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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80화 (580/615)

580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 (4)

한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귀족의 작위를 하사받고도 드미트리 가문에 남았고, 여전히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하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드미트리가 황제의 가문이 되었다는 것.

그의 지시를 따르는 하인들이 수백 명에 달했지만, 한스는 단 한 번도 귀족의 작위를 내세우는 경우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전.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런 부탁을 했었다.

“크리스 님. 저도 회의에 참석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저도 귀족이지 않습니까. 만약 제 자리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뒤편에 서서 잔심부름을 하는 역할이라도 좋습니다.”

가슴이 짠했다.

한스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를 알면서도, 크리스로서는 일단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각국의 수장들, 그리고 드미트리에서 주요 인물로 분류되는 사람들. 아무리 한스라지만 그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다.

결국에는 청을 거절했다.

그 이후로 줄곧 밖에서 기다렸는지, 한스는 반색하며 황급히 달려왔다.

“크리스 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 듣기로는 헨리 앨버트 백작님이 ‘황제 폐하의 존재’를 언급했다는데, 그렇다면 희망이…….”

“한스 남작님.”

말을 끊었다.

두서없이 말하는 한스를 내려다보며, 크리스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존재하는 좌표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저희는 그 좌표로 이동할 방법을 모색할 것이며,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한스 남작님이 바라는 대로 황제 폐하를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침착하십시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이 일에 필요한 것은 조급해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아아-.”

한스가 눈을 크게 떴다.

크리스가 걱정하는 말을 뒤에 덧붙였지만, 한스의 머리에는 희망적인 단어들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드디어 찾았군요.”

눈물이 핑 돌았다.

드미트리 가문, 그것도 로만 드미트리 황제를 전담해서 맡았던 한스에게 황제의 부재는 참으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지난 몇 년간 큰 상실감에 빠졌다.

한스는 주인을 잃은 방을 하루도 빠짐없이 청소했고, 잠자리에 들 때면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황제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황제와의 마지막 만남.

늘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게 마지막 만남일 줄 알았다면, 한스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졌을 것이다.

“……크리스 님. 황제 폐하는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겠지만, 제게는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분이 태어났을 때도, 엇나가며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을 때도, 드미트리를 이끌고 세상을 구해 냈을 때도. 한결같이 제가 모시는 ‘로만 드미트리’였습니다. 그러니 좋은 소식이든 좋지 않은 소식이든 제게 꼭 말씀해 주십시오.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는 건 싫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스가 고개를 숙였다.

차오르는 감정에, 바닥에 뚝뚝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 * *

회의 결과.

그것은 로메로 드미트리에게도 전달되었다.

복잡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에, 아내인 리한나 드미트리가 다가와 물었다.

“여보. 괜찮아요?”

“괜찮소.”

고개를 돌렸다.

애써 웃음을 보였지만, 로메로 드미트리가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아내로서 모를 수가 없었다.

아내의 눈빛을 읽었기 때문일까.

로메로 드미트리의 표정에 균열이 일더니, 다시 시선을 피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난 말이오. 내가 완벽한 아버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아버지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소. 그런데 내 아들이 모든 짐을 떠안고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아들의 마음도 몰라보는 무심한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소. 로만은 그때 이별을 말하려고 왔건만, 나는 아들의 마음도 몰라보고 진심을 표현하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다니. 참 한심한 인간이지. 그때의 그 순간이, 마지막으로 내게 뒷모습을 보이던 로만의 모습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구려.”

가슴이 아팠다.

마지막 만남.

로만 드미트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로메로 드미트리의 아들로서 감사하다는 진심을 표현했다.

그때.

로메로 드미트리는 진심을 삼켰다.

단순히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는데도 자신에게 다음 기회가 존재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심장에 멍울을 만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빈자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버지로서 못했던 일들이 떠오르며 로메로 드미트리는 하루하루 야위어 갔다.

그래서 황제의 자리도 거절했다.

사람들은 로메로 드미트리가 일단 황제의 자리를 이어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로서는 국정에 전념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대리인의 역할을 맡았으나, 건강이 악화되면서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더는 맡을 수 없다고 말했다.

리한나 드미트리가 한발 다가왔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저도 그렇고, 우리 모두 로만의 진심을 몰랐잖아요.”

스스로도 알았다.

로만과의 이별.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혔고, 목구멍이 턱 막혀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기쁘지가 않았다.

로메로 드미트리가 아내를 바라보았다.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던 드미트리의 전설이, 지금은 반쪽이 되어 버린 얼굴을 보였다.

“여보. 만약 내 아들을 한순간이라도 다시 만나는 날이 찾아온다면, 나는 반드시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매일 밤.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반드시 그날이 찾아오기를.

“내 아들이어서 정말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그 말을 꼭 전하고 싶소.”

* * *

다음 날.

드미트리의 수호신, 페르난도가 훈련장을 찾았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훈련에 임했다.

카앙-!

카카카카캉!

“강하게! 더 강하게!”

“그 정도로는 부족해!”

거대한 연무장.

그곳을 빼곡하게 메운 병사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치열하게 전투에 임했다.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제국을 건국하면서 가장 우선시 여겼던 부분은, 국방을 책임지는 병사들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지닐 수 있는 환경이었다.

