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화 서열 정리 (2)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박민우와는 달리 진실을 알지 못했다.
중국의 전부를 내준다는 왕위룡의 발언에 다들 감탄했지만, 사실 왕위룡의 천마신교 따위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천마 백중혁이야말로 천마신교의 전부인데, 그동안 겉핥기식으로 조사한 자료를 갖다 바친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왕위룡도.
로만 드미트리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굳이 발언한 이유는, 중국을 바친다는 상징성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박민우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비겁한 새끼. 감히 굴러들어 온 돌 주제에, 과거의 인연을 내세워서 내 자리를 차지하려 하다니. 하긴. 너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겠지. 김판석, 알렉산드르, 그리고 박민우. 세 번의 삶에서 세 번의 만남이라는 필연을 경험한 나를 제치려면, 천마신교를 들먹이며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이건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내 머리를 밟고 올라서는 건 아니지.’
이번 삶.
박민우의 우선순위는 명확했다.
처음에는 업보의 해소였지만, 그 경계가 무너지면서 지금은 로만 드미트리의 이인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고로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왕위룡의 모습은 매우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선물인데, 사람들은 왕위룡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박민우는 스스로를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이인자는 명확히 자신이지만, 천마신교의 후예라는 사실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왕위룡이 화백의 후손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그에게 ‘벽화’를 전수한 선조는 로만 드미트리가 친우라고 생각하는 존재였다.
끝까지 천마신교의 명맥을 이어 온 왕씨 가문의 행보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진심 어린 인정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부터는 말뿐인 후예가 아니다. 케빈에게 천마검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왕위룡은 언제 떡상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순간.
관계가 재정립되는 것은 한순간일 것이다.
그 불안감이 분노를 자극했고, 분노가 정도를 넘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왕위룡이 무대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당당한 걸음걸이에,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상상해 나갔다.
‘그래, 위룡아. 지금 많이 웃어 둬라. 모두가 너를 인정해도, 나는 절대 네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
차분하게 풀어 나갔다.
대륙 정벌의 야망을 품었던,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알렉산드르로 살았던 그 시절처럼.
박민우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 * *
무대 위.
로만 드미트리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가는 왕위룡, 그 모습을 시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박민우.
익숙한 그림이었다.
크리스와 케빈의 대립 구도처럼, 새로운 삶에서도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전쟁이 벌어졌다.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문득.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적인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 삶을 살았던 자신이, 전생을 추억할 때마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조차도 인간이었다.
자신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에 몸을 던질 수하들, 자신을 진심으로 위해 주던 한스, 부모라는 이름 아래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와 같은 인연들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삶의 굴레였다.
백중혁으로서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충분한 힘을 갖추었다.
확실했다.
자신은 새로운 삶에서 다시 한번 대륙 정벌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절대 영광스러운 결과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단순히 천마로서가 아니라 인간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게 해 준 그들이 곁에 있어야만, 자신의 삶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이 세상에 들이닥친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드미트리의 세계와 연결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당장은 현실에 집중했다.
과거의 기억은 뒤로 미뤄 두고,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눈을 붉히는 두 존재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판도가 만들어진 지금, 의미 없는 분란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증명의 자리가 필요하겠지.’
전생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천마신교.
힘의 논리를 따르는 집단이다.
어차피 필요한 과정임을, 로만 드미트리는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박민우와 왕위룡을 위한 판을 깔아 주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수하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가 앞으로 나서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부터 논공행상을 진행하겠다.”
* * *
축제의 백미.
논공행상이 시작되었다.
이미 사전에 논공행상 대상자들에게 수상 여부를 밝히며, 미리 보상을 생각하라고 말했다.
차례로 호명되었다.
처음은 김준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앞으로 대한제국은 상벌(賞罰)이 명확할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오로지 죄목만으로 평가받을 것이나, 공을 세운 사람들은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 인천 시장 김준혁. 러시아의 기습적인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해 낸 공을 인정하는바,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원하는 보상을 말하라.”
이 상황.
김준혁은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중앙 정부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을 경험하면서, 그는 새로운 영역에 눈을 떴다.
“황제 폐하를 만나기 이전만 하더라도 저는 제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은 한계가 존재하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인천에는, 대한제국에는 저와 같은 존재들이 필요합니다. 판도를 읽으며 진법을 사용하는 존재들. 저와 같은 책사(策士)를 육성하는 시설의 설립과, 그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대한제국을 지금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게 끝인가. 개인적인 욕망을 말해도 좋다.”
“충분합니다. 황제 폐하도 아시다시피, 인천의 부흥이 제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김준혁의 말.
진심이었다.
그에게는 충분한 보상이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굳이 보상을 덧붙였다.
“네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새로운 시설을 설립하는 것은 물론이며, 네 공에 합당한 재물 또한 지급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다음 차례.
이번에는 강민호였다.
김준혁과 같이 공을 세웠는데, 그는 고개를 조아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따로 보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밑바닥을 전전할 존재였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았기에, 저와 딸을 받아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김준혁과 강민호.
그들은 삶의 우선순위가 명확했다.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기에, 그들은 인생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는데도 욕망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진심을 대가 없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하들이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본인들의 선택에 조금의 후회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수하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했다.
