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화 충격적인 진실 (5)
안드레스의 자백.
그간의 타임라인(timeline)이 명확해졌다.
아직 대재앙이 시작되기 이전, 절대자들은 이미 이 세상을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차원 너머에서 ‘헨리 앨버트의 일대기’가 넘어왔고, 절대자들은 의도적으로 세바스찬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일대기가 해석되면서 대재앙이 시작되었고, 절대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전승자와 같은 존재들이 탄생하면서 강림의 때를 미루며 피날레를 천천히 준비했다.
마지막.
인류가 희망이랍시고 소환한 로만 드미트리와의 분열.
그것이야말로 절대자들이 바란 피날레이건만, 로만 드미트리가 직접 나타나며 상황은 반전되었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했다.
안드레스가 자백했다고는 하나 백 퍼센트 믿을 수는 없으며, 절대자들이 30년 전부터 대재앙을 준비해 왔다면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만큼은 단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적어도 인류의 주적은 서로가 아니라 절대자라는 분명한 사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내가 처음 절대자의 존재에 의문을 지녔던 이유는 전생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대기의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샐러맨더 대륙이 마계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왕은 자신의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지상계를 공격했지만, 사실은 그것은 마계의 케케묵은 역사로부터 비롯되었다. 먼 옛날에 마계조차도 ‘차원 너머의 괴물들’에게 공격받았다. 마치 절대자가 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과 같은 위기였고, 마계는 그로부터 시작된 황폐화로 차원이 분열되기 시작했지. 나는 차원 너머의 괴물들이 절대자와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설령 아닐지라도, 그들로 인한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생과 전생.
운명의 연결 고리로 엮여 있었다.
두 세상은 절대 무관하지 않았다.
“너희가 생각하기에 절대자의 목적은 무엇인 것 같나.”
“……유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말고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들은 유희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들은 신에 버금갈 뿐 절대 신이 아니며, 그들에게 있어 마론교는 정말 흥미로운 장치였겠지. 인류를 분열시킴과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간 세계의 절대자를 소환할 절호의 기회. 그들은 나를 감당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마론교의 일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묻겠다. 안드레스는 절대자들이 세상 일부를 남겨 준다는 약속을 했다고 말하지만, 너희는 정녕 인간을 장난감으로 여기는 존재들이 약속을 이행하리라고 생각하나.”
회의실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모두가 알았다.
약속의 이행은 희망 사항일 뿐이라는 사실을.
10번의 대재앙을 모두 막아 낸다고 해서, 반드시 인류에게 희망이 허락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전생의 결말은 현생과 무관하지 않다. 차원 너머의 괴물들이 마계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인류는 절대자들로 인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절대자들에게 있어 약속의 이행보다는 배반당한 인류를 지켜보는 것이 더한 재미를 선사할 테니까. 나는 확실하지 않은 희망에 인류의 명운을 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하나로 만들어,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하나의 계획을 실행하고자 한다.”
판은 깔렸다.
대한제국 수뇌부들이 비장한 표정을 보였다.
그들은 이미 받아들인 현실이나, 각국의 수장들은 지금부터 거론되는 얘기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차원의 경계. 그것을 넘어 직접 절대자를 처단할 것이다.”
* * *
충격적인 발언.
각국의 수장들이 경악했다.
10번의 대재앙이 찾아오기도 전에 절대자를 처리하겠다는 말은, 그들의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똑같았다.
대한제국의 수뇌부들이 그랬듯.
미국의 대통령 존 해리슨이 말했다.
“……황제 폐하가 불가능한 계획을 말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차원 너머에서 공격해 오는 몬스터들을 막아 내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절대자를 직접 상대한다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모릅니다. 아니, 그런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차원의 경계를 넘어 절대자를 찾아내는 것조차 힘든 일입니다.”
“존 해리슨 대통령의 말이 옳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는다면, 섣부른 판단으로 파멸을 앞당길 수도 있습니다.”
걱정이 앞섰다.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불안, 초조, 걱정.
명백하게 드러나는 감정들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단을 뒤로 무르는 것이, 반드시 인류를 위한 일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시간. 그래, 시간이 필요하겠지. 만반의 준비를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절대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인류에 들이닥친 재앙과 희망은 모두 절대자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절대자는 이 세상에 재앙을 선사했고, 동시에 시스템을 통해서 재앙에 대항하는 힘을 부여했다. 그것은 명백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추든, 인류에게 허락되는 힘은 절대자가 결정한다는 진실. 10년 후나 20년 후. 그때는 절대자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그때도 우리는 절대자의 자비에 인류의 명운을 걸어야만 한다.”
잔인한 진실이었다.
애써 외면하고자 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진실을 들추며 사람들에게 현실을 보여 주었다.
“시간은 인류의 편이 아니다. 너희가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10번째 대재앙 이후를 계획하는 절대자들에게는 최악의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 낸 판에서 놀아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전쟁은 ‘우리만’ 감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몰랐다.
지난 1년.
로만 드미트리가 무엇을 준비했는지를.
“나는 드미트리의 세계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 * *
절대자.
그들은 차원 너머 드미트리의 세계를 파악했다.
이 세상이 멸망하고 나면,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스토리를 가지고 드미트리의 세계를 농락할 것이 분명했다.
