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 (2)
로만 드미트리의 실종.
그로부터 수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 사이에선 공석이 되어 버린 자리를 일단 누군가라도 메워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물론 로만 드미트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대륙 전체를 통치하는 나라이니만큼, 언제까지고 공석으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때.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 로드웰 드미트리였다.
드미트리의 핏줄이자, 아르카디아를 ‘나라’의 형태로 재건하며 지도자로서 능력을 증명한 인물.
밑으로 로렌 드미트리가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능력이나 강인한 성정을 보았을 때 로드웰 드미트리만 한 적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여론이 쏠렸다.
자식 하나 없는 로만 드미트리의 자리를 물려받기에는, 로드웰 드미트리가 유일한 선택지라면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의 즉위(卽位)는 예상치 못한 문제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당사자인 로드웰 드미트리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없습니다. 단순히 훗날 분란의 여지가 생길 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저로서는, 아니 세상 그 누구라 할지라도 드미트리 제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국 회의.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인 앞에서, 로드웰 드미트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을 보였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드미트리 제국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건국된 나라가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라는 초인적인 존재가, 상식적으로 감당하지 못할 모든 역경을 이겨 내고 이 나라를 만들어 냈습니다. 인간은 분란을 되풀이하는 종족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도 ‘하나의 나라’에 충성을 맹세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에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철인 정치(哲人政治)의 단점은 이상적인 현실을 만들어 낸 소수의 부재. 단 한 명이지만 절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자리는 메울 수 없습니다. 제가 아르카디아를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 냈고, 아무리 드미트리의 핏줄이라고 한들, 로드웰 드미트리는 로만 드미트리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드미트리라는 거대한 나라가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로드웰 드미트리가 로만 드미트리만큼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때부터 문제는 시작될 것이다.
믿음에 균열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할 것이고, 그것이 분열로 직결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다 할지라도.
공석을 해결할 필요는 있었다.
막막한 미래에 답답함을 표출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로드웰 드미트리가 하나의 해답을 제시했다.
“문제를 해결할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면, 제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뒤를 이어받는 것이 아닌 대리인으로 남겠습니다. 그분이 돌아오신다면 언제든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는 존재. 저의 대리인이라는 위치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희망’을 남길 것입니다.”
그날.
드미트리에는 대리인의 선정을 축하하는 그 어떠한 자리도 마련되지 않았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바였다.
* * *
그리고 현재.
로드웰 드미트리는 사람들의 신임을 받았다.
각국의 수장들이 그에게 예를 표했고,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헨리 앨버트에게 본론을 물었다.
“앨버트 백작. 그곳에서 ‘무엇’을 경험한 거지?”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의 관심사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만났다는 헨리 앨버트가 대체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상황에, 헨리 앨버트는 담담하게 시선을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처음 그 세상에 ‘빙의’되었을 때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고, 처음 보는 인물이 통역 마법을 통해 제게 헨리 앨버트인지 물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누군가가 일대기를 통해 저를 소환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제 눈앞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실종되기 직전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밀려들며, 사람들은 이 상황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헨리 앨버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은 마냥 좋기만 한 소식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세상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제가 작성한 일대기를 확인한 것 같았는데, ‘마론 드미트리’라는 처음 듣는 인물을 거론하며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적대시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일대기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빠득.
회의실 한편.
케빈이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감히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한다는 발언에, 그때부터 케빈의 눈빛이 눈에 띄게 살기로 번들거렸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제게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제가 기억하는 전부입니다. 제가 그 세상에 존재하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그 이상의 것을 얘기하거나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로만 드미트리의 생존 여부.
가장 중요한 문제를 확인했다.
그 희망 하나만으로도,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한 이 세계가 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말했다.
“앨버트 백작. 덕분에 우리는 황제 폐하의 생사를 알게 되었다. 고맙다. 너로 인해 드미트리 제국은 희망을 얻었고, 이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반드시 보상하도록 하겠다.”
보상.
평소의 헨리 앨버트라면 기꺼이 받아들였을 일이다.
오래전에는 앨버트 가문의 망나니라 불렸고,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면서 세월의 풍파를 경험했다.
그에게도 철없는 시절은 분명히 존재했으나 지금의 헨리 앨버트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게 보상이 주어지는 것보다, 그 보상조차도 황제 폐하를 위해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 * *
3년 전.
샐러맨더 대륙에 문제가 발생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찾겠다고 차원 실험을 반복한 탓에, 차원의 경계가 뒤틀리면서 마계의 잔재들이 지상계로 넘어온 것이다.
마왕이 존재하던 시절만큼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준도 아니었기에, 대륙 곳곳에서 마계의 잔재들과 목숨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치열한 전쟁.