선순환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주군과 신하의 경계가 명확하나, 신하의 충성심을 대가 없이 받아들이지 않기에 맹목적인 신뢰를 얻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기만족은 충분한 보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나라는 대가 없는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는 한, 앞으로 네 이름으로 매달 막대한 보상금이 지급될 것이다. 그것은 수호대를 도맡는 것에 대한 보상임과 동시에, 만약 네가 죽을지라도 보상은 네 딸에게 귀속될 것이다. 강민호. 혼란한 세상에서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언제 죽을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대한제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미래가 불안하다 할지라도 절대 불행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강민호의 상황을 이해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생각했다.
딸.
최우선순위였다.
그녀의 미래를 보장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강민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었다.
“그러니 내가 부여하는 모든 것을 누려라.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다.”
“……감사합니다.”
강민호의 음성이 떨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진심.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공을 치켜세워 주었지만, 사실 로만 드미트리가 모든 것을 끝내 버린 전쟁임을 스스로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보상을 거절했다. 단순히 러시아의 기습적인 공격을 막아 냈다고 해서, 당당하게 보상을 달라고 말할 만큼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딸에게 귀속되는 보상이라니.
받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염치가 없다고 말할지라도, 보상을 받아들이고 로만 드미트리에게 더욱 헌신하며 살 것이다.
일련의 상황.
그것 또한 겉치레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희생에 대한 보상을 지급했으나, 굳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논공행상을 진행하는 이유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대한제국의 방향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겉치레는 무의미하지 않다. 사람들의 희생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메시지는 반드시 필요했다.
계속되는 논공행상.
마침내 박민우의 차례가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의 보상을 예상했다.
케빈이 그랬던 것처럼.
왕위룡과의 확실한 서열 정리를 원한다면, 판을 깔아 주는 것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보상도 지급하려 했다.
그런데.
“백일을 황제 폐하의 공식 친위대 중 하나로 받아 주십시오.”
박민우는 전혀 뜬금없는 보상을 요구해 왔다.
* * *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논공행상도 모두 끝이 나자, 박민우는 홀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가 예상한 것처럼 왕위룡과의 서열전을 요구하고 싶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인자임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들끓는 감정을 억눌러야 할 때였다.
머릿속에 계획이 있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가면을 썼다.
백의의 마법사로서 무대 위에 존재했고, 무대에서 내려오며 백의의 마법사로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축제가 끝나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계획의 시작점.
마침내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는 모습에, 박민우는 서슴없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왕위룡.”
“말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슥.
샤오룽이었다.
박민우가 왕위룡의 이름을 부르자, 샤오룽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박민우를 노려보았다.
박민우의 존재.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른다고는 하나, 중국에서 왕위룡은 하늘과도 같은 존재다.
검 한 자루로 중국을 정벌한 전설적인 존재. 그런 왕위룡을, 박민우는 정말 시정잡배를 대하는 것처럼 조금의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박민우는 샤오룽의 발언에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잔챙이들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이, 왕위룡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너와 나 단둘이 따로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어때. 잔챙이들은 물리고 나와 같이 얘기 좀 나누는 게.”
“어디서 감히!”
샤오룽이 발끈했다.
검을 뽑으며 박민우를 제압하려는 순간, 왕위룡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웃었다.
박민우의 같잖은 태도가, 왕위룡의 심기를 자극했다.
“그래, 그렇게 하지.”
* * *
장소를 옮겼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한적한 장소에 도달하자, 박민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했다.
“왕위룡.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나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사이에는 특별한 비밀이 있어. 필연(必然)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인연으로 인해, 나는 지금 박민우라는 이름으로 황제 폐하의 곁을 지키고 있지. 그런데 왜 네가 주제도 모르고 계속 내 자리를 탐내는지 모르겠네. 나와 황제 폐하의 인연은 너 따위가 감히 개입할 수 없는 관계인데 말이야.”
명백한 적의였다.
박민우가 사납게 말하자, 왕위룡도 차갑게 반응했다.
“너야말로 주제를 모르는 것 같은데. 황제 폐하께 천마신교, 그 이상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마신교.
박민우의 역린이었다.
전생에 그는 무지렁이 김판석에 불과했다.
자신은 천마신교라는 연결 고리를 내세울 수 없다는 사실에, 박민우가 싸늘한 웃음을 보였다.
“역시 내 예상대로야.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내 심기를 건드릴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지. 그래서 황제 폐하께 서열전을 요청하지 않았어. 너를 완벽하게 찍어 누르려면 공개적인 무대는 그리 적절하지 않을 테니까.”
콰릉.
콰르르르르릉.
마력을 끌어올렸다.
박민우로부터 검붉은 마력이 피어오르더니, 당장에라도 마법을 분출할 것처럼 왕위룡을 압박했다.
“네게 하나 제안하지. 이 자리에서 나와 힘으로 서열을 정리하는 것이 어때? 패배한 녀석은 정말 개 같아도, 앞으로 일 년간은 삼인자로서 깍듯하게 ‘이인자님’을 모시는 거지.”
탁.
한 발 앞으로.
왕위룡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다가가더니, 그를 내려다보며 사납게 웃었다.
“결정해. 받아들일래, 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