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96화 (596/615)

596화 마지막 재앙 (2)

미국 워싱턴 D.C.

존 해리슨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수뇌부들은, 한자리에 모여 로만 드미트리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재앙이라는 먹구름이 모두 지나간 뒤,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툭.

통신이 종료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지에, 존 해리슨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전의 순간이 도래했다. 우리는 오직 이날만을 위해 그동안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했으며,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따라 목숨을 건다면 우리는, 아니 전 인류는 반드시 살아남을…….”

벌컥.

“큰일 났습니다, 대통령님!”

중간에서 말이 끊겼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미군 간부는 그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지금은 그런 문제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밖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수도 한복판에 ‘게이트’가 생성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결국, 시작되었구나.”

사람들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얼룩졌다.

미리 대비하고는 있었지만, 한국 시각으로 49일이 되었을 때 이렇게 바로 대재앙이 시작될 줄은 몰랐다.

존 해리슨을 필두로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정부 건물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았는데, 밖으로 나가자마자 조금 전까지 파랬던 하늘이 검은 먹구름에 가려진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는.

쿠르르르르르르릉.

하늘에서 거대한 생명체가 천천히 날아들었다.

먹구름만큼이나 검은 피부와 박쥐를 연상시키는 피막(皮膜)의 날개, 마지막으로 붉게 물든 눈동자.

S등급 몬스터 블랙 드래곤(Black Dragon)이었다.

시작부터 블랙 드래곤이 출몰한 상황에, 존 해리슨이 빠르게 대응했다.

“전군에게 명령하라. 시작부터 전력을 발휘해 블랙 드래곤을 척결하라. 겨우 S등급 몬스터 정도로는 미국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만한 절대자들에게 증명…… 이, 이게 무슨!”

눈을 부릅떴다.

이번에도 말을 채 끝내기 전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크르르르륵.

캬악!

하늘 너머.

블랙 드래곤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 한 마리의 존재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면, 이윽고 그 너머로 수십 마리의 블랙 드래곤이 차례로 출몰했다.

존 해리슨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S등급 몬스터는 2~3마리만 있어도 웬만한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의 존재건만, 지금 눈앞에 출몰한 블랙 드래곤은 이제껏 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규모였다.

그제야 알았다.

이번 대재앙.

인류의 명운을 건 싸움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 * *

블랙 드래곤의 출몰.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확히 49일이 되었을 때, 미국과 같은 현상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중국]

“막아!”

“빌어먹을!”

중국의 무인들.

그들이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평범한 생명체라면 한눈에 들어와야 하건만, 10m에 육박하는 거대한 육체는 시야를 가득 메우고도 벗어나는 부분이 있었다.

S등급 몬스터 싸이클롭스(Cyclops). 중국의 무인들이 공격하면서 그의 외피에 피가 튀고 폭발이 일어났지만, 싸이클롭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의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콰앙!

콰콰콰콰콱!

그대로 사람들이 쓸려 나갔다.

마나로 강화된 육체마저도 펑펑 터져 나갔고, 미국과 마찬가지로 싸이클롭스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수십 마리.

그들이 베이징을 쓸어버렸다.

이대로라면 사람들이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왕위룡을 필두로 중국의 무인들이 나섰다.

“아직 드미트리를 소환할 때까지는 4시간이 남았다. 대재앙이 시작되자마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짐이 될 수는 없는 일. 반드시 우리만의 힘으로 저 악의 무리를 모조리 처단한다.”

“충.”

“충.”

스릉.

왕위룡이 검을 뽑았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겠지만, 그에게 물러나는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싸이클롭스들이 득실거리며 몰려 있는 광경에, 왕위룡과 무인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주]

미국과 중국.

그들의 사정은 그나마 나았다.

그들은 강력한 국방력을 확보했기에 수십 마리의 S등급 몬스터를 상대로도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호주와 같은 나라는 달랐다.

뱀의 머리.

거대한 몸체.

히드라(hydra)가 호주의 병사들을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캬악!

