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충격적인 진실 (3)
파트리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다.
적이라는 이유로 레드문, 중앙 정부, 러시아를 궤멸시켰던 존재기에, 적으로 규정한다는 그의 발언을 단순한 협박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감정. 파트리스는 주춤주춤 물러나며,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마론교를 따라 이번 국제회의를 주도한 것은 사실이나, 그건 정말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마론교를 따르는 사람이 무수히 많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도 존재하며, 조금 전에 대한제국을 따르겠다며 충성을 부르짖던 이들 중에도 신실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만, 프랑스만 용서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로만 드미트리 너머.
신도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국제회의 과정을 도와주었던 몇몇 인물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크흐흠.”
“우리는 프랑스와 다릅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나라들이라고요. 사실상 프랑스와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계획에 동참했다고 볼 수 없는 수준입니다.”
발을 뺐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파트리스를 외면했다.
‘이 새끼들이.’
분노가 치밀었다.
같이 죽기 싫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파트리스와의 관련성을 떨쳐 내려 했다.
다급한 건 파트리스였다.
아무리 화가 날지라도,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갑게 바라보는 로만 드미트리를 달래야만 했다.
“황제 폐하. 제 잘못을 전부 부정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을 적대한 것은 잘못된 일이나, 이 모든 것은 저 간악한 세바스찬이 작정하고 저희를 속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마론 드미트리가 인류의 희망이라고 믿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마론교를 믿고 따르는 것처럼, 저 또한 세바스찬의 말대로라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을 뿐입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툭.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제발…….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앞으로 황제 폐하를 위해 살겠습니다.”
간절했다.
충격받은 세바스찬의 시선은 무시한 채, 파트리스는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간과 쓸개를 전부 내주었다.
바들바들 떠는 모양새가 참으로 애처로웠다. 프랑스는 강대국으로 분류되는 나라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프랑스보다도 강력한 국력을 갖추었던 러시아조차도 꼿꼿하게 굴다가 단번에 쓸려 나가지 않았던가.
이 자리.
처형식이 되었다.
목숨을 구걸하는 파트리스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가 차갑게 말했다.
“세상 대다수가 마론교를 믿고 따른다. 네 말처럼 죄를 묻는다면 그들에게도 잘못이 없지는 않으나, 문제는 너에게는 한 나라를 움직일 만한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파트리스. 확인되지 않은 진실로 악행을 실행에 옮긴 사람은 소수다. 너는 국제회의를 주도했고, 설령 네가 전적으로 세바스찬에게 속았을지라도 네가 행한 일들의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화, 황제 폐하! 제발!”
“자비는 무의미하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부정할 수 없는 결과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스릉.
검을 뽑았다.
시선을 돌려, 대한제국을 따르겠다고 말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인류의 분열을 초래한 파트리스를 처단하고자 한다. 반대하는 자들은 의견을 밝혀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언(無言)의 동의.
다들 로만 드미트리를 따랐다.
단순히 권력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드미트리의 악귀를 직접 처단한 선례가 있었다.
비록 전승자일지라도.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였던 그가 케빈의 전승자를 서슴없이 처리했던 일을 생각한다면, 이번 처형 또한 부당한 일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명확한 명분.
적합한 처벌.
체계가 존재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변함이 없는 잣대를 들이밀었다.
시선을 돌렸다.
파트리스를 내려다보며, 그에게 잔인한 현실을 선사했다.
“처형을 집행하겠다.”
* * *
끝났다.
파트리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한 그는, 아직도 넋을 잃고 있는 세바스찬에게 다가가 사납게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야! 마론 드미트리라며. 성서의 내용대로라면 마론 드미트리가 이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널 철석같이 믿고 따랐는데, 지금 이 상황은 뭔데? 대체 뭐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도 보았지만, 세바스찬은 반응하지 않았다.
“씨이발, 뭐라도 해 보라고. 널 믿고 따른 사람들을 위해, 저 괴물 같은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
퍽.
머리가 날아갔다.
