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4화 49일 (7)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동섭조차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가 천천히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며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절대자라고 불리는 너희가 어떤 방식으로 탄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는 ‘신’을 경험한 적이 있나.”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강민호 바로 앞이었다.
강민호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로만 드미트리는 그에게 치료를 위한 포션을 건네며 검을 뽑았다.
지켜 주겠다는 의미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허점을 노출하는 일인데도, 조동섭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강민호는 로만 드미트리를 믿었다.
조동섭을 한번 살펴보고는 곧바로 상처 부위에 포션을 들이붓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이로써 외상은 치료되겠지만 문제는 내상이었다.
이는 운기조식(運氣調息)이 필요한 문제이나, 만약 치료 도중에 충격을 받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감하게 운기조식에 돌입했다.
조동섭이 지켜보는데도, 강민호는 로만 드미트리 뒤에서 가부좌를 틀고 내부의 마력을 다스렸다.
팽팽한 긴장감이 일었다.
조동섭을 대놓고 무시하는 행위이니만큼, CCTV 너머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숨을 죽였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조동섭도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상식적으로는 강민호부터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가 매우 거슬렸다.
저 녀석은 도대체.
왜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르단 말인가.
절대자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경험하고도, 저렇게 고개를 빳빳이 드는 존재는 평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수많은 차원.
수많은 생명체.
그중에는 약한 존재도, 정말 강한 존재도 있었지만, 결과론적으로 감히 절대자와 차원의 명운을 걸고 반기를 내건 존재는 없었다.
궁지에 몰려서 발악하듯 달려드는 것과는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절대자와의 타협을 허락하지 않았다.
치료는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조동섭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신이라 인정되는 존재를 만난 적이 있다. 세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것 같은 그 존재는, 오히려 신이기에 한발 물러나 세상을 방관하더군. 문제가 발생한다면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힘으로 문제가 해결되도록 유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알렉산드르로 인한 변수.
신은 그 해결책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택했다.
사실 신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생각한다면, 그가 ‘알렉산드르’를 직접 처리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걸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본인은 개입하지 않았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로도 막아 내지 못한다면,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하며 차원의 멸망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한때는 그에 관한 생각이 많았다.
신은 어떤 존재일까.
그는 무슨 이유로 존재하며, 초월적인 능력을 보유하고도 방관자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은 고민의 답을 내렸다.
그것은 앞으로의 미래를 관통할 주제이며, 그렇기에 절대자를 마주하고도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수 있었다.
설령 절대자 또한 신의 범주에 해당하는 존재일지라도.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가 그리도 전능하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증명하라. 암살로 내 사람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닌…….”
슥.
검을 늘어트렸다.
대놓고 허점을 드러냈다.
“나를 죽여라.”
* * *
조동섭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름대로 여러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지만, 이와 같은 시나리오는 상상조차 하질 못했다.
차원 너머.
볼피르의 생각이 조동섭에게 깃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의도한 함정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죽는다면, 하찮은 인간들은 생존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이겠지. 참으로 꼴사나운 상황이야. 내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이상, 로만 드미트리가 원하는 완벽한 결과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다.’
로만 드미트리 너머.
강민호가 보였다.
만약 그를 죽일 작정이라면,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건 재미가 없겠지.’
로만 드미트리는 영악했다.
절대자의 능력을 치켜세우며 본인을 직접 처리하라고 말했으니, 로만 드미트리를 피해 강민호를 처리하는 결과는 절대자의 그릇을 증명할 것이다.
그건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 그렇다고 로만 드미트리와 정면 대결을 벌인다면, 겨우 아바타의 힘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답은 간단했다.
‘상황을 이용해, 로만 드미트리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힌다.’
웃음을 삼켰다.
일반 사람들은 보지 못할 공격으로 강민호를 노린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반응하고 그것을 막으려고 할 터.
그때 자신의 전력을 분출해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할 것이다.
단 한 번의 일격에 목숨을 걸어야 할지라도, 그것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 내는 순간 사람들은 진실을 목격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또한.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둘의 긴장감이 극한에 도달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조동섭이 움직였다.
“그래, 널 죽여 주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놓고 로만 드미트리를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무형의 마나를 발현해 강민호를 노렸다.
동시에.
‘링크.’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볼피르의 힘이 깃들었다.
조동섭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폭되었고, 그는 곧바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강민호를 보호한 뒤에 자신을 막아서느냐, 아니면 오로지 자신의 공격에 집중하느냐. 양자택일(兩者擇一)이었다.
첫 번째를 선택하는 순간 자신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내지 못할 것이고, 두 번째를 선택하는 순간 강민호는 보호받지 못해 처참하게 죽을 것이다.
조동섭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승리를 확신하던 그의 눈빛은, 로만 드미트리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충격적인 광경을 맞이했다.
콰콰콰콱!
콱.
“……?!!”
공격이 무산되었다.
