖추든, 아니면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어야지.”
모두가 보는 앞.
그렇게.
“네가 죽는 이유는 네가 나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번뜩.
퍽.
그대로 마르코프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