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화 선택받은 자들 (4)
정말 혼란스러운 하루였다.
절대자가 직접 나타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직후, 로만 드미트리의 주도하에 곧바로 비상 회의가 소집되었다.
텔레포트 마법진이 쉴 틈 없이 빛을 발했다.
미국의 존 해리슨, 중국의 왕위룡 등 각국 지도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인류의 절망적인 미래에 굳은 표정을 보였다.
사건 발발 1시간.
각국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말없이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상석에 앉자마자 회의를 소집한 본론을 말했다.
“앞으로의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너희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헨리 앨버트의 일대기가 증명하듯 나는 드미트리 제국의 로만 드미트리 황제로서 살았다. 전생의 나는 마왕의 의도를 알아채고 마계와 전쟁을 벌였으며, 차원을 넘은 대가로 드미트리를 떠나야만 했다. 차원의 경계는 망망대해(茫茫大海)와도 같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갖춘다고 한들, 절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무력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지. 그런데 차원의 경계를 경험하며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원의 경계는 인간뿐만 아니라, 신이라 불리는 존재에게도 절대적이라는 진실을.”
“그게 무슨…….”
사람들이 당황했다.
신이라니.
신이 존재한다고는 믿으나,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상황에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나는 드미트리를 떠나며 ‘신’을 만난 경험이 있다. 그때의 대화는 신조차 차원의 경계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나는 절대자의 존재 자체에 의문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 어떻게 신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차원의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것일까. 사람들은 그들이 진짜 신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들이 신이 아니기에 차원의 경계를 멋대로 활용한다고 생각한다. 후폭풍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개인의 욕망. 그들은 차원 전체를 다스리는 신이 아닌, 어쩌면 그들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
로만 드미트리를 이 세상으로 떠나보낸 그 존재는, 알렉산드르로 인해 차원의 균열이 심각해지는 것을 걱정했었다.
아이러니한 부분이었다.
신이 아닌 절대자들은 차원을 맘대로 넘나드는데, 정작 신이라는 존재는 알렉산드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로만 드미트리를 불러들였다.
신과 절대자.
둘은 다른 존재였다.
신이 말하는 책임감이 절대자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고, 로만 드미트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절대자 볼피르가 예고한 49일.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분노는 절대자의 능력에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절대자들에게는 한낱 개미 같은 인간이 직접적으로 적의를 표출했는데도, 굳이 49일이라는 전제를 덧붙인 것은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락한다는 의미보다는 그들 또한 차원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겠지. 절대자는 신이 아니다. 그들이 신이 아니라면 쓰러트리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인류를 멸망시킬 만큼 차원의 경계를 확장한다면 우리 또한 ‘그 경계’를 이용할 수 있다.”
“그 말은…….”
“그렇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단번에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알았다.
차원의 경계.
그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
“인류를 멸망에 빠트릴 대재앙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드미트리의 세상을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 * *
마론교의 실험.
안드레스가 헨리 앨버트의 영혼을 불러들임으로써, 특정 시기에 드미트리의 세상과 현생을 연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차원이 서로 맞물리는 시기.
그것은 명확한 해답을 제시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하게 마론교의 방법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며칠 전.
로만 드미트리는 김판석을 불러 물었다.
“마론교의 실험은 차원 너머에 ‘드미트리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지금으로서는 그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차원의 경계가 맞물리는 특정 시기를 공략해야 하지만, 만약 차원의 경계를 약화시킨다면 특정 시기가 아닐지라도 차원 이동에 성공할 수 있겠나.”
복잡한 문제였다.
만약 마론교의 실험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김판석은 단호하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마론교의 실험을 통해서 특정 시기를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링크(link)의 흔적을 역추적해서 헨리 앨버트가 존재하는 세상의 좌표를 알아냈다.
그 말인즉 차원의 경계만 해결한다면 통로를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한평생 차원 이동을 연구한 김판석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차원의 경계는 말처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신의 영역.
마왕조차도 수많은 세월을 녹여 내, 알렉산드르라는 매개체를 통해 겨우 가능 여부를 논하지 않았던가.
