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화 선택받은 자들 (3)
털썩.
허망한 죽음이었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겼던 줄리앙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다.
김판석은 차가운 눈빛으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대놓고 ‘살인’을 저지른 눈앞의 상황이, 자신의 미래에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슥.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흥건하게 묻은 피를 벅벅 닦아 내며, 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업보의 펜던트를 확인했다.
“존나 까맣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고하듯.
업보의 펜던트는 점점 어둡게 물들어 갔다.
선행(善行)만이 업보를 청산할 수 있는데,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면서 선행과 악행의 경계에 머물렀다.
절대자를 물리치고 인류를 구하겠다는 목적 자체는 선행일 수 있다.
하지만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살인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며, 김판석은 업보가 더욱더 쌓여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게 정말.
자신을 위한 삶일까.
업보의 펜던트는 잘못된 방향성을 증명하며, 만약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자신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 매우 불합리했다. 현생과 사후가 모두 불안정하기에, 조금이라도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만 했다.
김판석은 멍청하지 않다.
본인의 현실을 명확하게 알았지만, 그에 대한 고민은 아주 오래전에 끝마친 상태였다.
‘천마 백중혁.’
그 이름.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로서의 행보를 말하지만, 김판석은 천마 백중혁 시절의 존재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천하를 내려다보는 절대적인 존재. 매일같이 산을 오르며 생계를 이어 가던 김판석에게, 천마 백중혁의 이야기는 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강렬했다.
항상 그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상상일지라도 감히 천마의 자리를 넘볼 수는 없기에, 천마의 행렬이 이어질 때 바로 뒤를 따라 걸으며 자긍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천마의 심복이라도 되고 싶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천하를 호령하는 존재를 모신다면, 자신과 같은 미천한 존재도 특별해질 것만 같았다.
단순히 호가호위(狐假虎威)를 바라는 게 아니다.
권력자를 모시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마 백중혁의 사람이기에 헌신할 가치가 있었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는.
삶을 영위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렁이 시절의 김판석, 대륙을 절망에 빠트렸던 알렉산드르 황제, 그리고 백의의 마법사라고 불리던 박민우까지. 반복되는 삶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미래가 들이닥친다고 한들, 단 한 번의 삶으로 조금의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툭.
바닥에 업보의 펜던트를 던졌다.
그러고는.
콰직.
그대로 짓밟아 버렸다.
산산이 조각나는 업보의 펜던트에, 김판석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될 대로 되라지.”
이판사판이었다.
정상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생각이라면, 애초에 로만 드미트리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걸음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업보도.
절대자의 존재도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
그의 치하를 받을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김판석이었다.
* * *
그때였다.
김판석은 얼마 걸어가지 못하고, 하늘이 하얗게 물드는 광경을 목격했다.
콰르르르릉.
콰콰콰콰콰콱!
엄청난 마력의 폭풍이었다.
주변을 집어삼킬 것처럼 마력이 몰아치더니, 번개 다발이 일어나며 그대로 지상의 건물들을 강타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집권 이후로 주요 건물들은 마법 방어가 단단하게 형성되었다.
웬만한 마법은 충분히 버티도록 설계되었건만, 엄청난 파괴력에 건물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콰앙!
쿠르르르르릉.
이건 자연재해(自然災害)였다.
신이 내리는 형벌에, 김판석은 황급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건물들을 보호하려 했다.
“크윽.”
마법은 금방 중단되었다.
제단 스킬의 후유증으로 마력이 역류했고, 지금의 몸 상태로는 신의 분노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전생의 재림.
일순간 강력한 힘을 분출하지만, 현생의 김판석은 전생을 재현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무리한다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크 게이트의 망자들을 제물로 바친다면 말라붙은 마나를 끌어올릴 수 있겠지만, 아직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데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세게 몰아치는 마력의 폭풍 속에서, 거대한 구름이 서로 뒤얽히며 ‘인간의 얼굴’을 형성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것은 절대자였다.
줄리앙을 통해 대화를 요청했던 절대자가, 현생에 강림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우매한 인간들이여. 나는 절대자 볼피르다.]
탁하지만 강렬한 음성.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볼피르의 음성은 김판석을 비롯한 사람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내 하수인을 통해 너희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다. 대화의 형태로 너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앞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친히 자비를 베풀려고 했건만 스스로를 인간의 지도자라 칭하는 ‘로만 드미트리’가 감히 생존의 기회를 걷어찼다.]
노골적이었다.
절대자는 로만 드미트리를 거론하며, 인간들에게 그가 재앙을 초래한 범인인 것처럼 매도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오만한 태도에 몇몇 절대자들이 분노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볼피르.
그는 분노를 참지 않았다.
줄리앙이 죽는 모습에,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본인의 존재를 드러냈다,
[로만 드미트리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수십억의 인구를 대표하는 네가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직접 소명한다면, 자비로운 나 볼피르가 인간들이 살아갈 실낱같은 기회를 주겠다. 하지만 네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나는 10번의 대재앙을 생략하고 이 세상을 곧바로 멸망시킬 것이다.]
하늘 위.
모두를 내려다보는 절대자의 음성은 거부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종지부를 찍는 그 음성에, 나약한 인간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 * *
거리는 폐허가 되었다.
짧은 시간 마력이 휘몰아쳤을 뿐인데, 인간들의 노력은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절대자란 그런 의미였다.
세상에 재앙을 부여한 그들은, 인간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정도의 절대적인 능력을 보유했다.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잠시 절대자에 대한 적의를 키우던 사람들은, 절대자를 직접 확인하고는 전의가 상실되는 기분을 느꼈다.
저 괴물을.
신적인 저 존재를.