그 결과는 인간들의 승리였다.
드미트리 제국은 마계의 잔재들을 완벽하게 쓸어버렸지만, 그렇다고 피해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폐허가 되어 버린 땅.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불길을 바라보며, 드미트리의 병사가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마계 정벌을 시도하던 시절, 저는 밖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때는 현실을 잘 몰랐습니다. 세상이 정말 위험하다고 말하기에 두 손을 꼭 모았고, 언제나 그랬듯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계의 잔재를 경험하니, 저를 비롯한 바깥에 존재하던 모두가 얼마나 현실에 무지했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마계의 악마들.
강력했다.
고된 훈련을 감당한 병사들조차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피가 튀는 전장에서 살점이 뜯겨 나가는 와중에 악마의 심장에 무기를 쑤셔 넣었다.
그렇게 동료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분명히 완승이라고 할 만한 전쟁이었지만, 수많은 악마의 시체보다 몇 안 되는 동료의 죽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계와의 전쟁.
그때와 비교하면 이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마왕이 존재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음을 알기에, 병사는 자꾸만 과거를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무엇을 감당했는지. 그분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냈는지. 이제는 정말 알 것 같습니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땅이 되어 버렸을 겁니다. 저는 말입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기에 인간이라 불린다고 생각합니다.”
간부를 보았다.
그도 같았다.
병사와 똑같은 눈빛을 보였다.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존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업적을, 그분의 행보를.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한들 절대 잊지 않도록. 저를 비롯한 모두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다시 이 나라를 통치하기를 바랍니다.”
* * *
그날을 기점으로 사람들의 감정이 들불처럼 번졌다.
모두가 목소리를 높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후대에 남기자고.
그분의 행보를 매년 매 순간 되새기며, 언제 돌아올지 모를 그분을 위해 항상 준비를 해 두자고.
카이로의 대저택.
세상 전체로 번져 나가는 사회 현상에, 헨리 앨버트는 창밖 너머로 잘 가꾸어진 정원을 바라보았다.
행복한 삶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대저택에서 살았고, 하루에 1시간도 되지 않는 산책 중의 상념을 위해서 정원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정원을 가꾸었다.
정말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본인의 입지는 탄탄대로였고, 사촌 동생이 드미트리 가문과 혼인을 맺으면서 ‘앨버트 가문’은 그야말로 명문으로서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망나니 시절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행복한 나날에, 문득 헨리 앨버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행복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정답은 명백했다.
로만 드미트리.
모두 그 덕분이었다.
남부 전선에서 그를 만나 헨리 앨버트는 기회를 움켜쥐었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존재가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헨리 앨버트와 지금의 헨리 앨버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행복은 이 세상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카이로.
외세의 침략으로 항상 불안했던 나라.
대륙의 양대 산맥은 약소국들에 불합리함을 강요했고, 힘이 없는 자들은 수탈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최소한의 상식이 적용되었다.
여전히 강한 자들이 살아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나, 적어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상식의 영역에서 판단했다.
세상이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변화시켰다.
그가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았고, 사람들이 비로소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
마음에 공허함이 생겨났다.
이 모든 것은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는 이 세상을 제대로 누려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항상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 떠들고 다녔던 헨리 앨버트기에, 어느 순간부터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았다면 로만 드미트리를 부르짖는 사회 분위기에 어떻게든 이득을 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걸음을 돌렸다.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끼익.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펜을 들더니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첫 장.
[위대한 영웅의 업적을 기리며.]
자신이 기억하는 로만 드미트리, 그의 일대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작은 정성이라도 그분의 귀환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한 자 한 자, 정성을 담아 새겨 넣었다.
* * *
헨리 앨버트의 대답.
말뿐이라도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반응을 경험할 때마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자신이 더더욱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무리 평화롭다고 한들, 이 세상을 완성할 마지막 퍼즐은 내 형이야. 형이 돌아와야만 사람들은 진심으로 평화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겠지.’
스스로도 알았다.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를 대체할 수 없음을.
헨리 앨버트는 분명히 본인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그조차도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주는 모습이 여론을 증명했다.
모두가 바라는 공통의 목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빈자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왔는지를 깨달았다.
대리인으로서 역할.
로만 드미트리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그때까지 드미트리 제국을 굳건하게 지켜 내며, 그가 돌아왔을 때 고스란히 돌려주어야만 한다.
그때였다.
“헥토르 국왕께서 입장하십니다.”
에드윈 헥토르.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드미트리를 찾아왔지만, 특별한 이유로 회의에는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덜컥.
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바라는 결과가 있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존재하는 ‘차원의 좌표’를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대륙 제일의 마법사.
그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