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98화 (598/615)

598화 마지막 재앙 (4)

30분 전.

독일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Green Dragon) 수십 마리가 출몰했지만,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훈련을 통해 많은 부분을 준비한 상태였다.

애초에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단번에 쓸려 나가는 병사들의 모습에도, 독일의 지휘관들은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침착해라!”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4시간, 아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나타날 때까지만 버티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공백을 메워라!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베를린은 쑥대밭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

그 중심에는 독일의 S등급 헌터, 일명 철옹성(鐵甕城)의 미카엘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있었다.

[터렛(turret) 가동.]

우웅.

철크덕, 철크덕.

성벽 위.

대공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던 터렛들이, 미카엘의 마력이 스며들며 ‘마법 무기’로 변화했다. 그 숫자는 무려 천여 개에 달했다.

한때 베를린에 이만한 터렛을 설치하는 것은 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재앙을 앞둔 상황에서 독일은 지난 판단이 옳았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카엘의 존재.

그가 그린 드래곤에 대항할 힘을 부여했다.

퍼엉!

파파파파파파팟.

터렛들이 미친 듯이 불을 뿜어 댔다.

어떤 것은 거대한 폭탄을, 어떤 것은 기관총에서 수천 발의 탄환을, 하늘을 날아다니며 브레스를 발사하는 그린 드래곤을 향해 엄청난 화력을 선사했다.

물론 독일만의 힘으로 버틸 만큼 희망적이라는 사실은 아니었다.

미카엘의 특성상 조금 더 잘 버틸 뿐이지, 그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믿었다.

이 끝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음을, 독일이라면 4시간은 버틸 수 있음을.

악에 받쳐 대항했다.

매 순간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지만, 이번이 마지막 대재앙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은 사람들에게 버틸 여력을 부여했다.

이전 대재앙과는 달랐다. 아득바득 버티더라도 다음 대재앙을 준비해 왔던 그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거대한 의지.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을 때, 갑작스럽게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그 존재’가 나타났다.

“우매한 인간들아. 기억하라. 너희는 모두 로만 드미트리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절대자 크라켈.

대한제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존재가 독일에 나타났다.

순간.

미카엘이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 올렸다.

지금은 그린 드래곤이 아니라, 크라켈을 쓰러트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폭격(爆擊).]

쿠르르릉.

콰콰콰콰콰콱!

엄청난 화력을 분출했다.

마치 전투기가 지상 일대를 폭격하는 것처럼, 크라켈을 목표로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폭탄이 발사되었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마법으로 이루어진 폭탄.

수많은 마법진이 미카엘의 마력을 보조했기에, 미카엘은 S등급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을 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까닥.

크라켈이 손가락을 내리그었다.

그 하나의 동작에, 사람들로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파앙-!

콰콰콰콰콰콸!

하늘에서 해일이 일어났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는데, 바닷물이 넘쳐 흐르듯 엄청난 양의 물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퍼퍼퍼퍼펑.

바닷물에 닿은 폭탄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해일은 미카엘의 화력을 집어삼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성벽 위에 존재하는 독일의 병사들을 그대로 쓸어버렸다.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독일의 방어 체계가 무너졌고, 사방에서 병사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래도 어떻게든 대응하려던 독일의 지휘관들은, 하나의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희망이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아아아악!”

미카엘.

그가 해일에 쓸려 갔다.

그리고 끝이었다.

더는 찾아볼 수 없는 미카엘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제야 절대자를 상대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인류는.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지 못한다는 잔인한 진실을 말이다.

* * *

절대자가 사라진 직후.

대한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인천에만 수천 개의 게이트가 생성되면서, 정말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몬스터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절망적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의지가 강력하다고 평가받지만, 그들조차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캬악!

크르르르륵.

타타타타타탁.

몬스터들이 밀려들었다.

세상을 새카맣게 물들이는 그들의 존재가, 단 한 명의 인간과 맞닥트리는 순간 처참하게 찢겨 나갔다.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

번뜩.

콰콰콰콰콰콰콱!

일격.

눈앞의 존재들을 소멸시켜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몬스터들을 단번에 압도하며,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대한제국의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반격을 시도했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면서 더는 평화로운 대한제국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크, 큰일 났습니다. 미국에 절대자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에 절대자가 나타났습니다!

-호주에…….

절망적인 소식이 빗발쳤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절대자와의 결전을 준비하며,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의 능력을 활용한 게릴라 작전을 걱정했다.

‘만약 절대자들이 날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인류와의 전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이동하며 인류를 무너트리려고 하겠지. 내가 대한제국에 남는 것은 무의미하다. 절대자들을 처리하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 싸움이라면, 나는 그들의 존재를 추격해야만 한다.’

자리를 비운다면.

대한제국은 죽음으로 물들 것이다.

딜레마였다.

절대자들은 그 사실을 알고 양자택일을 강요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선택엔 망설임이 없었다.

번뜩.

콰콰콰콰콰콱!

몬스터들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마나를 실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들어라! 나는 지금부터 절대자들을 추격할 것이다. 그들을 모조리 도륙해 반드시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것이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라. 나 로만 드미트리를 믿어라. 샐러맨더 대륙을 구했듯이, 이 세상에서의 결말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음을 돌렸다.

김준혁이 시야에 보였다.

“버틸 수 있겠나.”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를 지나쳤다.

뒤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한제국의 희생을 줄일 방법은 명확했다.