콰콰콰콰콱.

강력한 마력이 병사들을 휩쓸었다.

호주로서는 나라의 명운을 건다면 S등급 몬스터 3~4마리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히드라의 숫자가 무려 수십에 달한다는 사실이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로만 드미트리의 마지막 발언에 의욕을 불태우던 그들은, 막상 현실의 벽에 부딪히자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했다.

그러한 광경에.

한 수뇌부가 소리쳤다.

“이, 이대로라면 캔버라가 함락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대한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4시간은커녕, 겨우 1시간도 저희의 힘으로는 절대 버틸 수 없습니다.”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호주의 총리는 생각이 달랐다.

절망적인 상황임은 맞으나, 이것이 호주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우리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 ‘절망적인 상황’을 훈련했다. 겨우 1시간조차 버텨 내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도움을 바란다면, 대한제국으로서는 전 세계 국가의 도움 요청에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틴다. 버티고 버텨, 우리의 목숨으로 시간을 번다.”

“……알겠습니다.”

이를 악물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훈련을 경험했기에, 호주의 병사들도 절망적인 상황에 무기를 떨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강민호의 사건으로 증명되지 않았던가. 버티고 버틴다면, 허무하게 죽을지라도 그 죽음으로 벌어들인 시간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믿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호주와 같은 나라들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SOS 요청을 삼켜 낸 이유는, 조금 전에 들려온 소식 때문도 있었다.

[대한제국에 절대자가 나타났습니다.]

절대자의 출몰.

인류의 진정한 적은 몬스터들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야말로 가장 강력한 적을 상대해야 하기에, 호주의 총리는 악에 받친 얼굴을 보였다.

지금은 계획한 대로 버텨야 할 때였다.

간절하게 빌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승리하기를.

절대자를 상대로 무너지지 않기를.

* * *

그 시각, 대한제국.

그곳은 다른 나라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전 세계가 S등급 몬스터의 출몰로 고통받는 것과는 다르게, 대한제국에는 단 하나의 존재가 나타났다.

콰드드드득.

차원에 균열이 일었다.

공간이 짓이겨지고 찢겨 나가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無)의 공간 너머에서 회색빛의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기이한 장면이었다.

회색빛의 존재는 일반적인 생명체처럼 보이지 않았으며, 중력을 거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공을 계단처럼 밟아 아주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툭.

발을 내디뎠다.

땅의 감촉을 느끼며, 그가 오만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찮은 인간들 주제에 살기 위해서 많이도 모였구나.”

그의 이름.

카르가스였다.

49일의 대재앙을 준비하며, 카르가스는 동족들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참으로 같잖지 않나. 겨우 아바타를 죽여놓고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행태가. 나는 대재앙이 시작되면 혼자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할 것이다. 인류의 희망으로 여겨지는 그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인류에게 잔인한 현실을 증명할 것이다.’

흥미가 돌았다.

이 상황.

눈앞의 존재.

볼피르는 끝까지 만류했다.

본인이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며 경고했지만, 카르가스는 스스로를 믿었다.

절대자들은 그동안 억겁(億劫)의 세월을 살았다.

수많은 생명체를 만나며 그들에게 절망을 선사했지만, 단 한 번도 목숨의 위협을 받을 만한 존재를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정확히는 전부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짓밟고 상대를 압도했기에, 로만 드미트리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우리를 상대로 적의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너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존재일 것이다. 고로 친히 ‘나’를 상대할 기회를 주겠다. 내 앞에 나서라. 입만 나불거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콰릉.

콰르르르르릉.

마력이 들끓었다.

카르가스가 기대에 찬 모습을 보였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부름에 응한다면?

그를 찢어발길 것이다.

자신의 우월함을 사람들에게 증명해, 이번에는 압도적인 공포로 인간들을 절망에 빠트릴 것이다.

반대로 뒤로 물러나 나타나지 않는다면?

실망스러운 일이나 그것도 재밌는 전개였다.

인간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일일 테니까.

