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602화 (602/615)

602화 출병(出兵) (1)

인간들이 한참 재앙을 준비하던 그때.

절대자들은 ‘드미트리’에 관심을 보였다.

“인간들은 참 멍청하단 말이지. 드미트리 또한 같은 인간에 불과한데, 그들을 이 세상에 불러들여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마론교야 10번의 대재앙을 막아 낸다는 맥락에서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49일의 대재앙을 준비하는 인간들은 한심할 정도로 멍청해.”

한 절대자의 말이었다.

49일 뒤.

차원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다면, 절대자들이 직접 강림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게이트가 생성될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와도 같다. 인간들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대해(大海)를 인간의 육신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멍청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볼피르와는 다르게, 절대자 대부분은 여유로운 얼굴로 49일 뒤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카르가스가 말했다.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인간들은 드미트리를 소환하는 것에 대한 기대치가 대단한데, 만약 두 차원의 흐름을 뒤틀어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세상에서는 겨우 49일일지라도, 드미트리가 존재하는 차원에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으로 적용될지 알 수 없는 일.”

웃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드미트리의 인간들은 그 긴 세월 동안 로만 드미트리의 부름을 기다릴 수 있을까. 오랜 세월이 흘러 갑작스럽게 목숨을 걸고 싸우라는 명령에, 그들은 과거의 약속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미트리가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기대했던 결과를 이루어 내지 못한 이 세상의 인간들은 엄청난 절망에 휩싸이겠지.”

“오호.”

“그것참 재밌겠군.”

절대자들이 동조했다.

드미트리 소환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중요한 대화는 최대한 비밀리에 나누었지만, 인간들의 움직임을 절대자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고로.

재밌는 소재였다.

무료함에 차원을 무너트리고 다니는 절대자들에게, 이보다 재밌는 소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힘을 모았다.

아무리 절대자라고 한들 차원을 뒤트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고, 그때만 하더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같잖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필요한 부분도 아니었다.

어차피 49일이 지나면 인간들의 세상은 절망을 맞닥트릴 것이다.

그런데도 정말 순수한 악의(惡意)로, 인간들이 최대한 더 큰 절망감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 카르가스와 절대자들은 뜻을 모았다.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한.

아니, 생각할 수 없는 변수.

그렇게 대한제국과 드미트리, 두 차원의 시간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 * *

드미트리.

그곳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것은 1년이 흐른 뒤였다.

드미트리에서 회의가 소집되었고, 마법 실험을 담당하고 있는 펠릭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처음 차원 너머의 세상에 연결되었을 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그때가 벌써 1년 전. 앨버트 백작의 증언대로라면 차원 너머의 세상은 이미 상당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지금껏 어떠한 연락도 받지를 못했습니다. 차원의 통로를 형성할 수 없다면 최소한 메시지라도 보냈어야 합니다. 무의미하게 흘러간 1년은, 황제 폐하께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1년.

드미트리는 마법 실험에 열을 올렸다.

헨리 앨버트로 얻은 실마리를 통해 상당한 성과를 얻었지만, 이상하게도 차원의 경계가 뒤틀리면서 드미트리가 먼저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은 번번이 실패했다.

실험 초기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분명히 몇몇 연결 고리를 찾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펠릭스를 필두로 의견을 보태는 사람들의 모습에, 로드웰 드미트리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아무리 많은 가능성을 논의한다고 한들, 차원의 경계라는 미지(未知)의 세계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결과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헨리 앨버트 백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황제 폐하는, 그리고 나의 형은. 내뱉은 말을 반드시 현실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아니다. 1년의 세월은 의문을 제기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앞을 보았다.

크리스, 케빈, 펠릭스, 발렌티노, 파비우스, 에드윈 헥토르 등등.

매번 로만 드미트리를 주제로 회의를 진행할 때마다, 대륙의 거물들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무조건 본인이 참석했다.

그것은 1년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는 열정이었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열망이 대단했기에, 펠릭스의 의문은 그 믿음에 문제를 일으킬 요소가 되지 못했다.

“믿어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서로가 열망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의 다짐.

사람들은 몰랐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생각한 것보다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사실을.

* * *

그 후로 2년, 3년.

그리고 5년이 흘렀다.

로만 드미트리가 처음 사라졌을 때보다도 더 많은 세월이 흘러 버린 상황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조차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헨리 앨버트가 보고 들은 것은 정말 사실일까, 로만 드미트리가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것은 맞을까, 지난 5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의문이 번져 나갔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크리스조차도, 무기력한 얼굴로 목적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제 폐하.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매일 밤.

복잡한 머릿속에 잠이 오지 않았다.

차원 너머에 로만 드미트리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의 실마리를 찾고도 지난 5년 동안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펠릭스의 설명대로라면 5년 전에도 로만 드미트리의 세상은 차원을 이동하는 기술력을 갖추었다.

그렇다면 지나간 세월이 의미하는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첫 번째.

로만 드미트리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를 위협하는 적에게 당했다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차원의 경계를 넘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말이 안 돼.’

