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화 선택받은 자들 (7)
아주 오래전.
인간의 역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 열두 존재의 의식은 갑작스럽게 형성되었다.
생명의 잉태(孕胎)와도 같은 과정은 모두 생략되었고, 그들이 존재하는 세상 또한 먹고 마시는 생명체로서의 활동이 불가했다.
그런데도 열두 존재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 마시지 않아도 갈증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잠을 자지 않아도 정신이 멀쩡했다.
아니.
애초에 굶주림, 갈증, 피곤함과 같은 기본적인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다.
열두 존재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무료한 삶을 보내다, 어느 날 우연히 차원의 틈을 발견했다.
“저기를 봐.”
“저것들은 대체 뭐지?”
그들은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나누었다.
차원의 틈으로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모습이 보였고, 열두 존재는 옹기종기 모여서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차원의 틈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정말 재밌었다. 일반적인 의식주를 영위하는 생명체들의 삶, 그리고 서로 죽고 죽이며 살아가는 적자생존의 방식.
자극적이었다.
간이 되지 않은 음식만 먹던 어린아이가, 갑작스럽게 너무나도 자극적인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 것처럼 열두 존재는 새로운 세상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생명체들의 개념이 머릿속에 정립되었다.
생명체들이 태어나고 죽는 과정, 자신이 그들과는 다르다는 사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보내던 열두 존재는 문득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심심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사소한 의문이었다.
생명체들의 세상에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이윽고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툭.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쏘아 보냈다.
그때만 하더라도 열두 존재는 본인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아주 작은 바람은 차원의 틈을 타고 넘어가 엄청난 폭풍으로 변했다.
그곳의 생명체들에게는 그야말로 자연재해였다. 수많은 생명체가 쓸려 나갔고, 그들이 절망에 빠져 소리치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전율이 일었다.
손가락질 한 번에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열두 존재는 단 한시도 차원의 경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그들은 생각했다.
‘앞으로 심심하지는 않겠구나.’
그것이 바로.
수많은 차원을 멸망시킨,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일컫는 열두 존재의 탄생이었다.
* * *
무의 공간.
일반적인 생명체들에게는 소름이 돋는 세상이었다.
바람과 같은 자연의 그 어떠한 현상도,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소음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채색의 세상에 존재하는 열두 존재. 볼피르는 억겁의 세월 동안 자신과 같이 존재해 왔던 동족들을 바라보며, 심각한 얼굴로 방금 목격했던 광경에 대해서 말했다.
“조금 전. 로만 드미트리의 일격에 차원에 균열이 일었다. 그 말인즉, 우리가 지상계에 강림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을 당한다면, 차원과 동일한 성질로 이루어진 우리의 육신에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절대자들.
그들은 차원과 완벽히 동화되었다.
애초에 차원의 경계에서 태어났기에,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조금도 대미지를 입힐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방금은 달랐다.
세상을 소멸시키는 로만 드미트리의 일격은, 차원을 넘어 절대자들에게도 엄청난 전율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공격이 차원의 경계를 찢어발기는 순간. 절대자들의 육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동안 수많은 차원을 전전하며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체를 죽여 왔지만, 로만 드미트리처럼 ‘직접적인 위협’을 선사하는 생명체는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열두 존재.
그들의 시선이 뒤얽혔다.
볼피르의 경고에, 몇몇 절대자가 말했다.
“볼피르의 말이 맞아. 로만 드미트리는 위험한 존재야.”
“로만 드미트리는 우리에게 경고성의 의미로 방금의 일격을 보여 주었다. 그것이 그의 전력이 아니라면, 정말 차원의 경계를 찢어발기고 우리를 죽일 수도 있겠지. 로만 드미트리가 존재하는 세상을 무너트리는 일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과 같은 위험을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내 의견도 같다.”
열두 존재.
그들은 서로를 존중했다.
의사 결정을 내릴 때 항상 모두의 생각을 논의했고, 단 한 번도 만장일치가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모두가 동조하지 않았다.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위협에, 볼피르와 같은 절대자들은 ‘경계심’이라는 감정을 깨달았다면 다른 존재들은 오히려 강한 자극을 느꼈다.
카르가스.
또 다른 절대자가 말했다.
“큭큭큭, 겨우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꼴이라니.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그는 혼자일 뿐이다. 우리 열두 존재를 절대 감당할 수 없으며, 오히려 나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가 우리를 정말 즐겁게 해 줄 재밌는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그래, 아무리 강해도 상대는 인간일 뿐이야.”
“정말 신선한 경험이 되겠어.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절대자들의 표정이 격양되었다.
죽음의 공포.
그것 또한 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새로운 자극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카르가스는 회색빛의 눈빛을 번들거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그 존재를 인정하기에, 49일 뒤에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차원의 경계가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그동안은 한 번의 대재앙에 십수 개의 차원이 연결되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수백 개의 차원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며 인류를 절망에 빠트리겠지. 정말 재밌을 것 같지 않나. 그와 같은 위기 속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인간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오만한 콧대가 꺾이는 순간에, 우리는 위협적인 존재를 상대한 만큼이나 더욱 강렬한 전율을 느끼게 되겠지.”
애초에 승리는 명백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절대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그로 인해 ‘한두 존재’가 다치는 정도의 결과. 절대자들의 숫자는 무려 열둘에 달했다.
각자가 수많은 차원을 멸망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괴물이기에, 카르가스는 지금의 상황을 오히려 새로운 자극제로 여겼다.
