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마지막 재앙 (6)
정말 생소한 기분이었다.
김판석의 감각이 무섭게 확장되며, 그는 마치 존재 자체를 초월한 느낌을 받았다.
화륵.
화르르르르륵.
바로 코앞에 지옥의 불길이 날아들었다.
불과 조금 전만 하더라도 목숨을 앗아 갈 것 같던 강렬한 기운이, 지금은 아무런 위협도 선사하지 않았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갔다.
9개의 서클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던 마나가 10번째 고리에 도달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세상의 흐름이 두 눈에 보이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마법의 체계가 아닌 저 불길을 소멸시키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파삭.
파사사삭.
불길이 흩어졌다.
9서클의 메테오 스트라이크마저 집어삼켰던 지옥의 불길이, 김판석의 마력에 무력하게 사그라지고 말았다.
먼지처럼 흩어지는 불길 너머로. 절대자의 경악스러운 표정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 어떻게?!”
방금의 마력.
본인들과 같았다.
김판석은 자연에 동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연을 상대로 강한 통제력을 보였다.
애초에 절대자들의 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다.
지옥의 불길 또한 한 차원을 불태운 강력한 힘. 그런데 김판석이 자연 자체를 통제하는 경지에 이르자, 지옥의 불길은 김판석을 상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김판석의 차가운 시선은 이미 그다음 그림을 떠올렸다.
“메테오 스트라이크.”
별다른 캐스팅도.
특별한 준비 과정도 없었다.
언령(言靈).
마법을 떠올리고 입으로 내뱉자, 10번째 서클에서 분출되는 마력이 마법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먹구름 너머로 종말이 모습을 드러냈다.
9서클의 메테오 스트라이크는 한눈에 담길 정도였지만, 지금의 메테오 스트라이크는 세상 전체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엄청난 위용을 보였다.
카르트는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생명체를 만났지만, 마력에서부터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얼어붙었다.
공포에 빠져들었다.
생소한 경험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 모습에, 김판석은 비릿한 웃음을 보였다.
“너희 또한 우리와 같은 생명체였구나.”
우스웠다.
공포에 잠식되는 존재가 감히 신을 표방하다니.
카르가스의 힘은 빠르게 소멸되었다.
겨우 30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자신의 육체로는 이 힘을 오래 발현할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30초면 충분하기에.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김판석은 태생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만 죽어라.”
콰앙!
콰콰콰콰콰콰콰쾅!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작렬했다.
거대한 마력이 몰아치며 카르트의 존재를 휩쓸었고, 뒤늦게 절대자의 권능을 발현했으나 파멸적인 흐름에 대항할 방법은 없었다.
자연의 기운을 통제하는 존재들. 그들의 힘은 마법사와 맞물렸다.
마법사들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천적이지만, 그 말은 반대로 ‘같은 맥락’의 힘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다면 절대자들조차 힘의 우위를 절대 뒤집을 수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10서클은.
그런 의미였다.
스스로를 넘어서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그 힘에, 카르트는 경악한 얼굴로 그대로 쓸려 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에.
“하아, 쥑이네.”
김판석은 한껏 격양된 표정을 보였다.
* * *
브라질 리우.
그곳은 멸망의 위기를 맞이했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지상을 바라보며, 볼피르는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10번의 대재앙을 버텨 내는 것이, 너희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슥.
손가락을 들었다.
끝낼 차례였다.
끝까지 버텨 보겠다고 아득바득 발악하는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버려, 절대자에게 대항한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사실 지금의 광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도 아닌 한낱 인간들인데도, 적의를 드러내는 그들의 눈빛은 시간을 들여 눈을 도려내고 싶었다.
‘지금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 우리의 발목을 붙잡겠지.’
짜증이 치밀었다.
인간을 상대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자체가, 볼피르와 같은 절대자들에게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마력을 일으켰다.
그렇게 끝내려는 그때.
“?!!”
홱.
고개를 돌렸다.
볼피르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지며, 정확히 ‘카르트’가 소멸된 호주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직 잉글랜드에 있는 상태고, 김판석의 등장을 확인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카르트가 그를 상대로 당하고 말았다.
김판석이 제단 스킬을 통해 카르가스의 힘을 흡수하고, 10서클의 영역에 도달해 카르트를 소멸시켰던 일련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대로 빨려들어 왔다.
카르가스, 크라켈, 카르트.
단순하게 세 번째 죽음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닌 김판석에게도 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볼피르의 정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조금 전, 백의의 마법사가 카르트의 힘을 확보했다. 제단 스킬이 일회성이라고는 하나, 이로 인해 그의 존재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위협이 되겠지. 계획이 틀어졌다. 내가 생각한 게릴라 작전은 로만 드미트리 하나만을 피하는 것이나, 지금부터는 백의의 마법사 또한 예외로 두어야 한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절대자들은 그동안 수많은 차원을 무너트렸지만, 이처럼 머리가 복잡한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통을 삼켜 냈다.
이겨 내야만 했다.
신에 버금가는 존재들이,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볼피르는 곧바로 다른 절대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로만 드미트리, 그리고 백의의 마법사와의 격돌을 피하라. 카르가스가 일방적으로 당해 버린 이상, 우리는 그들과의 전면전을 최대한 피해 일단 적의 숫자를 줄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개미같이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그들 전부를 살려 두면서 싸움을 이어 나간다면 우리가 불리하다.]
그 시각.
로만 드미트리가 움직였다는 신호를 받았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차원의 경계에 들어왔다는 신호에 망설임 없이 뒤로 물러났다.
브라질?
천천히 멸망시키면 그만이다.
지금은.