사실 본인을 포함한 일부 절대자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로만 드미트리가 부름에 응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말과 행동은 다른 문제다. 말로는 절대자든 신이든 뭐든 처리할 수 있겠지만, 손짓 한 번에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자신들을 상대하는 것은 인간의 태생으로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데도, 카르가스는 절대 인간을 본인과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때였다.

“받아들이지.”

사람들 너머.

로만 드미트리가, 인파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 * *

씨익.

카르가스가 웃었다.

기어코!

기어코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마주 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카르가스는 이 상황이 재밌어서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대체 이 생명체는.

로만 드미트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를 잔인하게 찢어발긴 뒤에, 뇌만큼은 따로 보관해서 그 안의 내용물을 분석하고 싶을 정도였다.

확실한 것은 상황이 재밌게 전개되었다.

절대자들은 항상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바라왔지만, 정말 눈앞에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인간이 나타나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싸우려 하다니.]

[카르가스. 건방진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라!]

[아주 귀중한 경험이야. 우리에게 대항하는 인간이라니.]

차원 너머.

동족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두웅.

카르가스의 몸이 떠올랐다.

중력을 거스르듯 점점 높이 올라가던 그가, 로만 드미트리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럼 어디 버텨 보거라.”

번뜩.

찰나의 순간.

세상이 요동쳤다.

카르가스의 부름에 응하며, 한 인간을 향해 감당할 수 없는 파괴력을 선사했다.

콰릉.

콰콰콰콰쾅!

지진이 일어났다.

땅바닥이 폭삭 내려앉으며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집어삼키려 했고, 빠르게 움직여 무너지는 지반을 피하자 갑작스럽게 갈라진 틈으로 해일(海溢)이 들이닥쳤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곳은 바다도 아니고 대한제국의 수도 한복판인데, 카르가스의 손짓 한 번에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했다.

동시에.

“제발, 이대로는 죽지 마라.”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세상이 한순간 밝게 물들더니, 수천 개의 번개 다발이 한 인간을 향해 미친 듯이 떨어져 내렸다.

콰앙!

콰콰콰콰쾅!

이건 그야말로 자연재해(自然災害)였다.

카르가스의 힘은 자연 그 자체에서 비롯되었고, 인간의 연약한 몸으로는 자연의 분노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카르가스를 비롯한 절대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생명체가 손짓 한 번에 쓸려 나간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도 이것에서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번뜩.

콰콰콰콰콱!

마력이 휘몰아쳤다.

거대한 마력에 쓸려 나갔어야 할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한번 휘둘러 자연의 기운을 베어 버렸다.

“더 해 봐.”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는 마력에 번개가 힘을 잃었고, 거칠게 밀고 들어가던 해일도 로만 드미트리와 맞닥트리자 벽에 부딪힌 것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지진도 마찬가지였다. 방금까지 땅을 전부 뒤집을 것처럼 갈라지던 지반이, 로만 드미트리가 내딛는 땅만큼은 건재했다.

신의 경지.

자연과의 동화를 이루어 냈다.

처음에는 상대의 공격을 허용했던 로만 드미트리가, 단 한 번의 공방에 의구심이 들었다.

“만약 그게 끝이라면…….”

작은 의문이었다.

자신을 끝내겠다고 시도한 공격치고, 로만 드미트리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파괴력.

정말 어쩌면.

절대자들은 그리 강력한 존재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들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기에 손짓 한 번에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차원을 마음대로 다루지만, 그들이 차원 전체를 압도할 만큼 강하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았다.

그들은 차원의 경계를 무너트려 해당 차원을 멸망시켰다.

마계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위기를 경험했을 뿐이지, 로만 드미트리가 상대했던 마왕은 절대자들의 직접적인 강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직접 재림해 생명체를 상대하는 일.

절대자들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약 그들의 힘이 검증받지 않았다면, 겨우 방금의 공격을 믿고 오만한 발언을 내뱉은 것이라면.

“내가 너희를 과대평가했구나.”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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