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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91화 (591/615)

591화 49일 (4)

물은 엎질러졌다.

명령권자가 내린 결정에 미국의 병사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달려들지는 못했다.

복합적인 문제였다. 감히 황제에게 무기를 겨눌 용기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김판석 한 명에게도 압도당한 상황에서 그를 상대로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모두 얼어붙었다.

눈만 껌뻑이며 상황을 지켜보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느릿한 걸음으로 병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저벅저벅.

점점 거리가 좁혀졌다.

미국의 병사들은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고, 존 해리슨에게 제발 이 상황을 멈춰 달라는 듯한 애절한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존 해리슨도 혼란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단 절망적인 현실을 받아들였으나, 막상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라는 명령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해야 했다.

존 해리슨도 무기를 뽑아 들었다.

“미국의 병사들은 들어라. 너희의 사지가 부러진다면, 나 또한 내 사지를 부러트릴 것이다. 그러니…….”

그때였다.

의욕을 불태우며 나아가려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마침내 미국의 병사들을 맞닥트렸다.

콰득.

“크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었다.

달려들지도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못하는 병사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의 무기를 쳐 내더니 그대로 팔을 부러트려 버렸다.

병사는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질러 댔다.

덜렁거리는 팔에 공포가 치밀었고, 고개를 들어 로만 드미트리를 확인하는 순간 다리에서 엄청난 충격이 일었다.

빠각.

다리도 부러졌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잔인한 손속을 드러내더니, 그 이후 맞닥트리는 족족 사지를 부러트리기 시작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어차피 부러진 팔다리는 포션으로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아, 아아, 아아악!”

“크악!”

일방적인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차마 대항하지 못했고,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무기가 부서지고 팔다리가 끔찍한 소리를 뿜어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들은 분명히 49일의 재앙을 대비해서 훈련한다고 들었건만, 너무 일방적인 상황에 감당하기 힘든 공포가 머릿속을 장악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빨랐다.

처음에는 천천히 병사들을 제압하나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속도를 내서 무차별적으로 병사들을 무너트렸다. 공방은 무의미했다.

이 자리에는 로만 드미트리의 일격을 막아 낼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고, 무기가 하늘 위로 떠올랐을 때는 어김없이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빡-

검이 팔을 부러트렸다.

검이 다리를 부러트렸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는 병사는,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머리채를 잡아끌어 팔을 비틀었다.

참혹했다.

이대로 있다간 모조리 당한다는 생각에, 특수부대 일원 중 하나가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냥 달려들어!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커억!”

콰직.

얼굴에서 피를 뿜었다.

그는 분명히 나름대로 본인의 비기를 펼쳤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목덜미를 잡아끌더니 그의 얼굴에 그대로 무릎을 작렬시켰다.

특수부대원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전의를 상실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기어코 그의 팔을 뒤로 틀더니 천천히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어 버렸다.

“크, 크으으, 크아아아악!”

특수부대원이 눈을 부릅떴다.

정신을 잃었는데도,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

사람들의 정신을 무너트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용기를 내서 달려든 사람들에게 특별한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닌, 더한 절망으로 완벽하게 무너트렸다.

이번 훈련의 의미였다.

어쭙잖게 대항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들고 마주하는 순간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리라는 정말 잔혹한 진실.

특수부대원의 몸이 축 늘어졌다.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리자, 로만 드미트리가 그를 옆으로 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를 상대할 시간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 * *

벼랑 끝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에, 존 해리슨은 두려움을 삼켜 내며 소리쳤다.

“공격하라! 어차피 1시간만 버티면 끝날 싸움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할 바에, 미국이 얼마나 강인한 나라인지를 증명하라!”

앞으로 나아갔다.

그 또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할 생각이었고, 그의 모습에 마법사들도 결연한 표정을 보였다.

“그래, 해 보자고.”

“1시간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화악.

마력을 끌어올렸다.

수백 명의 마법사가 동시다발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마법을 발현했다.

아니, 발현하려 했다.

“캔슬(cancel).”

로만 드미트리 너머.

김판석의 마력이 주변을 휘어잡았다.

그는 겨우 단 한 명에 불과하나, 수백 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캐스팅하는 마력의 흐름을 혼자만의 힘으로 파훼해 버렸다.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한 번의 마법에는 복잡한 계산이 녹아들고, 그 마법을 파훼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김판석은 정말 쉬운 일처럼 마법을 파훼하더니, 분뇌공으로 나누어진 몇 개의 의식으로는 공격 마법을 펼쳤다.

“븅신들. 내가 버티고 있는데 감히 황제 폐하에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윈드 커터(Wind Cuttur).”

휘이잉.

파파파파팟.

어디에선가 칼바람이 불었다.

겨우 2서클에 불과한 윈드 커터가, 김판석에 의해 발현되는 순간 엄청난 마력을 동반해 병사들을 쓸어버렸다.

팟.

파파파팟.

“크아아아아악!”

병사들의 사지가 그대로 찢겨 나갔다.

팔, 다리, 몸통 가릴 것 없이 검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생겨났고, 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하게 일어나는 통증에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앞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그 뒤에는 김판석의 마법이. 이보다 더한 절망은 없었다.

