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85화 (585/615)

585화 선택받은 자들 (5)

선택받은 자들.

인류의 배반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항상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집단이 존재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는 암영의 의뢰를 받았을 뿐입니다.”

“절대자로부터 퀘스트를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암영이 말하길, 이는 분명히 인류를 위한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저는 절대, 절대 인류를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체 왜 선택받은 자들만 핍박하는 것이냐?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 세상에는 이미 암영이 있었다!”

암영.

그들의 존재가 표면 위로 떠올랐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세바스찬과 마르코프 등, 여러 권력자의 증언대로라면 암영은 아주 오래전부터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만약 그들의 목적이 인류의 생존이라면. 그들은 절대 비밀스러운 세력으로 남아서는 안 되었다.

현재 세상을 지탱하는 헌터들이야 ‘시스템’을 기반으로 탄생했다지만, 암영의 근간이 되는 무공에는 중원 무림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그 말인즉.

그들이 20년 전부터 무공을 개방했다면, 인류는 절대자에 대항할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왕위룡과 같은 존재들도 무공을 밝히지 않았지만, 암영은 중원 무림을 멸망시킨 황제의 후예라는 사실이 달랐다.

그들은 무공의 전부를 알았다. 그런데도 무공을 본인들만의 지식으로 남겼고, 비밀스러운 세력으로 활동하며 알 수 없는 의도를 드러냈다.

복잡하게 흩뿌려진 퍼즐들이 ‘사실은 암영이 절대자를 따른다’라는 하나의 전제를 덧붙이는 순간, 그들이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도 마론교를 후원하는 등 이상한 행보를 보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인류의 해악.

암영에 대한 결론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박기태를 통해 암영에 대해 추적하며, 그들을 함정에 빠트릴 계획을 구상했다.

“내 계획의 전제는 암영이 절대자를 따른다는 것이다. 만약 인류가 절대자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그때는 암영으로서도 더는 모습을 감출 수 없겠지. 절대자를 따라 인류를 무너트리든, 아니면 인류를 도와 절대자에 대응하든. 그때는 그들의 대응이 명확해질 수밖에 없다.”

선택의 갈림길.

로만 드미트리가 암영을 무대 위에 올렸다.

“박기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나는 내 존재를 무방비하게 드러낼 생각이다. 그러니 정보부를 활용해 그 사실을 세상에 알려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암영이 절대자를 따른다면 그 미끼를 물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존재 의미를 증명받을 테니까.”

툭.

미끼를 던졌다.

49일을 예고하고.

폐관수련장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천마신공을 발현해 무아지경에 빠져들며,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의 감각이 주변 일대를 손아귀에 두었다.

암영이라는 쥐새끼가 발을 들이는 순간. 그들을 모조리 척결해 버릴 수 있도록.

존재감을 숨겼다.

의도를 삼켰다.

한 줌의 달빛만이 허락되는 밤은, 그렇게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사방에서 악의(惡意)가 넘실거렸다.

같은 인간이라면, 적어도 인류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

감각에 포착되는 수많은 인간.

그들의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처단해, 인간을 하찮은 개미로 취급하는 절대자에게 그 목숨을 바치려고 했다.

인간들은 반항하지 않는다고.

제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절대자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용기 대신에, 로만 드미트리를 처단하는 그들의 상식으로 허락되는 방법을 택했다.

어둠이 밀려들었다. 미약하게 비추던 달빛은 다시 어둠에 물들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들끓는 악의를 마주하며 검을 들었다.

스릉.

같잖았다.

동시에 혐오스러웠다.

중원 무림을 두려워해 불을 질렀던 인간들은, 천마 백중혁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눈이 먼 장님처럼 현실을 외면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절대자의 존재에 현실을 외면했고,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절대자를 처리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어떠한 대화도.

어떠한 노력도 없이.

칼끝을 들이밀었다.

로만 드미트리 또한, 그들과의 대화를 생략하고 모조리 도륙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죽여!”

팟.

파파파파팟.

사방에서 스킬이 발현되었다.

마나가 넘실거리며 로만 드미트리에게 집중되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마나의 경계를 파고들었다.

번뜩.

콰드드드득.

검에 닿는 존재들이 그대로 찢겨 나갔다.