김판석이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전생에 제가 지상계와 마계의 동화를 시도했을 때는, 제 존재 자체가 차원의 균열을 일으키기에 변수를 창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절대자들이 어떻게 차원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나드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섣불리 시도했다간 차원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나는 가망이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절대자의 능력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는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 존재한다. 지금껏 6번이나 반복되었던 순간이.”
“……설마.”
눈을 부릅떴다.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대재앙은 인류에 절망을 선사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차원의 경계가 약화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절대자는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특별한 능력으로 차원의 경계를 허물고,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괴물들을 이 세상으로 불러들이지. 내가 묻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그때를 이용할 수 있느냐다. 차원이 뒤얽히고 서로의 경계가 모호해졌을 때. 드미트리 세상의 좌표를 기반으로 그들을 이 세상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지, 불안정한 가능성이 아니라 명확한 방법이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김판석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생을 살아가며 절대자의 존재를 알았지만, 대재앙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한참을 침묵한 끝에.
김판석이 입을 열었다.
“일반적인 대재앙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차원의 경계가 완전히 열려, 인류가 정말 멸망할 정도의 위기를 맞이한다면. 절대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전력으로 발휘해 이 세상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면…….”
알렉산드르의 삶.
악의였던 목적이, 현생의 인류에게는 희망을 허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는 가능합니다. 드미트리의 세상을 현생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 * *
김판석과의 대화.
그리고 지금 진행되는 회의.
절대자의 능력은 예측할 수 없기에, 어쩌면 모든 대화는 이미 그들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자들이 자신과 비슷한 부류임을 알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절대자라 칭할 만큼 오만하다. 적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즐겁게 받아들이지. 그들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승리한다고 확신하기에, 그들은 인간들의 계획을 저지하지 않을 것이다.’
의도를 대놓고 드러냈다.
절대자를 직접 처리하겠다는 목표.
대재앙을 이용해 드미트리의 세상을 불러들이겠다는 계획 등은, 입 밖으로 내뱉었기에 절대자들의 흥미를 자극할 것이다.
그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류에게 재앙을 선사했다.
인간을 한낱 개미로 보는 존재들이, 인간들의 계획에 위기감을 느끼고 계획을 바꿀 리는 없다.
강행할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며, 인간들을 단번에 휩쓸어 본인들이 얼마나 완전무결한지를 증명하려 할 것이다.
고로.
숨기지 않았다.
계획이 누출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로만 드미트리는 노골적으로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절대자 볼피르는 49일 뒤에 인류에 대재앙을 예고했다. 만약 대재앙이 이전과 다르지 않은 수준이라면, 단언컨대 나로 인해 이 세상은 금방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들이 정말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작정하고 차원의 경계를 허문다면, 나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드미트리의 세상을 불러들일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인류에게는 해답이 있다는 의미입니까?”
“그렇다. 절대자는 오만한 존재다. 인류를 하찮게 여기는 그들은, 내 계획을 사전에 파악할지라도 계획을 강행해 오히려 인류를 시험하려고 하겠지. 드미트리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하기에. 그들은 49일이라는 기한을 내뱉은 순간, 반드시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할 것이다. 만약 인류가 끝까지 버텨 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절대자들은 패배한 것과 다르지 않다.”
로만 드미트리와 절대자.
두 존재 모두 물러남을 몰랐다.
항상 승리해 왔기에, 서로의 의도가 노골적인데도 어느 하나 물러서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치킨 게임(chicken game)이고, 서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더 강한 쪽이 살아남겠지.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다. 내가, 나 로만 드미트리가 절대자보다 강할 것이라는 확신.”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
절대자와 전쟁을 벌이고, 직접 절대자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인간이 눈앞에 존재했다.
비상식의 영역.
하지만.
믿고 싶었다.
지금은 마론교의 신도들처럼, 맹목적인 신뢰를 보이고 싶었다.
각국의 지도자들이 무언의 신뢰를 보이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가 비상 회의의 종지부를 찍었다.
“앞으로 49일. 우리는 전력을 다해 절대자와의 전면전을 준비할 것이다.”