대체 한낱 인간이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저벅저벅.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혼란으로 뒤얽힌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고, 담담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더는 맹목적인 신뢰를 보일 수 없었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를 믿고 따랐던 이유가 절대적인 능력 때문이었다면, 절대자는 그 믿음에 균열을 일으키는 파괴력을 보였다.
절대자의 의도.
매우 노골적이었다.
불신으로 물드는 사람들의 시선이 증명하듯, 그는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의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
로만 드미트리 때문이다.
재앙을 선사한 절대자들이 아니라, 기존의 체계를 부정한 로만 드미트리의 잘못이었다.
사람들의 죽음.
세상의 멸망.
그것은 주제를 모르는 한 인간의 발악으로 인한 결과라고.
한순간에 변화하는 시선에, 로만 드미트리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군중들의 태도는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강력한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며, 자신이 모든 것을 주도한 순간부터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어떤 이들은 무책임한 권력을 추구하지만, 그런 권력이 십수 년도 지나지 않아 무너지는 이유는 책임을 떠안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불신 때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책임을 떠안았다.
현실을 받아들이며, 절대자를 올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우뚝.
[우매한 인간이여. 우리는 너희 인간에게 10번의 대재앙을 예고했다. 그것은 가혹한 시련이나, 10번의 대재앙을 막아 낸다면 너희는 살아남을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감히 인간 따위가 우리를 직접 공격하려 하다니. 너희의 의도가 불순하다면, 너희가 유희 거리로서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면. 우리는 너희를 벌할 수밖에 없다.]
참 같잖은 말이었다.
절대자들에게 충분한 재미를 주지 못한다면, 그 벌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니.
모두가 몰살당할 바에 적당한 희생으로 살아남으라는 말에, 로만 드미트리가 차갑게 반응했다.
“너희의 장난감으로 살다가 보장받지 못할 미래에 목숨을 걸라는 의미인가.”
[너희에게 선택권은 없다. 받아들이든, 죽든. 그뿐이다.]
“아니, 애초에 우리가 선택에 응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자.
그들이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결단을 내렸고, 절대자의 존재를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유희의 대가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나는 그 목숨을 가치 있게 사용할 것이다. 스스로 평화를 되찾기 위해 잃은 목숨은 최소한 장난감으로서 살다가 죽는 것보다 후회를 남기지 않겠지.”
스릉.
검을 뽑았다.
소명은 없었다.
애초에 소명 따위를 하려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겁을 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의 미래를 명확히 말했다.
“나는 모두를 구하겠다고 약속할 수 없다. 분명히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나, 이 자리에서 단 하나를 약속하겠다. 나는 로만 드미트리로서 살아가며 전생의 세상을 구했다. 너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며, 마왕을 처리했던 것처럼 이번 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위해 죽어라. 내가 이루려는 목적을 위해, 너희의 존재를 죽는 그 순간까지 불태워라.”
콰릉.
콰르르르르릉.
마력을 끌어올렸다.
검게 물드는 눈빛에, 사람들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늘 위로 절대자가 내려보는데도 흔들림이 없는 음성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선사했다.
“너희가 그리한다면, 이 모든 전쟁이 끝났을 때 나는 너희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갈 희망을 선물할 것이다.”
* * *
이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을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존재들이 있었다.
마론교.
세바스찬이 죽었으나 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진실과 거짓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던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아아.”
성서는 말했었다.
마론 드미트리.
마왕으로부터 대륙을 구한 영웅.
그가 이 세상에 강림했을 때, 절대자와 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사실은 마론 드미트리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리고 마론교를 창설한 세바스찬을 죽이면서 교도들은 혼란에 빠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앞을 보라!
영웅이 존재했다.
성서가 말했던 그 존재가, 성서가 예고했던 것처럼 인류를 구원하겠노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눈앞의 상황.
마론교의 교도들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느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영웅이시여!”
“따르겠습니다! 영웅을 따라 이 한목숨 바치겠습니다!”
“아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시여!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사람들의 열망이 들불처럼 번졌다.
마론교의 교도들이 먼저 목소리를 높이자, 일반 사람들도 그들을 따라 목이 터져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간의 모습을 믿었다.
마론교가 말하는 신탁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는 실제로 내뱉은 말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대재앙을 물리치고, 대한제국을 건국하는 등.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매번 승리했다.
그가 내뱉는 약속이라면, 사람들은 목숨을 걸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책임을 떠안았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세상을 손아귀에 쥐었다.
강력한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책임을 떠안음으로써 강력한 권력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절대적인 믿음.
절망은 사라졌다.
사람들이 표출하는 강렬한 열망에, 볼피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한심하고 어리석은 족속들이구나. 수많은 차원을 경험하며 수도 없이 유희를 반복해 왔지만, 너희처럼 멍청한 결단을 내린 족속은 처음이다. 미래를 알고도 죽음을 받아들이다니.]
억겁(億劫)의 세월 속.
절대자들은 무한한 권력을 누려 왔다.
감히 반항하는 인간들의 태도에 볼피르는 분노를 표출했다.
[오냐, 모두 죽여 주마. 선택의 대가를 치르게 해, 앞으로 너희 인류를 ‘어리석은 선택의 선례’로 남길 것이다.]
화륵.
화르르르르륵.
그의 존재가 불타올랐다.
지상에 강림한 그의 모습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마나로 만들어 낸 형상일 뿐이었고,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볼피르의 머리를 베어 버리지 않았다.
볼피르가 눈을 부릅떴다.
인류를 눈에 담으며, 하나의 미래를 선언했다.
[지금부터 10번의 대재앙은 없다. 앞으로 49일 뒤. 단 한 번의 대재앙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다!]
단 한 번의 대재앙.
그것은 인류의 사형 선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