강민호를, 로만 드미트리를 노리던 마력이 거대한 마력에 산산이 부서지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그대로 조동섭의 얼굴을 틀어쥐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얼굴이 붙잡힌 조동섭은, 어떻게 대항하기도 전에 하늘이 빙글 돌더니 땅바닥에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콰앙!
“컥!”
피를 토해 냈다.
믿기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결과란 말인가.
일부라고는 하나 볼피르의 힘을 받아들였는데도,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 순간.
푹!
눈을 부릅떴다.
서늘한 감각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자,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차가운 눈빛이 보였다.
“내가 하나 약속하지. 너희가 인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꽉.
얼굴을 짓눌렀다.
바둥거리는 조동섭을 제압하더니.
“당한 것 이상의 복수는 반드시 해 주마.”
푹.
푹, 푹, 푹.
검을 반복해서 쑤셔 넣었다.
깊숙이 박혔다가 빠져나가는 통증에 조동섭이 발버둥을 쳤지만, 그의 힘으로는 로만 드미트리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끔찍한 통증이 반복해서 찾아왔다.
피가 튀었고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지르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그의 머리를 짓누른 채로 복수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것은 정말.
적들을 향한, 순수한 악의(惡意)의 표출이었다.
* * *
조동섭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마침내 목숨을 잃은 그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CCTV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CCTV 너머.
전 세계가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비인간적으로 느낄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벽을 쌓았다.
맹목적인 신뢰를 요구하나, 적을 마주할 때의 자신은 절대 인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눈앞의 결과로 증명했다.
절대권력.
막중한 책임감이 동반되는 그 자리에, 공포를 상징하는 자신의 잔인한 면모는 반드시 필요했다.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신의 존재를, 앞으로의 상황을.
“한때 사람들은 ‘절대자’를 신과 동급으로 여겨 절대 대항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인류를 무너트리기 위해 계략을 도모하고, 나 하나 처리하지 못해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절대자들의 진실이다.”
모든 상황은 처음부터 계획되었다.
사람들에게 절망을 훈련시키며, 그들이 승리에 대한 믿음을 얻을 계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절대자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그들을 끌어냈을 것이다.
인류의 명운이 걸린 싸움에, 사람들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았다.
“보아라. 지금 너희가 내려다보는 이 시체가 절대자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들 또한 스스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존재에 불과하다.”
강하게 말했다.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강렬한 눈빛.
로만 드미트리는 스스로를 믿었다.
누군가가 확고하게 선두에서 나아가야, 나약한 인간들이 스스로를 믿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부 지도자는 우매한 백성을 탓한다.
진실은 다르다.
백성이 우매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은 스스로 선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기에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평화를, 누군가는 전쟁을, 누군가는 화합을, 누군가는 분란을. 삶은 어떤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전쟁을 생각하는 지도자는 평화를 말하는 백성을 우매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나라의 현실은 백성들이 아닌 지도자로 인한 결과다.
나라 전체를 보기에.
백성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판단하기에, 지도자는 책임질 수 있는 판단을 내리고 행해야만 한다.
고로.
로만 드미트리는 확고히 말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는 본인이 감당할 몫이며, 반드시 승리라는 결과를 쟁취할 것이다.
“이 화면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들어라. 두려워하되, 공포에 잠식되지 마라. 너희가 따르는 나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자보다 강하며, 나를 믿는다면 죽음 끝에 인간들은 반드시…….”
확신.
제각기 다른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목적을 심어 주었다.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 *
번뜩.
볼피르가 눈을 부릅떴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 존재는,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통증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 이게 무슨.”
링크의 부작용이었다.
조동섭과의 연결 고리를 형성하면서,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고통이 볼피르에게도 전달되었다.
숨이 가빴다.
절대자로 존재하며 그는 단 한 번도 패배를 걱정하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고통을 경험할 일도 없었다.
웬만한 생명체는 절대자들이 만든 판에서 자멸했다.
대재앙을 감당하지 못해 죽거나, 서로 분열하거나, 겨우 살아남는다고 한들 절대자가 통보하는 결말에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처음 경험해 보는 반응과 직접적인 타격에, 볼피르는 자신의 동족에게 말했다.
“조타르. 너는 신을 경험한 적이 있나.”
고개를 저었다.
다른 동족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그 누구도 신을 경험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분노가 치밀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볼피르는 자신의 세상이 무너지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 외에 절대적인 존재를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당연하게 스스로를 신이라 여겼건만, 감히 하찮은 존재가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신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며, 나는 이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악의를 분출했다.
인류를 장난감으로 바라보던 시선이, 지금은 반드시 그들의 파멸을 바랐다.
“장난은 이제 끝이다. 49일의 기한이 모두 끝났을 때, 전력을 다해 반드시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다.”
분노를 삭이고.
인내할 것이다.
절대자들에게 그것은 생소한 경험이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49일 뒤.
인류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재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 *
49일 중.
조동섭의 사건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로 인해 많은 말이 오갔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사람들은 그 사건에 머무르고 있을 수 없었다.
하루, 이틀.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렇게 48일 뒤.
마침내 절대자가 예고한 대재앙을 딱 하루 남긴, 정말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날의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