전율이 일었다.
새로운 경험.
경험해 보지 못한 생명체.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한 발악을 지켜볼 생각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니 하찮은 인간의 장단에 놀아 주자고. 처음 차원의 틈을 발견했던 그날처럼, 나는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싶거든.”
웃었다.
차원의 경계 너머.
카르가스가, 로만 드미트리를 내려다보며 위험한 눈빛을 보였다.
* * *
로만 드미트리가 떠난 자리.
“흐억?!”
백무진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분명히 육식이 완전히 찢겨 나갔건만, 눈앞에 보이는 하늘은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황급히 몸을 확인했다.
“……내가 살아 있다고?”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확인하자, 그제야 인간의 육체로 추정되는 것이 갈기갈기 찢겨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기억은 잘못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그림자들은 일방적으로 도륙을 당했고, 천마검법이라고 표현한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인해 모두가 소멸했다.
압도적이었다.
황제가 왜 그토록 천마 백중혁을 경계했는지를, 백무진은 처참한 죽음으로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런데.
자신이 대체 어떻게 살아 있단 말인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공간에, 자신이 아직 생명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인간이여.]
“……!”
눈을 부릅떴다.
하늘 위.
절대자의 형상이 존재했다.
거대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백무진은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너의 육신은 소멸되었으나, 내 힘의 일부를 나누어 너를 부활시켰다. 너는 이제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으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저를 살려 주셨다는 말입니까? 대체 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암영의 수장이라고 한들.
자신은 절대자들에게 하찮은 인간일 뿐이다.
절대자의 힘을 나누어 줄 만큼, 자신이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절대자.
카르가스가 웃음을 보였다.
[네가 살아 있는 쪽이 더 재밌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너는 육신이 소멸되는 과정에서 ‘진정한 천마검법’이 무엇인지를 경험했다. 정말 궁금하더군. 가짜에 불과했던 네가, 진짜를 발현한다면 인류에게 어떤 재앙이 들이닥칠지. 인간 백무진이여. 네게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이것 또한.
유희의 일종이었다.
카르가스의 악의가 꽃을 피웠다.
[천마검법을 재현하라. 그리고 인류의 대재앙이 시작되었을 때, 네 존재 의미를 다시 한번 증명하라.]
절대자의 말.
백무진은 감정이 벅차올랐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한 힘은, 정말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의 천마검법을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일이었다. 그리고 소멸된 인간을 부활시키는 능력이라면, 역시나 절대자에게 굴복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무지했다.
그리고 무모했다.
그의 앞에 새롭게 나타날 생각에, 백무진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절대자님을 따르겠습니다. 절대자님의 광대가 되어, 정말 즐거운 그림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49일의 카운트다운.
인류의 위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 * *
암영의 공격.
대한제국의 수뇌부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김판석은 암영의 침투를 확인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 일부러 그들의 존재를 방관했다.
그리고 지금.
김준혁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대로 지켜보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적수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암영의 본거지에서 싸우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세상의 배후를 자처해 왔고, 그들이 갖춘 세력은 그 크기를 감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상식의 영역이었다.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를 믿는다고 한들, 암영의 함정에 발을 들이는 선택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죽어서는 안 된다.
이미 절대자와의 전면전이라는 물이 엎질러진 상황에서, 정말 비참한 현실이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인류는 사실상 끝이나 다름없었다.
김판석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겨우 암영 따위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현생의 사람들.
그들은 몰랐다.
중원 무림.
천마가 무림을 정벌하고, 태평성대를 이룩하던 시기에 ‘암영의 시초’였던 황제가 얼마나 굴욕적인 나날을 보냈는지를. 김판석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황제가 무엇을 남겼다고 한들, 감히 천마를 올려다보지도 못한 존재의 흔적이 변수를 만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르로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해 보았기에, 그때보다도 더 강력해진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걱정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저는 황제 폐하가 위험해지는 장면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 상대가 암영이든, 마계의 지배자든, 그리고 인류를 장난감처럼 여기는 절대자들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제가 경험한 그분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당연히 승리한다고 믿는 것이 ‘상식적인 생각’이지 않겠습니까?”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때마침.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 * *
확.
차원의 문이 닫혔다.
아티팩트로 귀환 마법을 사용한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헉.”
“화, 황제 폐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만 드미트리의 몰골은 참담했다.
그야말로 피를 완전히 뒤집어썼고,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는지 그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기어코 암영을 전부 학살해 버렸다는 사실을.
심장이 뛰었다.
암살을 예상하고도.
적의 함정임을 알고도.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렀다.
암영은 절대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김판석이 수건을 건넸다.
로만 드미트리는 피를 벅벅 닦아 내며, 김준혁에게 명령했다.
“인류의 배반자를 처리했으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각국에 방문 일정을 전달하라. 절대자가 예고한 49일이 지나기 전에, 나는 미국을 시작으로 인류의 연합국 모두를 한 번씩 방문할 생각이다.”
“폐관 수련은 끝내시는 겁니까?”
“그래. 애초에 더 강해지려는 목적이 아닌, 암영을 끌어내려는 미끼였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각국에 ‘방문 목적’을 뭐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툭.
수건을 건넸다.
아직도 피가 눌어붙은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가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방문 목적은 연합국의 전력 강화. 절대자를 맞이하기 전에, 내가 직접 사람들에게 감당하지 못할 절망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생각이다.”
49일의 카운트다운.
인류 또한,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