선두에서 달려드는 그림자의 머리를 베어 버리더니, 로만 드미트리는 쉴 틈 없이 치고 들어오는 그림자들의 사지를 찢어발겼다.

천마검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상식을 초월하는 강력한 힘이 아니라, 신체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단 한 명의 무인으로서 존재했다.

“플레어.”

“체인 라이트닝.”

화르륵.

콰콰콰콰쾅!

마법이 작렬했다.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나자, 로만 드미트리는 단숨에 뚫고 나가며 마법사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퍽.

머리를 베었다.

실드를 사용한 마법사는 실드와 같이 그대로 베어졌고, 블링크로 도망치려던 마법사들은 곧바로 따라붙는 로만 드미트리를 발견했다.

그것으로 기억이 끊겼다. 마법사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짐과 동시에, 아직도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림자들이 초개처럼 목숨을 던졌다.

카앙!

공격을 쳐 내고.

푹.

“끄르르륵.”

목에 검을 쑤셔 박았다.

바둥거리는 초라한 목숨을 바닥에 내팽개치자, 그림자는 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피를 뿜어 댔다.

그리고 그의 눈에.

“아악!”

“마, 막아라!”

그림자들을 도륙하는 로만 드미트리가 보였다.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오는 그림자들의 머리를 일격에 날려 버렸고, 공간을 파고들며 아직 자세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그림자의 심장을 쑤셔 버렸다.

그의 비명은 덧없었다.

그의 심장을 관통했던 검은, 심장을 완전히 찢어발긴 뒤에 그의 동료였던 그림자의 어깨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악!”

육신을 찢어발겼다.

고도로 훈련된 그림자들이었지만, 정신을 압도하는 공포에 비명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일격에 수만을 도륙할 수 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림자들을 일일이 맞닥트리며 그들에게 압도적인 공포를 선사했다.

그림자들을 상대할수록 그들이 무림의 후예라는 사실은 더더욱 명확해졌다.

어쭙잖지만 무공을 재연한 그들의 무력은, 단순히 시스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확실했다.

암영은 인류의 해악이었다.

이런 힘을 보유하고도, 그들이 존재를 숨겨 왔던 것은 ‘천마 백중혁’을 두려워해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황제의 나약함을 드러냈다.

그들의 근본. 애초에 패배로 얼룩진 근간에서 비롯되었기에, 암영은 절대자에 대항할 힘을 갖추고도 20년간 단 한 번도 절대자에 대항하지 못했다.

이 얼마나 같잖은 일인가.

미지의 공포에 절대자에게는 감히 대적하지 못하면서, 자신을 상대로는 초개처럼 달려드는 꼴이.

무지하고.

나약했다.

만약 천마신교가 존재했다면, 인간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퍽.

피가 튀었다.

피로 물든 얼굴로 고개를 들자, 더는 달려들지 못하고 망설이는 그림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피가, 이빨에 스며들어 붉게 번들거렸다.

“겨우 이게 끝이 아니라고 말해. 겨우 너희 따위가 흑막(黑幕)이라면, 그건 참 비참한 일이잖아.”

걸음을 옮겼다.

득실거리는 어둠을 향해.

로만 드미트리는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 * *

건물 위.

먼발치에서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다.

암영의 일원이며 팽무열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보았다.

“……이런 미친.”

로만 드미트리.

그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세상을 완벽하게 통제한다고 생각했던 암영조차도,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단 하나도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 인물.

그간의 조사 끝에 로만 드미트리가 무공을 사용한다는 사실에는 도달했지만, 오히려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더욱 미스터리에 빠졌다.

대체.

그는 어떤 인물이란 말인가.

샐러맨더 대륙은 분명히 오라와 마법이 근간이 되는 세상인데, 로만 드미트리는 무공을 완벽하게 발현했다.

무림의 후예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한 것은, 암영이 절대자를 따르겠다는 선택을 내린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죽여야 우리가 산다.’

며칠 전.

절대자로부터 명령이 하달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라고.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암영의 공격조차 버텨 내지 못한다면, 겨우 그따위 존재를 상대하는 일에 절대자들이 열을 올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암영은 이것이 토사구팽(兔死狗烹)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절대자들을 위해 헌신했건만, 그들은 시험이라는 명목으로 암영을 버렸다.