* * *
회의가 끝났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대한제국을 떠나며, 결연한 표정으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말했다.
“사실 아직도 신적인 존재를 정말 물리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노골적으로 인간을 장난감으로 여기는 현실을 확인했기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미국의 전력을 바치겠습니다. 설령 이 선택이 인류를 멸망시킨다고 한들, 그 희생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무림은 항상 천마의 존재를 갈망해 왔습니다. 천마가 존재했다면 무림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고, 천마가 존재했다면 절대자와 같은 존재들이 날뛰지 못했을 것이라고. 신 왕위룡. 제가 살아가는 시대에 천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여한이 없습니다. 목숨을 바쳐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천마를 갈망해 왔던 저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무림의 후예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도록, 무림 정벌을 이루었던 순간처럼 끝까지 곁에 함께하겠습니다.”
다들 각자의 의지를 다졌다.
49일.
말은 쉽지만, 49일 뒤에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대재앙이 들이닥치리라는 사실에 다들 여유를 잃어버렸다.
그 모습에도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뢰하길 바라나, 그렇다고 공포심을 배제한 채 마지막 전면전을 준비하길 바라진 않았다.
공포는.
또 다른 원동력이다.
사람들은 절대자를 두려워하는 만큼, 더 간절하게 승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다.
“김준혁.”
“예.”
“나는 당분간 폐관 수련에 돌입할 것이다.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내가 없는 동안 다른 나라들이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라.”
“……알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부재.
걱정부터 앞섰다.
만약 절대자들이 부재의 순간을 노린다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러한 부분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49일 전에 움직인다면. 그것은 그들의 나약함을 증명한다.
겨우 한낱 인간이지 않은가.
노골적으로 목적을 증명한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를 시험하듯 자신의 부재를 드러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 *
그로부터 며칠.
칠흑 같은 밤이었다.
폐관수련장 근처에는 경계 병력이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대담함에 혀를 내둘렀다.
절대자라는 초월적인 존재와의 전쟁을 예고하고도.
경계 병력조차 대동하지 않고 폐관 수련에 돌입하는 모습은,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치킨 게임.
액셀을 밟았다.
맞은편에서 트럭이 돌진해 온다는 사실을 알고도, 로만 드미트리는 발을 떼지 않았다.
스스스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구름에 가려 있던 달이 잠깐 고개를 내미는 순간, 폐관수련장 근처로 수많은 그림자가 보였다.
수천?
아니, 수만이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들었다.
어둠에 완전히 녹아든 존재들이 폐관수련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방에서 폐관수련장 내부로 진입했다.
누구는 정문으로, 누구는 창문으로, 누구는 지붕을 뚫으며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강력한 살수를 시도했다.
그 순간.
파파파팟.
“크악!”
“악!”
건물 안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뒤따라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림자들은, 처참한 비명에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끼익.
쿵.
문이 천천히 열렸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한 줌의 달빛만이 허락되는 밤.
칠흑같이 어두운 건물 내부에서, 한 사내가 동그란 무언가를 움켜쥔 채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뚝, 뚝.
머리였다.
방금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머리만 남아 손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머리를 옆으로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머리에 따라 핏물이 물들었고, 사내는 피로 물든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암영(暗影). 인류를 배반하고 절대자에게 달라붙은 쥐새끼 같은 녀석들. 너희가 정녕 무림의 명맥을 이어받았다면, 폐관 수련이 무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사실을 알았겠지.”
감각 안.
수많은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그들은 들끓는 살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 왔다.
재밌었다.
그들에게 허점을 내어 주기 위해 로만 드미트리는 폐관 수련에 돌입했고, 실제로 천마신공에 완전히 빠져들어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었다.
그들로서는 기회라고 여겼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조금만 잘못돼도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기에, 그들은 서슴없이 공격을 펼쳤다.
그럴듯한 계획.
계획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상대를 잘못 골랐을 뿐.
인류의 배반자이며, 천마신교를 무너트린 적들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활짝 웃음을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팟.
파파파파팟.
사방에서 그림자들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