화악-
차원 너머로 사라지는 볼피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만 드미트리와의 조우를 배제할 것이다.
* * *
카르트의 죽음.
절대자들은 더욱 영악하게 움직였다.
한 장소에서 절대 5분 이상 머무르지 않았고, 간신히 몬스터들의 공격을 버텨 내고 있는 사람들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선에서 물러났다.
그때부터는 특별한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가 강하다고는 하나,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 적들을 처리할 방법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화륵.
화르르르륵.
“화, 황제 폐하. 절대자는 이미 도망쳤습니다. 이곳 바르샤바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곧바로 사라졌습니다.”
폐허가 되어 버린 공간.
폴란드의 지도자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악착같이 버텼지만, 절대자가 잠깐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였다.
이대로라면 몬스터들의 공격도 막을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이곳에 머물러 제발 폴란드의 안위를 확보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호주가 다시 공격당했습니다!]
[스페인이 위험합니다!]
[절대자가 또다시…….]
통신기를 통해 각국의 상황이 들려왔다.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그들로 인해, 로만 드미트리는 매번 헛수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김판석도 이번에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카르트를 쓰러트리고 잠시 탈진했던 그는, 곧바로 전선에 합류해서 절대자를 추격하려고 했다.
문제는 로만 드미트리와는 다르게 그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애초에 절대자와 마주치는 일 자체가 발생하지 않기도 했지만, 막상 맞닥트리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제단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적이 도망친다면 상황이 매우 곤란했다.
궁지에 몰렸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절대자들의 의도는 노골적이었고, 일단 인류 전체를 궁지에 몰아넣고 싸움을 이어 나가려고 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 절대자들을 추격할 수 없다. 그리고 인류 전체를 잃어버린다면, 전쟁에서 승리한 의미 또한 존재하지 않겠지. 피해를 최소화해야만 한다.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게릴라 작전으로는 승산이 없음을 적들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방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눈에 이상한 마나의 흐름이 보였다.
‘차원의 경계. 조금 전에 절대자가 저곳을 통해 사라졌다면, 저 끝에 절대자가 존재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차원의 경계를 떠돈 경험이 있기에,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다르게 그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차원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경계에서 미아가 되어 버린다면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데다, 보통은 차원의 압력을 버텨 내지 못한다.
방법은 없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
로만 드미트리가 걸음을 옮기며 폴란드의 지도자에게 말했다.
“버텨라. 전에 말했듯, 너희가 버티는 사이 나는 반드시 절대자들을 모조리 척결할 것이다.”
차원의 경계 너머.
그렇게, 로만 드미트리가 발을 들였다.
* * *
그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은 절대자 전체에게 전달되었다.
한참 캐나다를 공격하던 절대자 브라칸은,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얼굴 가득 비웃음을 보였다.
“크크크큭, 멍청한 인간! 우리를 추격하겠다고 차원의 경계에 스스로 발을 들이다니.”
차원 너머.
수많은 차원을 연결하는 무의 공간.
절대자들은 그곳에서 태어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일반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생명체들은 절대 차원의 압력을 버텨 낼 수 없다.
물론 로만 드미트리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미 드미트리의 세상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경험이 있기에, 그가 차원의 경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바른 방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차원의 경계를 넘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절대 인간에게 허락되는 영역이 아니다.
마법과는 다르다.
텔레포트 마법은 출발점과 도착점을 설정해서 직선으로 이동하는 방식이라면, 절대자들이 형성하는 차원의 경계는 시시각각 모든 것이 변화한다.
단 한 걸음. 0.01초의 차이.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정도로, 변화무쌍한 흐름은 절대자들만이 통제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여유가 생겼다.
아마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5분 이상 머무르지 말라는 볼피르의 조언에도, 브라칸은 여유로운 반응을 보였다.
“버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마라.”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
악착같이 발악하는 인간들이 보였다.
이미 성벽이 무너지고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밀려드는데도, 그들은 목숨을 걸고 몬스터들에 대항했다. 정말 재밌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차원을 경험했지만, 절대자를 직접 상대하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생명체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슥.
웃었다.
지금은 승리를 즐기고 싶었다.
“그래, 계속 발악하거라. 내가 만족할 만큼 즐길 수 있도록.”
휘이이잉.
강풍이 불었다.
차원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이 사람들을 휩쓸었고, 그들은 절대자의 방해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낄낄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자, 의식 너머로 볼피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브라칸. 5분이 지났다. 빨리 그곳을 벗어나라.]
‘대체 뭐가 걱정…….’
그때였다.
확-
차원의 경계를 뚫고.
무언가가 나타났다.
브라칸이 그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강력한 힘이 그의 머리를 틀어쥐고는 그대로 지상에 처박았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눈을 부릅떴다.
아직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 차원의 흐름에서 자신을 정확히 추격했단 말인가!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나.”
푹!
서늘한 감각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그로서는 알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차원의 경계에 들어선 순간, 처음부터 끝까지 브라칸이 남긴 마나의 흔적을 따라서 이동했다.
무림에서 샐러맨더 대륙으로, 그곳에서 이곳 대한제국으로. 세 번의 차원을 경험하면서, 로만 드미트리는 차원의 압력을 뚫고 정확히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힘을 얻었다.
검을 빼냈다.
브라칸이 몸을 파르르 떨자, 이번에는 그의 목에 검을 갖다 댔다.
“이제 넷.”
푸확.
목을 그었다.
브라칸이 인간과 똑같은 새빨간 피를 뿜어내며, 목을 부여잡고 바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승기를 잡았다.
이제는 절대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큰일 났습니다! 대한제국의 방어 체계가 무너졌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한 명.
세상의 모든 위험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