4인 가족에 ‘병사 한 명’만 배출해도 생계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보상을 해 주었고, 일과의 대부분을 훈련으로 편성할 만큼 강해지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그렇게 훈련했기에 마계의 공격에도 드미트리는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드미트리의 병사가 되는 것을 정말 명예로운 일로 생각했다.

그 결과가 눈앞의 광경이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병사의 직위를 확보한 사람들이 뜨거운 땀방울을 흘리며 격렬하게 부딪혔다.

그런데 그 열기가 평소보다 더했다.

이유는 하루 전, 크리스의 발언 때문이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차원의 통로가 확보되는 대로 우리는 차원의 경계를 넘을 것이며, 만약 그 일에 병력을 차출한다면 직위에 상관없이 무조건 실력으로 선발할 것이다. 명심하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어중간한 마음가짐이나 혹은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인물은, 절대 이번 임무에 선발될 수 없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찾는 일에 선발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선발되기를 바랐다.

병사로서 이보다 명예로운 일은 없었다.

그렇게 훈련하는 병사 중, 페르난도의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카앙!

상대의 검을 쳐 냈다.

흑발을 치렁치렁 기른 인물이 거칠게 품을 파고들더니, 기사로 보이는 상대를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상대 기사는 드미트리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그는 차분하게 흑발 사내의 공격을 막아 내며 역으로 잡아먹으려고 했지만, 사내의 저돌적인 움직임은 기어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팟.

간발의 차이.

서로가 뒤얽혔다.

흑발 사내의 얼굴이 살짝 베였지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는 기사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졌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척.

검을 거두었다.

사내의 정체.

로렌 드미트리였다.

앳된 소년이 지금은 사내의 냄새를 풍겼고, 그는 승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다음 훈련에 돌입하는 모습에 페르난도는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가 선발에 관련해서 발언하자마자, 로렌 드미트리는 반드시 선택되고 말겠다는 강렬한 눈빛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로렌 드미트리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하늘과도 같은 형이었다.

로렌 드미트리의 상실감은 대단했었고, 무력해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는 훈련으로 감정을 해소했다.

그리고 그간의 성과를 증명할 차례였다.

로렌 드미트리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

페르난도가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이 그가 찾아가려는 목적지였다.

* * *

우뚝.

페르난도가 걸음을 멈추었다.

먼지구름이 걷히며 드러난 광경에,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

드미트리의 연무장.

격렬한 훈련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단단한 재질에 마법 방어로 보호되어 있건만, 그것들이 마치 짐승에게 갈기갈기 찢겨 나간 것처럼 처참한 모습을 보였다.

이만한 오라라면 7성에 버금가는 수준. 드미트리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자신일지라도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셨습니까.”

먼지구름 너머.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빨간 머리에 날카로운 눈빛은, 사람들이 드미트리의 악귀라 부르는 케빈의 상징이었다.

“이런 파괴력이라니. 단순히 방랑만 하신 게 아니었군요.”

“정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최소한 방해가 되기는 싫었습니다.”

지난 세월.

케빈은 세상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해가 떠 있을 때는 로만 드미트리를 찾고 해가 저물었을 때는 천마검법을 수련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시간을 로만 드미트리에게 할애하고 싶었다. 하지만 만일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정말 만약에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에 대항할 만큼의 힘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황제 폐하는 내게 천마검법을 물려주셨어. 그것을 소홀히 하는 것 또한 불충(不忠)이겠지.’

이를 악물었다.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면서도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차곡차곡 쌓였고, 페르난도조차도 케빈이 얼마큼 강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퀭한 눈빛.

예전보다 더 독기로 차오른 얼굴은, 케빈을 상대하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사실 페르난도는 케빈의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충성심은 확고하나, 케빈은 광기라고 표현할 만큼 본인의 인생 전부를 헌납했다.

확실한 건.

그는 이번 작전에 필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로드웰 국왕께서 말씀하시길, 실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드미트리를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이곳에 머물며 언제라도 바로 달려올 수 있는 곳에 계십시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되찾는 일에, 케빈 님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떠날 생각은 없었습니다.”

슥.

검을 거두었다.

에드윈 헥토르와 펠릭스를 중심으로 마법 실험이 진행되었다.

언제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으나, 로만 드미트리의 위치를 알아낸 지금 굳이 세상을 방랑할 필요는 없었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케빈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지금까지는 세상을 방랑하며 일부의 시간을 훈련에 할애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릅니다. 저는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믿습니다. 헨리 앨버트 백작님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목격했다는 말, 그분이 계신 차원으로 넘어가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에드윈 헥토르 국왕의 말. 모두 믿습니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단 하나의 목적에 빠져들었다.

“저는 차원의 통로를 확보할 때까지 오로지 강해지는 것에 집중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변수가 벌어진다고 한들,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해질 것입니다.”

열등감을 벗어던졌다.

더는 크리스가 목표가 아니었다.

그 너머의 무언가.

로만 드미트리의 무사 귀환을 위해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정벌해야만 한다. 더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마계와의 전쟁은 사실상 로만 드미트리 혼자서 감당했다.

사람들이 치켜세우는 크리스조차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자신은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발전할 것이다.

인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들이 드미트리의 계획을 방해할지라도, 그들의 머리를 베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해 낼 것이다.

방랑은 끝났다.

케빈이 걸음을 돌렸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드미트리의 검입니다.”

해가 아직 저물지 않은 시각.

훈련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 *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

그것은 차원 너머 현생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현생에서도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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