고로 현생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언젠가 드미트리의 세계에도 번질 화마(火魔)라면, 두 세계의 힘을 합쳐서라도 절대자의 존재를 척결할 필요가 있었다.
김판석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제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지난 1년. 대한제국에서는 마론교와 마찬가지로 차원 이동 마법의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총 19차례 반복한 실험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차원의 통로를 완벽하게 확보하는 것에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 안드레스의 마법을 보고서 저희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일 년에 두 번, 서로의 차원이 완벽하게 맞물리는 때를 노려 차원 이동 마법을 사용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드미트리의 세상 사이에 ‘통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마론교.
그들을 방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김판석은 안드레스의 마법을 지켜보며, 서로의 세상이 맞물리는 타이밍과 기술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눈으로 파악했다.
그것은 김판석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왕을 따르던 시절에 그는 차원의 경계를 연구해 마계와 지상계를 연결하고자 했다.
악의로부터 비롯된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생에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근간이 되었다.
인간들.
아니, 초월적인 존재들조차도 김판석보다 차원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은 누구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이 아닌, 수많은 세월 동안 켜켜이 쌓아 온 김판석만의 무기였다.
“그리고 드미트리의 세계와 힘을 합친다면,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자를 찾는 일 또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드미트리의 세계는 마법 문명이 꽃을 피운 세상. 그들의 기술력은 앞으로의 계획을 실행하는 것에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김판석에 이어.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사실 절대자를 상대하는 일에 이 세상 전체가 화합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드미트리의 세계를 불러들인다면, 나는 너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강력한 전력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인류의 배반자들을 척결하면서까지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명확하다. 나를 믿어라. 인류가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절대자는, 내가 직접 상대해 반드시 척결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인류를 위한 희생이다. 우리가 절대자를 공격하겠다는 결론을 내리는 순간, 10번으로 나누어진 대재앙이 압축되어 인류를 절망에 빠트릴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수많은 사람이 죽겠지만, 나를 믿고 감당하라. 나를 믿고 몬스터들에 대항하라. 차원의 경계를 허물고 절대자를 찾는 순간, 너희의 죽음을 대가로 나는 반드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하나의 계획.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수백, 수천의 규모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계획.
그런데.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어 달라는 단순하고 무모한 계획이, 각국의 수장들에게는 알 수 없는 확신을 주었다.
지난 20년.
절망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보장받지 못하는 약속에서 희망을 찾았고, 참담한 진실을 알면서도 절대자의 광대라도 되는 것처럼 희망이 존재한다고 부르짖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은 이전의 삶과는 달랐다. 수많은 사람이 죽을지라도, 단 한 번의 승리로 인류는 직접 평화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였을까.
침묵을 뚫고, 한 사람이 말했다.
“……따르겠습니다. 10년 뒤에 죽든, 지금 당장 죽든. 어차피 희망이 없다면 차라리 황제 폐하를 믿고 싶습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말처럼 그동안 현실을 외면해 왔습니다. 10번의 대재앙을 모두 막아 낸다고 해도 반드시 평화로워진다는 확신이 없는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습니다. 희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기꺼이 목숨을 걸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인류가 희망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저는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의지.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정말 인류의 평화를 손아귀에 움켜쥘 수 있다고 생각하자 사람들은 목숨을 걸었다.
지금은 그간의 국제 관계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등. 어떤 이들은 유럽 연합이라는 이름 아래에 힘을 합쳐 왔고, 어떤 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엇나가는 모습을 보여 왔지만,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지금 그것들 전혀 중요치 않았다.
하나의 집단.
하나의 목적.
뜻을 모았다.
차례로 충성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강렬한 열망을 받아들였다.
“너희의 뜻을 받아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차원이 맞물리는 다음 시기가 찾아올 때까지, 우리는 2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첫 번째는 모든 국가의 전력 강화, 그리고 두 번째는…….”
안드레스.
그 존재로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선택받은 자들의 포획이다.”
* * *
거대한 공간.
그곳에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는데, 한 사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옆에 있는 여성에게 물었다.
“대체 언제 일어나는 겁니까.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저도 언제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영혼을 잃어버린 육체는 인위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지 않는다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영혼’이 소환된 것이라면, 우리는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아.”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했다.
화도 나고, 마음 같아서는 소리를 미친 듯이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선을 들자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평민에서부터 귀족까지.
여러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 공통된 목적으로 매일같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었다.
특히 초췌한 얼굴의 한 사내.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에서 살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모습에, 언제는 화를 내며 제발 쉬라고도 말했었다.
자신만 답답하고 힘든 것이 아님을 알기에, 사내는 참담한 표정을 보이면서도 들끓는 분노를 삭였다.
그때였다.
움찔.
“어?!”
“우, 움직였습니다!”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중심에 누워 있는 사내.
그가 마침내 반응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른침을 삼켜 가며 지켜보는 상황에, 시체처럼 누워 있던 사내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끄으으.”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성.
그의 눈에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드미트리의 세계.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사내는 목이 잠겨 탁한 목소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다른 그 어떠한 말보다, 반드시 전달해야 할 사실이 있었다.
“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만났습니다. 드디어 그분을 만났습니다.”
사내의 정체.
그는 바로 헨리 앨버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