‘너희는 절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절대자.

그들은 난생처음으로 쫓기는 자의 입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 *

단 몇 분.

독일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폐허가 되어 버린 베를린의 모습에, 크라켈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참 멍청한 존재들이야. 애초에 우리가 부여한 힘으로 싸우는 주제에, 감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자존감이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돌연변이일 뿐이다.

수많은 차원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하찮은 생명체들은 절대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크라켈. 그만하고 이동하라. 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간 로만 드미트리에게 꼬리를 붙잡힐 수도 있다.]

볼피르였다.

매우 현실적인 조언이었지만, 크라켈은 순간 반발감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카르가스를 쓰러트린 이상, 그가 우리조차 감당하기 힘든 존재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겨우 인간일 뿐이다. 차원을 다스리는 우리를 추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로만 드미트리가 독일에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곧바로 차원 너머로 도망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볼피르. 더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단호했다.

볼피르는 의식 너머로 계속해서 말했지만, 크라켈은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눈앞의 광경을 즐겼다.

자신과 카르가스는 다르다.

카르가스는 오만해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소멸당했지만,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적절한 타협.

크라켈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아직 모습도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서 도망치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순간.

확.

파파파파팟.

차원이 일그러졌다.

그 너머.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크라켈은 권능을 발현해 그대로 차원 너머로 도망치려고 했다.

인간들의 힘과는 다르게 크라켈은 단 0.1초 만에 차원의 경계를 허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번뜩.

콰콰콰콰콰콱!

그대로 크라켈의 육신이 찢겨 나갔다.

* * *

후두두둑.

하늘에서 크라켈의 육신이었던 것이 떨어져 내렸다.

0.1초의 세계.

로만 드미트리는 그 세계를 관통하며, 크라켈이 도망치기도 전에 그의 존재를 찢어발겨 버렸다.

“……와.”

“아아.”

성벽 위.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그들에게 절대자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였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신을 찢어발기며 본인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순간 사람들이 열광적인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직도 주변에는 그린 드래곤을 비롯한 위험 요소가 득실거렸지만, 절대자의 죽음은 승리에 대한 강한 확신을 부여했다.

대한제국에서 독일로.

단번에 차원을 이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재앙을 준비하며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대상은 단 한 명.

오로지 한 명의 이동을 위해서 힘을 집중하는 대신에, 이전까지의 텔레포트 마법진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마법을 처리했다.

이번에는 김판석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독일의 마법사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신호에 마법진을 가동했고, 그 결과가 바로 크라켈의 죽음이었다.

‘절대자는 분명 나를 조우하자마자 도망치려고 했다. 대놓고 나의 존재를 배제하겠다는 의미겠지.’

탁.

성벽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독일의 지휘관에게 말했다.

“지금 너희가 목격한 광경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달하라. 베를린 한복판에 절대자가 나타났으나 내 일격조차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을. 너희는 버텼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스스로를 신이라 말하던 절대자들이 막상 ‘나’를 마주하자 도망치려 했다는 절대자들의 초라한 진실을 밝혀라.”

크라켈의 최후.

카르가스와는 달랐다.

그래도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살의를 표출했던 그와는 다르게, 크라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려다 단번에 찢겨 나갔다.

두 개의 죽음은 의미하는 바가 완전히 달랐다.

절대자들이 로만 드미트리와의 승부를 포기했다는 것은, 절대자의 존재가 더는 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독일의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목격한 것을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희망이 번져 나갔다.

믿었다.

방금 직접 확인한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인류를 구할 인물이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절대자의 공격을 받은 나라들은, 독일의 선례로 분명히 희망을 얻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걸음을 돌렸다.

‘지금까지 둘.’

추정되는 숫자는 아홉.

아직 멀었다.

카르가스에 이은 크라켈의 죽음으로, 그들은 토끼가 굴을 파 놓듯이 분명히 더욱 대비할 것이다.

하지만.

‘모조리 소멸시킨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 * *

사람은 하나.

남은 절대자는 열.

로만 드미트리가 크라켈을 죽인 것은 고무적인 성과이나, 그렇게 소모되는 1분 1초마다 절대자들은 참담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볼피르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애초에 몬스터들조차 막아 내지 못한 호주는, 절대자의 출현으로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성벽이 무너졌다.

정확히는 용암에 녹아내렸고, 의욕을 보이던 병사들이 절망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보기 좋은 얼굴이구나.”

절대자 카르트.

그가 사나운 미소를 보였다.

무력하게 쓸려 나가는 인류의 모습에, 크라켈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가 ‘신’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얻었다.

이 광경을 보라! 차원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손짓 한 번으로 자연을 다루는데, 대체 이게 신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

의식 너머.

크라켈의 죽음이 느껴졌다.

당혹스러웠다.

카르가스야 무모하게 전면전을 시도하다가 죽임을 당했다지만, 크라켈은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와의 싸움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못하고 죽어 버릴 정도의 전력 차이라니. 충만하게 차올랐던 자존감이 떨어지는 그때, 카르트의 예민한 감각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차원 너머.

무언가가 경계에 발을 들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이윽고 차원의 경계를 허물며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가 아닌 익숙한 얼굴의 한 인간이었다.

“흣 차-.”

탁.

바닥에 착지했다.

사내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절대자 카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개 같은 새끼들. 왜, 황제 폐하가 아니니까 할 만할 것 같냐?”

그의 정체.

그는 바로 김판석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