미국의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김판석의 마법 방해를 뚫고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마지막 캐스팅을 끝마치는 순간에 마력이 와해되었다.

파스스.

사라지는 마력.

마법사들이 허망한 눈빛을 보였다.

전력으로 싸우다 패배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 더한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없었다.

몸을 장악하는 무력감에, 한 마법사가 창백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행한 행동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그는 이 전장에서 멀어지고자 했다.

엉망이 되어 버린 머릿속에 몸을 틀었고,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벗어나려는 순간.

“방금 1시간 추가되었다.”

그의 귓가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들려왔다.

* * *

미국의 병사.

브래드는 정신이 붕괴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악!”

“크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미국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예병들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질러 대는 병사들. 절망적이었다.

분명히 머릿수로는 상대를 압도하고 있지만, 이 많은 머릿수가 모두 희생한다고 할지라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다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

안일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주변을 살피며 퇴로를 살피던 브래드의 귓가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현실’이 들이닥쳤다.

“방금 1시간 추가되었다.”

1시간이.

2시간이 되었다.

이 악마는 1시간으로도 모자라 그 이상으로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릴 것이고, 이대로 악마를 상대로 물러서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본인의 차례가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차례가 밀려 밀려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마저 죽어 더는 악마를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온다면, 그 화살은 언젠가 자신의 가족을 향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암담한 현실에서 자원입대를 결정한 이유는, 가족들이라도 평안한 미래에서 살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도 더는 물러나지 않았다.

해야만 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뭐라도 하고 죽고 싶었다.

마침내.

코앞에 있던 병사들이 무너졌다.

확 열린 시야에, 브래드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악!”

이 한목숨.

가치 있게 사용할 것이다.

그렇게 불타오르던 그의 의지는, 로만 드미트리를 맞닥트리는 순간 덧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퍽!

비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얼굴에 작렬한 검에,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브래드의 결심.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단 10초도 로만 드미트리의 발목을 붙잡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브래드를 시작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달려드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그들도 뒤늦게 진실을 알았다.

이 상황을 벗어난다고 한들 다른 누군가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

지금은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는 훈련에 불과하나, 절대자를 상대할 때는 도망치는 순간 실낱같은 희망조차 사라진다는 것.

분위기가 변했다.

팔다리가 부서져도.

피를 뿜어내며 기절해도.

미국의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쓰러진 동료를 짓밟으며, 목에 핏대를 세우며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아주 조금씩.

사람들이 절망에 적응하는 순간이었다.

* * *

사람들의 변화.

그게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은, 핏빛 장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모두 피를 흩뿌리며 무릎을 꿇었다.

콰직.

꽈드드득.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뼈가 부서지고, 피가 튀었다.

바닥에 쓰러져서도 적의를 드러내는 병사는, 로만 드미트리가 그의 육체를 짓밟으며 더한 고통에 빠트렸다.

미국의 전력은 단순히 병사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리처드와 같은 실력자들, 미국에서 명령을 떨친 S등급의 실력자들 또한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고통을 겪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절대자를 상대로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달려들 수 있었고, 참담한 결과를 알고서도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콰득.

그 대가는 참담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투쟁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증명했다.

쓰러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수십 명이었던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와 김판석이 날뛸수록 수백, 수천을 넘어서 수만의 사람들이 생채기 하나 내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야말로 참담한 광경이었다. 거대한 공간에 들어찬 사람들이, 모두 사지가 비틀린 채로 피를 흘리며 신음을 흘렸다.

절망에 빠질수록.

궁지에 몰릴수록.

사람들의 눈빛은 강렬해졌다.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받아들인 순간, 상대가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고 한들 물러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모두를 찍어 눌렀다.

모두를 압도했다.

10분, 20분, 30분,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의 현실을 각인시켰다.

콰득.

이번에도 누군가의 팔이 부러졌다.

팔이 덜렁거리면서도, 그 병사는 악에 받친 얼굴로 끝까지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빠악-

다른 팔도 부러졌다.

끝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니, 이번에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차례.

병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우 몇 초라도, 자신의 희생이 의미가 있었기를 바랐다.

그때였다.

“훈련은 이제 끝났다.”

차갑게 들려오는 목소리.

마침내, 지옥 같았던 훈련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 * *

훈련이 끝났다.

존 해리슨은 덜렁거리는 팔을 힘겹게 붙잡은 채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훈련의 의미.

지금은 완벽하게 받아들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자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음을 알기에, 인류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예방 주사를 놓아 주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만약 이와 같은 절망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인류는 49일의 재앙이 들이닥쳤을 때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인정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큰 뜻임을.

단순히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마련한 자리임을 알기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말했다.

“고생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피를 벅벅 닦아 냈다.

수만 명의 피가 진득하게 딸려 왔지만, 그중에 그가 직접 흘린 피는 단 한 방울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황제 폐하. 혹시 어디로 가는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존 해리슨이 물었다.

궁금했다.

미국에 이은 다음 타겟.

자신들이 경험한 이 끔찍한 고통을 누가 경험하게 될지를.

“우리는 지금부터 중국으로 간다.”

순간.

존 해리슨은 웃음을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를 찬양하는 왕위룡.

그가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미국보다도 더한 절망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미국의 참담한 패배.

그것은 곧 세상을 충격에 빠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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