웃겼다.

마계로 넘어가 마왕조차 베어 버린 로만 드미트리인데, 대체 어떤 괴물이 그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아무리 흘렀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패배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의 세상을 그리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곳에 새로운 터전을 형성했다면, 그리고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걱정했다면 스스로의 판단으로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든 5년이나 흘려보낸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겠지.’

한숨이 나왔다.

문득 케빈이 떠올랐다.

로만 드미트리를 근접해서 모셨던 자신조차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케빈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뻔했다.

5년 전부터 지금까지 반복되는 패턴은 드미트리에서 매우 유명했기에, 크리스는 케빈을 만나기 위해서 드미트리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훅, 훅!

예상대로였다.

땀으로 흠뻑 물들어 검을 휘두르는 케빈.

매일같이 휘두르는 검이 익숙할 법도 한데, 케빈은 항상 훈련이 끝나면 녹초가 되어 돌아갔다.

케빈에게 다가갔다.

크리스의 존재를 알아채고 검을 거두자, 곧바로 본론을 물었다.

“케빈. 너는 세간의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5년의 세월이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앞뒤를 생략한.

진심을 물었다.

서로의 생각은 충분히 알았다.

크리스가 무엇을 묻는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케빈은 담담한 표정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는 반드시 돌아오실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크리스 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삶의 밑바닥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습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시절부터 마계를 정벌할 때까지. 제가 지켜본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단 한 번도 이행하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이곳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한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스스로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 생각이라도 어떻게든 전달했을 분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입니다.”

굳건한 믿음이었다.

1년이든, 3년이든, 5년이든.

케빈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 방랑하던 삶은,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 하나로 종지부를 찍었다.

믿었다.

언젠가는 만나리라는 사실을.

그날을 위해, 케빈은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후회할 날이 찾아온다면.”

슥.

걸음을 돌렸다.

다시 자세를 취하며 훈련을 이어 나갔다.

“그날은 제가 명이 다할 때일 겁니다. 기다리지 못한 불충 외에 제가 걱정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훅, 훅.

검을 휘두르는 케빈.

크리스는 잠시나마,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크리스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지난 며칠간 정리한 생각을 밝혔다.

“최근, 드미트리에 많은 우려가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해한다. 나 또한 너희와 같았으나,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무사 귀환을 바란다. 드미트리 제국을 건국하고, 대륙을 정벌하려던 양대 산맥을 무너트리고, 스스로를 희생해 마왕을 처리했던 황제 폐하로 인해 우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의문을 지니지 마라. 그분에 대한 일말의 의문을 배제하고, 황제 폐하의 무사 귀환을 준비하는 모든 일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라.”

드미트리.

그들은 주기적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그날이 찾아왔을 때 병력을 어떻게 움직이며, 차원 너머로 이동해 적들을 무슨 방법으로 괴멸시킬지.

5년간 빠짐없이 반복했다.

크리스는 그 사실을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 삶에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이 녹아들 것이다. 그 시간이 십 년이 걸리든, 앞으로 이십 년이 걸리든 그것들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은혜를 입은 만큼 우리 삶의 일부를 헌납할 뿐이다. 대답 없는 기다림에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난 5년간 반복해 왔던 삶 또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의 차이였다.

결과를 바라나, 과정 자체를 받아들였다.

어떨 때는 믿음이 흔들리는 날이 있겠지만, 삶의 일부라면 일상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모두가 크리스에 동조했다.

적어도 로만 드미트리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크리스의 말에 반발하지 않았다.

“오늘부터 우리는 케빈과 같이 훈련을 진행할 것이다. 언젠가 황제 폐하가 존재하는 세상에 도달한다면, 그 누구도 드미트리 제국을 넘볼 수 없도록. 우리는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 것이다.”

“명을 따릅니다!”

“명을 따릅니다!”

우렁찬 목소리.

그날, 드미트리는 새로운 기점을 맞이했다.

* * *

시간은 빛처럼 흘러갔다.

5년에서 10년.

10년에서 20년.

새로운 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은 설화(說話)처럼 로만 드미트리의 영웅적인 행보를 전해 들었다.

오래전, 그가 존재했다는 사실.

오래전, 그가 세상을 구했다는 사실.

세월의 흐름에 쓸려 나갔다.

사실 이제는 누구도 로만 드미트리를 잊었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이 없는데도, 크리스를 비롯한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반복되는 삶을 멈추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의식주를 당연하게 해결하는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를 기다리는 삶 또한 모두가 받아들인 삶의 일부였다.

만에 하나.

언젠가 이루어질 현실.

그것을 위해 모두가 삶의 일부를 헌납했다.

그리고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느 날과 같이 마법 실험을 진행하던 펠릭스는, 실험 도중에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이건?!”

화악-

확실했다.

차원 너머.

하나의 신호가 전달되었다.

그것은 그동안 간절하게 기다려 왔던, 바로 로만 드미트리의 세상에서 보낸 신호였다.

무려 30년.

30년이 걸려 드디어, 그들은 새로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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