바로 코앞에서 부르짖던 머리가 허공에 떠오르며,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가 그대로 세바스찬을 흠뻑 물들였다.
툭.
데구루루.
파트리스의 머리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아직도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표정에, 세바스찬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20년간 믿고 따라 왔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진실, 켜켜이 쌓아 왔던 공든 탑이 단번에 무너지는 눈앞의 상황.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 버린 지금, 세바스찬은 전신을 장악하는 무력감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슥.
로만 드미트리가 자세를 낮추었다.
시선을 마주치며,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너를 처단하기 전에 하나 물을 것이 있다. 세바스찬. 너는 어째서 마론 드미트리의 존재를 확신했지?”
“…….”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참으로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30년 전. 아직 대재앙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시절에, 어째서 하필이면 언어학자인 네 앞에 ‘헨리 앨버트의 일대기’가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우연이라 할지라도 책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내용 중 유일하게 내 이름만 훼손되었으며, 스킬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던 시절에 네 곁에 복구 마법을 사용하는 존재가 있었던 것은 과연 우연일까. ROMAN이 MARON으로 해석되었다고는 하나, 이후 스킬이 발전했는데도 왜 오류는 바로잡지 못했던 것일까. 일련의 상황들을 한발 떨어져서 지켜보면 누군가 대본이라도 만든 것처럼 의문점은 한둘이 아니다. 너는 대체 왜 네 삶에 의문을 지니지 않았지?”
순간.
세바스찬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의문점들을 나열하는 상황에, 그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듣고 싶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설령 다른 진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파트리스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죽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세바스찬 너머에 있는 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안드레스라고 했나. 네게 묻겠다. 너는 차원 이동을 가능케 하는 그 스킬을 어떻게 얻었지?”
* * *
지난 1년.
로만 드미트리는 마론교에 대해 조사했다.
마론교가 말하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들에 대해 알아 갈수록 단순하게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참 공교로웠다.
우연히 세바스찬에게 일대기가 전달되면서부터 마론교가 탄생하는 과정.
그것까지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문제는 세바스찬의 곁에 항상 실마리를 제공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훼손되었던 이름을 복구시켜 주었던 마법사. 그리고 강제 소환이라는 특별한 스킬로 마론교의 토대를 형성해 준 안드레스라는 존재.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의문이 증폭되었다.
‘과거 이 세상의 기술력은 발달하지 않았다. 스킬조차도 제한적이었고, 대재앙 초창기만 하더라도 마법사의 존재는 매우 희귀했다. 그런데 그때 그 시절에 차원을 넘나드는 스킬을 보유한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수십억 인구에 단 한 명에게만 허락될지도 모르는 특권을, 하필이면 세바스찬을 따르는 마법사에게 부여되었던 것은 정말 우연일까.’
강제 소환.
소지품을 매개체로 상대를 불러들이는 스킬.
앞에 붙은 전제 조건은 복잡한 스킬처럼 보이지만, 사실 강제 소환의 실체는 공간을 넘나드는 엄청난 능력이었다.
수십 년 전이라면 A등급 몬스터 한 마리를 상대로도 나라의 명운을 걸었어야 했다.
그 시기에 허락되는 스킬이라기에는, 강제 소환은 과할 정도의 능력을 보였다.
이상했다.
작위적으로 맞물리는 부분들을 확인하며, 로만 드미트리는 김판석에게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
“나는 마론교가 주도하는 함정에 기꺼이 발을 들일 것이다. 너는 그 자리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을 지켜보아라. 과연 수십 년 전이었어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인지, 그것이 스킬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되는 영역인지를. 네 능력이라면 충분히 진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
헨리 앨버트가 사라지고, 김판석으로부터 마법 음성을 들었다.
[황제 폐하. 아무래도 이건 일반적인 스킬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 * *
안드레스가 당황했다.
갑자기 집중되는 시선에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어떤 이상한 오해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사용하는 강제 소환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스템’을 통해 터득한 것입니다.”
그럴듯한 변명.
