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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62화 (562/615)

562화 기술 혁명 (9)

다들 자리에 앉았다.

불과 얼마 전.

국가 정상들이 모인 제2차 국제회의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파트리스를 필두로 한 세력들에게 공격을 받았었다.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당시 러시아의 대통령인 마르코프는 분노하며 자리를 박찼고, 곧이어 발발한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며 대한제국의 저력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평판이 완전히 바뀌었다.

대한제국은 강대국의 위상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발표회로 사람들의 마음마저 휘어잡았다.

그래서였을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쉽지 않은 결단임을 알기에, 로만 드미트리 황제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는 인류를 위한 희생이며, 저를 비롯한 모두가 오늘의 결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체 언제 그만한 기술력을 갖추신 겁니까? 발표회를 지켜보는 내내,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칭찬을 건넸다.

강력한 국력과 세상을 선도하는 기술력.

더는 대한제국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과거를 묻어 두고 로만 드미트리를 치켜세우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대세는 명백했다.

러시아를 압도적으로 무너트린 대한제국이 기술력마저 선도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제국은 과거 미국보다도 압도적인 위상을 갖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명분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인류를 위해 기술을 발표한 대한제국의 행보는 마지막 남은 심적 경계심마저 완벽하게 무너트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을.

로만 드미트리를.

화기애애하게 형성되는 분위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칭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여러분들을 따로 만나 뵙고자 한 이유는 몇몇 분이 대한제국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한제국은 가진 것의 일부를 공유했을 뿐이고, 앞으로 인류는 대재앙에 대항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대한제국의 선택을 누가 이해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모두가 알았다.

시선의 끝.

파트리스가 존재했다.

마르코프가 무너지며 파트리스의 세력은 궁지에 몰렸고, 대세를 따르는 사람들이 신랄한 목소리로 파트리스를 앞에서 비난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식은땀을 흘려 대는 파트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계속해서 대한제국을 끌어내리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움직이는 존재를 해치지는 않았다.

단순히 적대한다고 해서 마르코프처럼 머리를 날려 버렸다면, 단언컨대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세상은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명확한 선.

경계를 형성했다.

선을 넘었느냐 넘지 않았느냐가, 사람들에게 로만 드미트리의 잔인함을 받아들일 명분을 부여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에 절대자라는 존재가 처음 나타나고, 인류는 그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저는 인류의 생존을 바라기에 ‘기술 발표회’를 진행했지만, 인류가 겪어 온 역사를 알기에 기술 발표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자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인류를 핍박하는 일련의 과정은 명백하게 유희(遊戲)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번에 발발했던 6번째 대재앙이 20년 전에 세상을 휩쓸었다면, 인류는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이미 멸망했을 것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참담한 진실을, 로만 드미트리는 과감하게 들쑤셨다.

“절대자는 이 세상에 단계적으로 재앙을 부여합니다. 인류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충분한 재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은 강력한 힘을 인정받으면서도 절대자의 개라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실이 매우 못마땅합니다. 인류가 경험하는 모든 재앙은 절대자로부터 비롯되는데도, 그들에게 휩쓸려야 하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게 현실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류는 이대로 살다가, 절대자가 의도한 판대로 10번째 대재앙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때 인류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충분히 잘 버텼으니 절대자가 평안한 미래를 약속할 것 같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희망 사항에 불과합니다. 절대자는 단 한 번도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인류는 매 순간 절대자의 의도에 반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정돈된 혼란을 바랍니다. 절대자가 충분한 재미를 느끼지 못하도록, 어디에선가 우리를 지켜보는 그들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도록.”

정돈된 혼란.

모순된 단어였다.

하지만 뒤이어 내뱉는 발언은, 모순을 단번에 관통했다.

“이번 발표회가 그 시작입니다. 대한제국은, 저 로만 드미트리는 세계 정부를 이끌길 바랍니다. 대한제국이 중심을 잡는다면, 앞으로 찾아올 혼란에 인류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 * *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엄청난 야망이었다.

세계 정부를 이끌겠다는 말은, 대한제국이 이 세상을 통치하겠다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신호에, 정보부를 맡은 박기태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간단하게 ‘인류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재앙 초창기. 아직 멋모르던 시절의 인류는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힘을 합쳤습니다. 대재앙에 대항할 힘이 간절했기에, 그때는 다른 문제점에 신경을 쓸 겨를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대재앙이 반복되면서 인류는 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촤르르.

병사들이 자료를 가져왔다.

그것은 잘 정리된 데이터였다.

“대재앙 초기만 해도 문제가 발발했을 때, 각국은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면 시간을 3일 이상 지체하지 않고 주변을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레드 타임’과 같은 개념이 정립되면서, 대재앙이 반복될수록 주변 국가를 도와주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대재앙의 경우에는 평균적으로 보름의 시간이 소모되었습니다. 물론 레드 타임이 발발하고 보름 정도면 혼란이 정리된다는 통계가 있다고는 하나, 위험 지역과는 달리 안전한 나라들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죽어 가는 상황에서, 벌써 다음 대재앙을 생각해 본인들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는 그 사실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혼란이 정리되고.