하지만.

명령을 거절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만한 담력이 존재했다면, 수십 년 전에 암영은 굴복이 아니라 대항을 택했을 것이다.

선택의 갈림길.

죽든, 죽이든.

암영에게 어중간한 결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팽무열의 눈빛이 위험하게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오만한 존재다. 그러니 암영의 암살을 예상하고도, 폐관수련장 근처에 단 한 명의 병력도 배치하지 않은 것이겠지. 아마 이곳에서 어떤 소란이 벌어지든 로만 드미트리를 돕겠다고 병력이 몰려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홀로 우리 모두를 도륙할 수 있다는 확신. 로만 드미트리가 스스로를 과신한다면, 우리로서는 자만심을 공략해 무너트리는 수밖에.’

지금부터는 도박이었다.

확.

팽무열이 몸을 날렸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낚을 미끼가 필요했다.

* * *

얼마나 죽였는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을 때, 그림자들이 갑자기 물러나며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팽무열이었다.

그가 피로 물든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정말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하구나.”

스륵.

검을 늘어트렸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에, 로만 드미트리가 서늘한 표정을 보였다.

“네가 암영의 수장인가.”

“그건 아니야. 난 일개 하수인일 뿐이고, 지존의 명령을 받아 이 자리에 존재할 뿐이지. 본론을 말하기 전에 하나만 묻지. 넌 대체 왜 그만한 힘을 지니고도 절대자에 대항하는 방법을 택했지? 적당히 현실에 순응하고 10번의 대재앙을 버텨 낸다면, 인류에게 평화가 허락되었을 텐데.”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타인에게 내 미래를 맡길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자비가 아닌, 스스로 직접 쟁취한 결과겠지.”

“재밌네.”

팽무열이 웃었다.

하지만 입꼬리만 씰룩거릴 뿐, 그의 눈빛은 묘한 열등감을 드러냈다.

“정말 무모한 녀석이구나. 암영이 왜 절대자에 대항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그들이 신의 영역에 도달했기 때문이야.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발악해도 절대 쓰러트릴 수 없기에, 암영은 인간들이 현실을 인식하기도 전부터 절대자에게 타협해 미래를 허락받았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지금 같잖은 힘으로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우쭐대지만, 너 또한 결국 인간일 뿐이야. 인류는 무모한 인간 하나를 따른 대가로 모조리 파멸을 맞이하고 말겠지.”

“그따위 소리를 계속 지껄일 생각이라면, 본론을 말하기 전에 네 머리부터 베어 주지.”

“미친 새끼.”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미끼를 물 것이다.

그의 오만한 발언에서, 팽무열은 확신을 얻었다.

화악-

마력을 끌어 올렸다.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팽무열 바로 뒤로 포탈이 열렸다.

“로만 드미트리. 네가 정말 절대자를 처리할 자신이 있다면, 나를 따라 암영의 본거지에 발을 들여라. 우리는 너를 위한 만반의 함정을 준비했다. 수천 개의 마법 트랩이 단 한 명의 존재를 찢어발기기 위해 준비되었으며, 암영의 지존께서 친히 너를 맞이하실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 너를 위한 함정이며,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절대 버텨 낼 수 없다고 확신한다.”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자극하듯.

팽무열은 대놓고 의도를 드러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제안이었다.

팽무열 또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이 자리에서 머리가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왕위룡이 말하길, 암영은 중원 무림을 멸망시켰던 황제의 후손이라고 들었다. 암영의 근간이었던 황제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면, 황제가 왜 중원 무림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를 알고 있겠지. 그때의 무림은 절대적이었다. 같잖은 함정 따위로는 무너트릴 수 없는, 황제의 강력한 권력으로도 너희가 절대자를 보듯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지.”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들이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서슴없이 공격 범위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그때, 무림의 지도자는 천마 백중혁이었다.”

팽무열을 지나쳤다.

포탈에 발을 들이기 직전.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귓속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또 다른 이름이다.”

확.

그대로 포탈에 빨려 들어갔다.

팽무열이 고개를 홱 돌렸다.

충격으로 얼룩진 그의 눈빛이 다급하게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숨이 가빠 왔다.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천마 백중혁이라니.

암영의 일원이라면, 그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