아니, 모든 것을 뭉그러트릴 수 있는 변명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스킬이라고 한들, 시스템을 통해서 배웠다고 말한다면 더는 추궁할 수 없었다.
초월적인 힘.
그것은 모두 시스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비상식을 지적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네가 사용한 것이 정말 스킬이라면 네 말을 믿었을지도 모르지. 그동안 이 세상 사람들은 스킬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시스템은 편리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하고, 원리를 터득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배제한 채 ‘스킬’을 발현하지.”
“알고 있습니다. 기술 혁명을 일으키며 공개했던 부분이 아닙니까?”
“그래. 최초의 대재앙이 발발하고 20년이 흐른 지금, 내가 발표한 사소한 기술도 사람들은 기술 혁명이라며 치켜세웠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방금 발현한 스킬은 일반적이지 않다. 단순히 과정을 자동으로 해석해서 스킬을 발현한 것이 아니라, 마나의 운용 체계를 파악하고 마나를 정확하게 다루었다. 안드레스. 너는 그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지? 네가 20년 전에도 강제 소환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술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마나 운용을 너는 그때부터 할 줄 알았다는 의미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점점 굳어지는 안드레스의 표정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내뱉지 못했다.
“마론교에 대해 알아보며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필이면 언어학자인 세바스찬에게 내 일대기가 전달된 것은 우연일까. 이름이 훼손되었던 것도, 강제 소환이라는 그때 당시에는 허락되지 않는 스킬을 사용하는 존재가 세바스찬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도. 과연 그것들을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일련의 상황에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최초의 대재앙. 그것은 절대자의 유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순수한 악의(惡意)로 이 세상을 망쳤고, 그들이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으며 바란 것은 일말의 재미다.”
절대자.
그들과 비슷한 존재는 전생에도 있었다.
따분함을 이기지 못해 마계를 침공한 존재들.
그들로 인해 마계에 변화가 생겼고, 마왕은 훗날 지상계를 공격하는 선택을 내렸다.
“20년 전.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네게 허락되었던 힘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가 이득을 보는 것. 두 번째는 시대를 초월하는 혜택을 부여받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런 전제 조건이 성립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특별한 존재로 추대받으면서도, 간혹 인류에 해악을 일으켜 왔던 부류들.”
뚝, 뚝.
검을 타고 핏방울이 흘렀다.
서늘한 시선이 안드레스를 향했다.
“너는 선택받은 자인가.”
세바스찬이 눈을 부릅떴다.
선택받은 자.
모호한 존재들이었다.
세상을 멸망에 빠트린 절대자의 후원을 받는,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인류를 구원하면서도 존재 자체에 의문을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들.
세바스찬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였다.
안드레스와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그가 선택받은 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그때였다.
방금까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던 안드레스가, 얼굴 전체에 균열이 일어나듯 웃음을 보였다.
“머저리 같은 새끼 때문에 퀘스트에 실패해 버렸네. 로만 드미트리. 미안한데, 거기까지만 하자고.”
탁.
한발 물러났다.
로브를 펄럭이며, 자신의 몸 전체를 감쌌다.
“세바스찬. 그동안 재밌었다.”
확.
마력이 일었다.
전신을 휘감으며, 그대로 차원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안드레스는 차원을 다루는 능력을 보유했고, 괜히 섣부르게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SS등급 몬스터를 쓰러트린 괴물. 단순한 무력으로는 절대 쓰러트릴 수 없겠지만, 그의 능력으로 차원을 넘나드는 자신을 추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칠흑 같은 공간.
안드레스가 차원의 경계에 빠져들었다.
곧바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순간 그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콰르르르르릉.
차원의 경계.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안드레스가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그 존재가 안드레스의 머리칼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밖으로 내팽개쳤다.
팍.
콰당!
얼굴을 처박았다.
볼품없이 나뒹군 안드레스는, 머리를 짓누르는 우악스러운 손길을 느꼈다.
“감히 내 앞에서 마법으로 잔재주 부리지 마.”
사나운 목소리.
그는 바로 김판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