혼란을 이해할수록.

인간의 이기심이 도드라졌다.

이번 대재앙에서 미국과 같이 어려움을 경험한 나라들이 있다면, 반대로 미국이 어려운 만큼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대재앙을 보낸 나라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통계가 증명하는 것처럼 무리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도움을 받았을지라도 명분을 챙기는 선에서만 위험을 감수했다.

인류의 문제였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혼란 속에서도, 어떻게든 이기적으로 득을 보는 방향을 찾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서로를 외면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한제국 또한 자국의 안위가 최선이나, 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을 절대자가 바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인류를 지켜보며 충분한 재미를 느끼고 있을 절대자의 모습에, 인류는 그에 반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돈된 혼란은 제가 제시하는 방향성입니다.”

말을 한번 끊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말 한마디 없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완전히 압도되었다.

“대한제국이 세계를 주도하겠습니다. 대한제국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나라들은, 앞으로 찾아올 대재앙에서 서로를 도와 문제를 해결하는 체계를 형성할 것입니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거리의 제약을 없애 버리고, 레드 타임과 같은 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서로의 문제를 살필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이 의견에 동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인들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도움은 쉽지 않고, 제가 말한 체계를 위해서는 언제든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는 위치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형성해야 합니다. 제 뜻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

군림의 시작점이었다.

발표회를 통해 마음을 휘어잡으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강한 채찍질을 가했다.

“저는 인류를 위해 대한제국을 희생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 찾아올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이번 발표회처럼 아무런 대가 없는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선택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충분히 고민하되 선택의 순간이 지났을 때는, 대한제국, 아니 제 도움을 받아 내기 위해서 지금과는 다른 노력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 * *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다들 각 나라로 돌아갔고, 미국으로 복귀한 존 해리슨은 생각에 빠졌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정말 무서운 인물이구나.”

그는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세상을 통치하고자 했다.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대담하게 본인의 야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미국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오랜 세월 세계를 주도하는 포지션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본인들이 세상을 통치한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다른 국가들이 힘을 합쳐서 반발할 것이 분명했다.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암묵적인 체계를 이어 갔고, 미국은 세계 제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대놓고 야망을 드러냈는데도, 그의 의견에 반발하는 사람이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기술 발표회를 통해 인류의 발전을 도왔다. 이미 마음의 벽을 한번 허문 상황에서, 세상을 통치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마냥 적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겠지. 실제로 이번 대재앙을 통해 대한제국은 차원이 다른 힘을 증명했고, 나를 비롯한 각국의 정상들은 앞으로 찾아올 혼란에서 대한제국의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노골적인 의도에도 반발할 수가 없는 거겠지. 알량한 자존심보다 대한제국의 힘이 더 필요할 테니까.’

대한제국의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가 세상에 스며들었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텔레포트 마법진의 존재로 인해 언제든 대한제국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한마디로 나라의 목숨줄을 내어 주는 꼴.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이 아무리 간절하다고 한들,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의 안위를 맡기는 것은 섣불리 결단할 수 없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구나.”

존 해리슨의 생각이 깊어졌다.

다시 한번 세계를 주도하겠다는 야망과 현실 사이에서, 그는 밤이 늦도록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위룡과 같은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끝없는 밤을 보냈다.

아직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1년.

만약 그 시간이 모두 지나고 나면, 어떤 방향이든 간에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 * *

그 시각.

세바스찬은 파트리스의 연락을 받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기술 발표회를 기점으로, 전 세계를 통치하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는 사실.

대단한 인물이었다.

단시간에 세상을 휘어잡는 모습에, 세바스찬은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신의 시련이 분명하다. 고지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는, 인류에게 악마의 속삭임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공교로운 상황이지. 신이 내 신앙심을 시험하고 있다. 성서를 통해 인류에게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했는데도,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악귀를 따른다면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겠지.’

지난 20년.

세바스찬의 세상은 켜켜이 쌓여 갔다.

마론교의 진리를 굳건하게 믿는 그로서는,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위험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순식간에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마론교는 20년간 천천히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건만, 겨우 1년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을 압도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경계심이 치밀었다.

세바스찬은 그동안 성서의 내용을 분석해 왔다.

하나의 문장도 십수 개의 의미로 해석했던 그에게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가 마론 드미트리의 강림을 방해하는 ‘악의 존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왜 하필 로만 드미트리인가.

MORON, ROMAN.

아나그램을 연상시키는 이름과 드미트리의 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의 시련임이 분명했다.

그로부터 몇 주 뒤.

세바스찬이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공간.

그곳에는 십수 명의 사람이 세바스찬을 기다리고 있었고, 한 여성이 세바스찬에게 다가와 말했다.

“1차 테스트 준비를 끝냈습니다.”

차원 이동!

그 시기를 앞당겼다.

아직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는 상황.

점점 마론교를 압박해 오는 악마의 속삭임에, 세바스찬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 실험을 진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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